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bius strip (뫼비우스의 띠)
여럿을 향해 내뱉거나 여럿에게 보여지는 말과 글은
그 순간 이미 내 것이 아니다.
그 말 또는 글의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이
온전히 그들 듣는 이들의 주관적 판단에 맡겨지는 것 뿐만 아니라
때로는 내 마음 속의 진실까지도 그들의 해석에 영향 받고 강제되곤 한다.
나의 것은 오로지 그 말이나 글에 따른 책임뿐이다.
모든 예측 불가능한 결과까지 포함한.
아,
말하기의 난감함이여,
글쓰기의 어려움이여...
사람들은
언제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이해하고 싶은 것만 이해한다.
용기가 있거나, 혹은
단순하거나...
그것을 우리 의식의 일면성 또는 편향성이라고 하겠는데,
그것은 우리 인식 혹은 삶이라는 것이
기껏해야 양면으로 되풀이되는,
비틀린 뫼비우스의 띠를 길 삼아 걷고 있기 때문이다.
먼 길 걸어봤자 항상 제자리인...
A. 카뮈(Albert Camus)는
그처럼 '부조리(不條理)'한 '자유'를 '인간 존재와 세계와의 관계'의 출발점으로 인식하고,
일상적이고 무의미한 반복을 행복으로 보고 달관(達觀)해야 한다며,
'운명애(運命愛)'로서 <시지프 신화(神話), Le Mythe de Sisyphe>를 말하기도 했지만,
기실 극소수의 용기 있는 사람들, 혹은
대다수의 단순한 사람들은
한 쪽만을 선택해서 보고 그 쪽만을 이해한다.
잘 해야 그저 이해할 뿐,
달관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그런데 세상의 어떤 집단, 어떤 주장도
온전히 선(善)할 수 없었던 것처럼
온전히 악(惡)하지도 않다.
거기서 종종 우리의 선택은 그 정도를 가늠하여 이루어지게 되는데,
간혹 보다 철저한 정신(들)은 미덥지 않은 그 정도의 차이에 현혹되지 않고,
결국 어느 한 쪽에다 자신을 던지기를 거부한다.
이 때 그 상반된 집단이나 주장의 영역인 원(圓)들 사이에
겹치는 부분이 넓으면 넓을수록 설자리도 넓다.
좀 더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면
주장과 주장의 전파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고의 다원화, 보편적 상대주의적 사고, 상호 인정 이런 것들이
현대 사회에서는 더 근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소양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를 양분(또는 삼분, 사분)하고 있는 원들은 이제
그 공통집합 부분이 거의 없거나,
겹치는 부분이 없어져 가고 있는 중이다.
극단한 개인주의 속에서 자아가 탕진되고 말았던 것처럼
극단한 전체주의 속에서 자아가 함몰해 버리는 비극도 우리는 보아왔다.
불교의 대승(大乘)과 소승(小乘)도 그 한 예는 될 것이다.
과연 어느 쪽이 온전히 옳고,
어느 쪽이 온전히 그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긴 불교...
그들의 종교 역시 '백정도 칼을 버리는 순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누구라도 해탈하고 득도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떠들어 왔으나,
석가모니 이래 저 어두운 우주의 빛나는 별이 된 인간은,
내가 알기론, 아직 없었고,
장담 하건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추상적인 범신론으로 위장된 사실상의 무신론...
해탈(解脫), 득도(得道), 그럼으로써 (혹은 그럼으로서) 부처되기(成佛)...
아, 그 찬란한 꿈이여, 희망이여!
그리하여 모든 욕망을 버렸으나
그 모든 욕망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큰 욕망 하나를 얻었으니...
어찌하랴, 놓을 수 없는 그 큰 번뇌를!
누구의 말처럼
크건 작건 옳건 그르건 이데올로기라고 부를 수 있는 관념 체계의 핵심은
바로 그 전망에 있다.
어떤 이데올로기든 그 힘은 전망의 실현 가능성에 비례하게 되어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실현 가능성이라기보다는 기만적인 분장술에 있다.
그리하여 당대인들을 현혹하기에 충분한 분식(扮飾, dressing)을 갖추게 되면
그 이데올로기는 곧 힘이 된다.
신화의 시대에는 신화에,
감성의 시대에는 감성에, 그리고
이성의 시대에는 이성에 걸맞는 분식.
그런데
지금이 신화의 시대인지, 감성의 시대인지, 이성의 시대인지 조차 구분하지도 못하면서,
도대체 언제까지 교조적인 신화의 시대를 낭만적으로 살겠다는 말인가.
가만 생각해 보면
신화는 물론이거니와 감성이나 이성이 제대로 존재했던 시대도 사실 없었다.
실은 과도기(過渡期)가 아니었던 시대도 단 한 번도 없었다.
유사 이래 '과도기' 아니었던 시대가 그 언제란 말인가.
전망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얘기하자면,
미래가 현재의 비참과 불행을 보상해 주리라는 약속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종교가 아득히 먼 '신화의 시대' --- 가 만일 존재하기라도 했다면 그때 --- 부터
수천 년에 걸쳐 써먹고 있는 낡고 닳은 속임수이다.
니체나 스피노자를 다시 들먹이지 않더라도
죽음을 비장하고 엄숙하게 여기고 슬퍼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증명이 된다.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힘의 절반은 <거짓과 광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일면적 혹은 편향적인 인식과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언제까지나 예전의 애매한 주관적인 기준과
현재의 이기적인 행동의 이중성 속에서 살아갈 뿐이다.
뒤틀린 뫼비우스의 띠를
여전히 그리고 그저 하염없이
길 삼아 걷고 또 걷는 것으로 보인다,
그 길이
앞면인지 뒷면인지도
'인식'하지 못하는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