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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여성의 맹세

salt |2009.05.30 21:17
조회 563 |추천 0
탈북여성의 맹세   「북한이라는 곳은 이 지구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는 가장 부끄러운 인간의 생지옥입니다.」회의장 가득히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인간의 존엄이니 권리나 자유는 말할 나위도 없이, 가장 초보적이고 기본적인 식·의·주마저도 보장되지 못하는 미개사회입니다. 배가 고프다고 우는 아이를 귀찮다고 때려죽이고, 그 시체가 환각증상으로 고기 덩어리로 보여 먹어 치워버리는 예가 드물지 않은, 처절한 사회입니다.」북한에서 탈출한 30대 여성이다. 동경에서 2003년 3월 탈북자증언집회가 열렸을 때였다. 얼굴을 가리기 위하여 썬그래스를 끼고 모자를 눈 밑까지 눌러쓰고 있었다. 함경북도에서 1999년에 탈출하여 중국에서 몇 년간 잠복생활 끝에 한국에 도착한 조영옥(가명)여사다.

「북한 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회」 야마다후미아끼 대표와 저널리스트인 이시마루 지로 씨의 노력으로 한국에 살고 있는 12명의 탈북자가 일본이 초청으로 오사카와 동경에서 북한의 실태를 밝히는 증언집회를 열었다. 12명 모두 1960년대에 북한과 조총련의 「지상낙원」감언에 속아, 북한으로 건너갔던 재·일 조선인 또는 그 2세들이었다. 조 여사의 이야기는, 가냘픈 몸매의 어디에서 그런 힘이 있는 가고 놀라울 정도로 박력이 넘쳤다. 「양친은 아사하였습니다. 조카도 아사하였습니다. 살기 위해서 그토록 버텼던 부모 형제들을 이 세상에서 무참하게 갈라놓은 생지옥, 꿈도 희망도 미래도 없는 땅, 나한테서 청춘도 행복도 가정도 자식도 미련마저도 모두 빼앗아 가버린 땅,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그런 곳에서 나는 절대로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단 하루라도 좋다. 참다운 자유를 맛볼 수 있는 곳이 이 지구상에 있다면 땅 끝까지라도 가서, 찾아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암흑의 북한을 탈출하기에 이른 것입니다.」그녀의 말은 시처럼 간결하고 힘차고 아름답게 들렸다. 탈출한 곳은 중국의 영변 - 조선족 자치주였다. 목숨 걸고 탈출한 그곳도 「또 하나의 감옥이었다」라고 했다. 사방팔방으로 감시의 망을 치고 있는 중국의 공안의 감시의 눈, 호시탐탐 노리는 인신매매 업자의 함정, 차별과 멸시, 집도 없고 돈도 없고 의지할 곳 없는 외로움 속에서 유랑하며, 구걸하며, 살길을 찾아 몸부림치면서 방황하여 목숨을 이어왔다는 것이다. 김정일의 북한에 대한 분노와 예리한 비판이 돋보인다.

「지금 김정일은 선군정치의 이름아래 굶주린 인민을 미끼로 거둬들인 원조식량과 자금으로 핵병기와 미사일을 생산하고 세계평화를 위협하며 전쟁놀이까지 연출하고 있습니다.」조 여사의 발언은 다른 증언자와는 달리, 북한 인민의 참상을 방관하고 있는 세계의 세론에 대해서도, 책임을 묻는 설봉에 나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나는 이 자리를 빌어 세계의 양심에 묻고 싶습니다. 우리들에게 무슨 죄가 있어서 이 정도로까지 불행한 일을 당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같은 하늘아래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의 이치인데 왜 우리들이, 우리 부모 형제가 우리 북한의 인민만이 살기위한 터전을 찾아서 헤매야 하며 이름도 없이 죽어가야만 합니까?」

그날 저녁 동경시내의 한국요리점에서 개최한 간친회의 자리에서 나는 자기소개를 하고 지금 북한의 기아를 조사하고 있으므로, 언젠가 서울에 가게 되면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부탁했다. 그 해 9월 서울취재 시에 다시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함경북도 청진 부근 어느 지역에서 1990년대 중반부터 체험한 엄청난 기아의 상황뿐 만 아니라 자기도 영아살해에 가담한 쓰라린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다음은 조 여사의 이야기다. 「나는 그 때의 일을 생각하게 되면 자다가도 벌떡 뛰어 일어난 일이 때때로 있었습니다. 1994년에 김일성이 사망하고 급속하게 악화된 식량난으로, 굶어죽는 사람이 여기저기에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음은 내 차례구나 하며 아사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아버지가 먼저 단식을 시작하였습니다. 하루 한 끼니 식사를 마련하기 위해서, 악전고투하고 있는 우리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스스로 단식을 하신 것입니다. 물만 마시니 설사를 하게 되고 빠르게 허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1997년 8월에 부친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병으로 오랫동안 누어 계셨습니다. 언니가 있었는데 혼자 농촌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옥수수 가루에 풀을 썰어 넣은 죽을 먹지 않겠다는 일곱 살 난 아들을 언니는 화를 내면서 세탁 방망이로 때리고 있었습니다. 이것도 겨우 마련한 식사인데 말입니다. “안 먹을래? 이 방망이로 더 맞고 싶으냐?” 무섭게 화를 내는 언니의 모습에 기가 죽어 조카는 울면서 그 풀죽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 조카도 얼마 후에 아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때 언니 몸에는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고 있었습니다. 생각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는 임신이었습니다. 언니는 반미치광이처럼 날뛰었습니다. 유산을 시키려고 언니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지만 뱃속의 아이는 점점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1998년 7월 어느 날, 비가 보슬 보슬 내리고 있었습니다. 유난히도 음울한 한 밤중이었습니다. 언니는 이웃집 할머니와 나의 도움으로 출산을 하였습니다. 살을 깎는 고통에서 출산한 아이지만 언니는 보려고도 하지 않고 등을 돌리고 누운 채로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계획대로 버리고 오라. 아버지도 죽고 아이들도 죽고 어머니도 지금 저승길을 헤매고 계신다.

다음번에는 너도 죽고 나도 죽게 될 것이다. 이런데 아이가 태어나서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나는 기르지 못한다. 살아 있어도 결국은 죽을 것이니 지금 죽는 것이 훨씬 행복하다.” 이웃 할머니와 나는 예정대로 피로 범벅이 된 영아를 비닐로 싸서 묶었습니다. 울음이 끝날 때까지 방 한 구석에 놓아두었습니다. 비는 보슬보슬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비가 새는 방안에서 아이는 계속 울고 있었습니다. 저렇게 작은 몸뚱이에 무슨 힘이 있어서 2시간을 계속 울고 있었습니다. 울음소리가 멈출 때까지 나는 돌처럼 망연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

말을 마치고서도 그 때 상황에 치를 떠는 듯 어둡고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아마도 내 귀에서 평생 동안 그 울음소리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조 여사의 불행은 재일조선인 모친이 북한으로 귀국하면서 시작되었다. 조 여사의 어머니는 1960년대에 맨 먼저 오사카에서 북한으로 들어갔다. 조그마한 가내공업을 경영하는 부친이 돌아가셔서 일본에 이 이상 머물러 있어도 별 볼일 없겠구나 생각하여 늙은 모친과 아직 10대인 2명의 동생들을 억지로 이끌고 북한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귀엽게 자란 외딸이었다. 현지의 청년과 결혼하여 조영옥 씨를 낳았던 것이다. 청년은 성분도 좋고 핵심계층에 속하여 북한의 엘리트만 다니는 김일성 종합대학의 학생이었다. 그러나 귀국자는 최하층의 적대계층에 속하기 때문에 청년은 4학년 때에 대학에서 쫓겨나고 탄광노동자의 신분으로 떨어졌다. 조영옥 여사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아버지는 대학에서는 공산당의 역사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에게 제일 가까운 엘리트 학과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유언비어과라고하며 우습게보고 있었습니다. 김일성이 거짓말로 꾸며낸 역사에 대하여 참을 수가 없었던 거지요. 아버지는 김일성을 철저히 미워했습니다. 우리 집에는 TV가 있었기 때문에 (당시는 TV가 있는 집은 셀 수 있을 정도였다) 이웃에 사는 사람들은 TV영화 등을 보기 위해서 우리 집에 모이게 됩니다. 그 때마다 김일성이 화면에 나오게 되면 바로 꺼 버리거나 아니면 다른 채널을 이리 저리 돌리거나 하여 화면을 흐리게 하곤 하였습니다. 어머니와 나는 가슴이 조마조마하여 타이르기도 하였으나 듣지 않았습니다. 그 때 나는 사로청돌격대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돌격대) 대원으로 선발된 간부였으므로 당에 대한 아버지의 불평불만을 듣기가 정말 싫었습니다.

술을 마시게 되면 꼭 무녀가 씨부렁거리는 것 같은 불만의 말이었습니다. 어머니와도 자주 말다툼을 하였습니다. 귀국자이기 때문에 아무 잘못이 없어도 색안경으로 보는데 그런 말을 하게 되면 반동의 낙인이 찍혀서 추방당하고 싶으냐고 그러나 지금은 아버지가 무엇에 화를 내고 있었는가를 잘 이해하게 됩니다. 김일성의 과오를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버지는 김일성대학 이외에 국제관계 대학도 나와서 당시 초 엘리트들만이 가는 소련 유학도 한 사람이었습니다. 5개 국어도 할 수 있고 우리들이 듣지 못하게 할 이 얘기는 일본어로 말하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인재를 탄광 등에 추방하고서도 어떻게 나라가 발전하겠습니까? 귀국자의 딸을 사랑한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아버지가 훌륭하였다는 것은 어떤 운명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래된 후에 명예회복의 기회가 있었으며 또 한번 중앙에서 일할 기회가 제공되었으나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어머니는 귀국한 것을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어머니도 북한에 도착하였을 때 곧 속았구나 하고 생각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결심을 굳힌 것 같았습니다. 일본에서 배운 양재기술로 여러 가지를 만들고 꿰매어 줌으로써 사람들이 기뻐했습니다. 못마땅하게 여긴 이웃 사람 중에 장사하고 있다고 밀고도 당했습니다만 어머니는 장사가 아니라 봉사라며 김일성 선집을 내 밀면서 인민에게 봉사하는 것은 조선노동당 방침에 맞는 일이라고 반론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염소를 다섯 마리 기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에게 먹이고 남은 젖을 남모르게 팔고 있었습니다. 식량사정이 어렵게 되기 시작해서부터는 식당일도 하였습니다. 밀고 당하여 당에서 비판당해도 어머니는 인민에게 봉사하고 있는데 무엇이 나쁘냐고 김일성의 말을 인용하여 빠져나갔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생활태도를 보고 자본주의가 개인의 능력을 발휘시키는 체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회주의는 개인이 10개의 능력이 있어도 당에서 한 가지 일만 하라고 하면 그 외의 일을 하면 안 되므로 사회주의국가가 줄줄이 붕괴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체제가 어떻게 발전하겠습니까? 어머니는 아버지와 싸울 때 딱 한번 아버지를 집어던진 일이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살고 있을 때 조선인 차별에 지지 않기 위해서 어릴 때부터 유도를 배웠다고 합니다.」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야기 도중에 조영옥 여사는 생각이 떠오르는지 일본 가요를 알고 있다고 하였다. “어떤 노래?” 그녀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만나지 못하게 되어서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바다보다 깊은 사랑을 ···」마쓰오 가스고의 “재회”가 아닌가! 「만나지 못하게 되어서, 비로소 알게 된 바다보다 깊은 사랑의 마음. 이렇게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아 갈매기도 알지 못하겠지」

1960년대 일본에서 안보투쟁이 해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한다」라는 노래와 함께 유행된 노래였다. 마쓰오 가스고의 느리고 나른하게 부르는 모습, 멜로디와 가사가 떠오른다. 나도 어느새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 살고 있었던 동경의 시부야구 “하타가야” 거리의 내음까지. “어떻게 이 노래를 알고 있지요?” “어머니가 자주 부르고 있었습니다.” 북한으로의 귀국자는 바로 일본과 자유스럽게 왕래할 수 있다는 감언은 거짓이었다. 두 번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귀국자의 절망, 만날 수 없게 되어 비로소 알게 된 것은 일본에 남겨놓고 온 사랑이었든가, 아니면 일본에의 그리움이었든가?

아사문제로 화제를 바꾸었다. “김정일이 「600만 명만 남게 되면 나라는 재건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고 1997년경에 일본 신문에 보도된바 있었는데 그러한 말을 했는지요?” 「나는 김정일의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백성은 얼마든지 생긴다. 그런 놈은 그대로 놓아두어도 좋다.’ 일반 서민에게 식량을 주어도 의미가 없다. 중요한 사람에게 주면 된다는 것이 김정일의 생각이었습니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중요한 사람이란 150만의 군대, 50만의 국가안전보위부, 조선노동당의 간부와 중요 군수산업 노동자 이 사람들을 합하면 대체로 5~6백만 명이 됩니다.」

“김정일 정권이 넘어질 가능성은 있는지요?” 「나는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인민군의 고관이었던 아버지쪽 삼촌들의 이야기에서 군의 상층부에서도 지금은 그 시기는 아니지만 기회를 엿보고 있는 사람들이 제법 있습니다. 모두가 김정일 가지고는 나라가 망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아버지가 적대계층으로 추락하였을 때 일가친척 모두가 추락되지 않았습니까?” 「족보(선조대대의 가계도)에서 아버지 이름을 삭제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른 분에게 해가 미치지 않습니다. 아버지 쪽은 핵심계층이므로 삼촌들은 모두가 요직에 있었습니다. 김일성이 죽었을 때 쯤 구 간부인 삼촌이 우리 집에 와서 아버지와 밀담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김정일이가 김일성을 죽였다는 것이었습니다.

평양에서 그런 소문이 나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 당시에는 당과 수령의 충성분자였으므로 그 말들을 곧이듣지는 않았습니다.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에서 숨어 지낼 때 중국 잡지에서 김일성은 김정일에 의해서 살해되었다는 기사를 읽고 역시 아버지와 삼촌간의 이야기가 사실이었구나 하고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삼촌은 지금 퇴관했습니다만 부하들은 많이 있습니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때가 오면 반드시 움직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300만 명이나 되는 인민을 아사시킨 일. 인민은 아직 진실을 모르고 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알게 되겠지요. 그 때의 분노와 원망은 김정일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는 나를 믿고 지금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는 김정일 정권타도에 보탬이 될 계획을 이야기 해 주었다. 안전을 위해서 생략하지만 놀랄만한 계획이었다. 그 계획 추진과 함께 우선적으로 북한에 남아있는 어머니쪽 10명의 친척들을 탈출시키는 일, 그 때문에 네트워크를 만들고 또 자금조달을 추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아침 5시부터 밤 11시까지 세 곳의 직장을 뛰어다니며 일하고 있다. 이를 버티기는 힘들지만 북한에서 청년동맹의 돌격대원이었던 때의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였다.

「이 지구상에 북한이라고 하는 악의 사회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변함없이 우리들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등을 밀어서 선두에 서게 해 주세요」2003년 3월 동경의 증언집회에서 그녀가 맺은 말이다. 등을 밀어서 선두에 서게 해 달라는 말에 감명을 받았다. 이 말에 대해서 다시 문의하였다. 「그대로입니다. 존재할 가치가 없는 생지옥을 왜 존속시킬 필요가 있습니까! 멸망이 빠르면 빠를수록 동포가 구원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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