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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克日의 상징’ 白冶 金佐鎭 장군 3. 北路軍政署 ⑴

조의선인 |2009.06.30 20:30
조회 137 |추천 0

 

 

★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대통령이 새로운 세계질서의 정립을 위해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를 제창함으로써 오스트리아·헝가리·오스만 제국과 러시아의 영토였던 발트 해 연안지역 등이 여러 신생국가로 나뉘어지고 당시 강대국의 지배를 받던 전세계의 수많은 약소민족들에게 커다란 희망과 용기를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이같은 민족자결주의에 의한 세계적 흐름은 일제의 압박을 받고 있던 한국인들에게도 큰 자극제가 되었다. 여운형(呂運亨)·김철(金澈)·선우혁(鮮于爀)·김구(金九)·이광수(李光洙) 등이 이끄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은 1918년 12월에 ‘조선 독립에 관한 진정서’를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이듬해 1월 김규식(金奎植)을 파리 강화회의(講和會議)에 대표로 파견하여 조선 독립을 지원해줄 것을 요구했다.

 

고종(高宗)이 급서(急逝)하자, 그 사인(死因)이 총독부의 음모로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떠돌아 조선 민중은 매우 격분해 있었다. 한편 최팔용(崔八鏞)·백관수(白寬洙)·송계백(宋繼白)·최근우(崔謹愚)·김도연(金度演) 등 일본유학생들로 구성된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은 도쿄[東京]에서 1919년 2월 8일 조선독립선언(朝鮮獨立宣言)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국내의 애국지사들에게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일깨워주었다.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이 독립선언에 관한 일을 의논했으며, 다시 송진우(宋鎭禹)·현상윤(玄相允)·최남선(崔南善) 등은 중앙학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 진행방법에 관하여 의논하였다. 

 

이들은 천도교·기독교·불교 유지들을 민족대표로 정하였다. 그리고 민족대표의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함과 동시에, 그 취지를 각국에 보내기로 결정을 보았다.이어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인사들을 교섭하였다.

 

송진우와 최남선이 조선왕조 말기 유지들과 접촉을 벌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결국 기독교 측에서는 이승훈(李昇薰), 천도교 측에서는 최린(崔麟)이 담당하여 교섭한 결과 많은 동지를 얻었다. 이 사실을 안 불교 측에서도 한용운(韓龍雲)·백용성(白龍城)이 가담하게 되니, 이로써 기독교 측 16명, 천도교 측 15명, 불교 측 2명으로 모두 33인이 되었다.

 

이들 33인이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총대표에 손병희를 추대하였다. 그들은 서울 가회동 손병희 저택에서 첫번째 모임을 갖고 거사문제를 다각도로 협의하였다.

 

때마침 고종의 인산(因山)이 3월 3일로 결정되었다. 그들은 이 날의 인산에 참석하고자 많은 사람이 서울로 모일 것을 감안하여,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했다. 3월 1일 정오를 기해 대표자들이 탑골공원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인쇄물을 뿌리며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하였다. 또 각 지방에도 비밀리에 조직을 구성하고 구체적인 날짜와 시간 등을 전달해 두었다.

 

독립선언서와 일본 정부에 대한 통고문 및 미국 대통령, 파리 강화회의 대표들에게 보내는 의견서는 최남선이 맡아 기초하기로 하고, 내용과 인쇄는 천도교 측에서 담당키로 하였다. 이종일(李鍾一)·김홍규(金泓奎)의 철저한 감독 아래 2월 25일 보성사(普成社)에서 3만 5천부를 두 번에 걸쳐 인쇄하였다. 인쇄물의 배부는 종로 이북은 불교계 학생 10명, 남대문 밖은 천도교계 10명이 각각 담당하였다.

 

한편 일본 정부에 대한 통고문의 제출은 천도교 측에서,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의견서는 기독교 측에서 담당하기로 하였다. 2월 28일에 민족대표들은 손병희의 집에 모여 마지막 의논을 했다.

 

그들은 탑골공원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모여 혼란이 예상되므로, 독립선언 장소를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泰和館)으로 결정하였다. 이날 김원벽(金元璧)을 비롯한 인쇄물 배포담당 학생들은 승동교회(勝洞敎會)에 모여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독립선언서 1500매를 받아 강기덕(康基德)이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학생들은 3월 1일 정오에 탑골공원에 모여 만세를 부르고 시위에 앞장 설 것을 다짐하였다.

 

3월 1일 정오, 마침내 독립을 외치는 함성은 터져 나왔다. 아침부터 탑골공원에는 4~5천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오포(午砲)소리가 울리자, 학생대표 정재용(鄭在鎔)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르니, 학생들은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이들 학생이 만세를 외치며 공원에 나서자 수많은 군중이 시위행렬에 가담했고, 그 대열이 대한문(大漢門) 앞에 이르렀을 때는 서울 장안은 온통 흥분의 도가니로 변해갔다. 이들 행렬은 대한문에 이르자, 고종의 빈전(殯殿)을 향해 삼례(三禮)를 행하고 대열을 나누어 일대는 미국 영사관 쪽으로, 일대는 조선총독부 쪽으로 향하던 중 일본 경찰대와 충돌하였다.

 

한편 민족대표들은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 모여, 오후 2시경 한용운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다음 전화로 경찰에 자진 통고함으로써 체포되었다. 이 시위운동은 오후 6시에 일단 끝났으나, 8시에는 마포에서 1천여명이 다시 만세를 부르며 시위했고, 11시경에는 예수교부속학교 학생 5백여명이 만세를 불렀다.

 

이 시위는 서울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 3월 1일에는 개성·평양·진남포·선천·안주·의주·원산·함흥·대구·황주 등지에서 일어났고, 이어 다음날에는 전국으로 확대되어 시위가 벌어졌다. 학교는 휴교하고, 시장은 철시, 공장은 파업, 관리는 휴무하였다.

 

또 3월 28일에는 대한제국의 관료였던 김윤식(金允植)이 총독부에 조선독립을 승인하라는 최촉장(催促壯)을 보냈으며, 유림대표인 김창숙(金昌淑)·곽종석(郭鍾錫) 등이 독립을 외치고 일어났다.

 

이러한 시위운동에 대해 총독부는 무력탄압으로 일관하여,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거나 투옥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수원 제암리에서 29명이 불에 타 죽은 학살 사건이다. 일본 헌병들은 제암리 사람들을 모두 제암리 교회에 몰아넣고 출입구를 봉쇄한 다음, 늙은이나 어린이를 가리지 않고 기관총으로 무차별 총격을 가한 후 그래도 부족하여 불까지 질러 제암리 동민을 일시에 몰살시켜 버렸다.

 

이 밖에도 화수리·정주·사천·합천 등지의 집단 학살과 유관순(柳寬順)의 서대문 형무소 순국 등 일제의 잔학상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거족적인 3·1운동은 3월과 4월에 걸쳐 최고조에 달했으며, 국내뿐 아니라 만주 지역과 하와이 등지까지 퍼져 나갔다. 3·1운동 당시 만세 시위에 참가한 인원은 총 2백 2만 3천 98명이며 일본 군경에게 피살당한 사람은 7천 509명, 부상자는 1만 5천 961명, 체포된 사람은 4만 6천 948명, 헐리고 불탄 가옥은 715호, 교회 47개소, 학교가 2개교였다.

 

이러한 거국적인 3·1운동은 일제의 강대한 무력 앞에 제압되어 결과적으로 실패하였으나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수립되는 계기를 마련했고 세계 만방에 우리 민족의 자주의식과 독립의지를 드러내는 성과를 올렸다. 

 

3·1운동은 한국 민족해방운동의 분수령으로서 민족의 주체성을 확인하였고, 우리 민중에게 독립·자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 주었다. 일제는 3·1운동에 큰 충격을 받아 무력탄압만으로는 한국 민족을 억누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무단정치와 헌병통치를 이간책동하는 문화정치(文化政治)로 식민지 지배 노선을 변경하였다.  

 

★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총사령관에 부임하다. 

 

국내에서 온 민중이 궐기하여 만세를 외친 3·1운동이 일제의 무력탄압으로 많은 희생자를 낸 채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백포(白圃) 서일(徐一) 지사(志士)는 평화적인 비폭력 시위로는 조국의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무력(武力)을 길러 일제 세력을 한반도에서 구축(驅逐)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 산하의 군정회(軍政會)가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로 개편되어 총재부와는 별도로 군사부가 설치되고, 운영에 대해서는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에게 전권을 맡겼다. 

 

한편,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 승인을 받기 위해 윤기섭(尹琦燮)을 파견했는데, 임시정부에서는 ‘대한군정부’라는 명칭이 임시정부와 혼돈을 가져올 염려가 있다 하여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개명한다는 조건으로 승인했다. 즉, 1919년 임시정부 국무원은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화하기 위하여 국무원 포고령 제205호를 발표하고 만주의 독립군 여러 부대를 총괄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서일 지사의 대종교 조직을 통한 지도력과 김좌진 장군의 명성을 배경으로, 당시 만주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무장 단체 가운데 가장 강력한 조직력과 무장력을 보유한 부대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임시정부는 서간도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이탁(李鐸)·김동삼(金東三) 등의 한족회(韓族會)에게 11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라는 명칭을 부여한 바가 있어, 북간도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단체라고 하여 ‘대한군정서’라는 정식명칭 대신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북로군정서의 총재인 서일 지사는 김좌진 장군의 군사적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군사부 총사령관과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 소장을 겸임하게 했다. 북로군정서의 본부는 길림성(吉林省) 왕청현(汪淸縣) 대왕청(大汪淸)에 있었으며, 부대 사령부는 춘명향(春明鄕) 서대파구(西大坡溝) 십리평(十里坪)에 소재하고 있었다. 북로군정서의 중앙조직은 서무부·재무부·총재부·참모부·사령부로 구성되었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총재 서일(徐一) 

부총재 현천묵(玄天默)

고문 김가진(金嘉鎭), 최재형(崔在亨), 임창세(林昌世)

서무부장 임도준(任度準)

경신국장 채규임(蔡奎任)

경찰과장 손이목(孫肄穆)

통신과장 채신석(蔡信錫)

징모국장 김우종(金禹鐘)

징모과장 이시권(李時權)

간사국장 김광숙(金光淑)

편수과장 황태영(黃泰永)

인쇄과장 이태환(李泰煥)

계사국장(稽査局長) 김덕현(金德賢)

재무부장 계화(桂和) 

탁지국장(度支局長) 윤정현(尹挺鉉)

모연국장(募捐局長) 이홍래(李鴻來)

모연과장(募捐課長) 김국현(金國鉉), 이원복(李元福), 최행(崔行)

모연대장 최수길(崔壽吉), 김정(金貞), 김택(金澤), 현갑(玄甲)

총재부장(總載部長) 현천묵

비서국장 김성(金星)

비서 윤창현(尹昌鉉), 이정(李偵)

인사국장 정신(鄭信)

군법국장 김사직(金思稷)

군법국 이사(理事) 남진호(南鎭浩)

군법국원 이재홍(李載弘)

응접과장 김혁(金赫)

교섭원 허중권(許中權)

경비대장 허활(許活), 이교성(李敎性)

참모부장(參謨部長) 이장녕(李章寧)

참모부장(參謨副長) 나중소(羅仲昭)

참모 정인석(鄭寅晳)

군사정찰대장 허중권

사령관 김좌진(金佐鎭)

부관 박두희(朴斗熙)

기계국장(機誡局長) 양현(梁鉉)

보관과장 서청(徐靑)

수리과장 임기호(林起虎)

경리국장 최익항(崔益恒)

군수과장 채오(蔡五)

회계과장 김준(金俊)

영선과장 이범래(李範來)

 

이 중앙조직은 모든 반일적 군사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편성되어 5개 부서로 구성되었다. 서무부는 3개국(局)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 경신국(警信局)은 경찰과·통신과 그리고 각 지방 39개 분국으로 구성되었으며 일본 경찰과 군대에 대한 정보수집을 주 임무로 하였다. 징모국(徵募局)은 단원모집과 사관연성소 생도모집을 담당하고, 간사국은 각종 인쇄물과 사관연성소의 교재 편찬·인쇄를 담당했다. 재무부는 탁지국과 모연국의 2개국으로 구성되어 재정을 담당했는데, 모연국은 군자금 모집을 임무로 하였다. 총재부는 비서국·인사국·군법국의 3개국과 북로군정서 군사기지의 외곽을 경비하는 경비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군사조직으로는 참모부와 사령부를 두었는데, 모든 군사활동은 사령부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김좌진 장군이 책임을 맡은 사령부는 기계국과 경리국 2개국을 두었는데, 기계국은 군사장비의 구입과 수리를 맡았다. 경리국에는 4개과(科)를 두어 군수과는 군수업무, 군량과는 식량조달, 회계과는 경리업무, 영선과는 사령부내의 각종 시설보수 관계를 담당하였다. 이들 부서는 사관연성소와 함께 서대파 십리평에 있었으므로, 북로군정서의 군사조직은 거의 사관연성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인쇄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짜임새 있는 조직을 배경으로 북로군정서는 대규모의 독립군을 양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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