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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되는 법 - 국가 보안법 변천사

고치자 |2006.12.04 18:41
조회 439 |추천 0

 

 

소설 태백산맥을 읽고 수많은 사람들을 억울하게 죽이는

국가보안법이라는게 대체 뭔지 궁금해서 알아봤습니다.

 

이 법이 2006년 아직까지도 폐지되지 않고 있고,

심지어 의회에서 제 1야당이 폐지 반대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정말 경악을 할수 밖에 없네요.

 

흔히 '빨갱이 새끼로 치부'되는 색깔 논쟁이 얼마나 말도 안되고

편협한 논리인지 깨닫고 있습니다.

 

뉴라이트 소동과 관련지어서 정말 꼴통 보수 세력들이

볼수록 가관이라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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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은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지 4개월도 안 된 1948년 12월 1일 공포. 시행되었다.

1948년 11월 발생한 여순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권의

남한의 좌익세력을 제거하려는 의도로 서둘러 제헌의회에서 제정한 것이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은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모체로 구성되었고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 반공, 반통일, 반민중적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 후 정권의 독재강화로 국가보안법은 확대, 강화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이 제정 공포되었다.

이어 1949년 12월 19일에는 1차 개정이, 1950년 4월 21일에는 2차개정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국가보안법의 제정과 개정은 '남조선노동당'을 비롯한

좌익세력의 제거를 그 목적으로 하였다.

 

미군정에 이어 1948년 8월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제주도 4.3사건이 일어났으며,

다시 이 사건을 진압하라는 출동명령을 받은 여수.순천지구 주둔 제 14연대와

그 인근 주민들에 의해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남로당과 그 외곽조직은 이를 주도하거나 적극 가담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신생정부는 내란행위자 내지는

남로당원을 단속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였다.

 

이것은 형법이 제정되기 5년 전이었다.

이 기간 동안 국가보안법의 적용에 관한 통계자료는 찾을 수 없다.

단편적으로 발견되는 자료들과 입법 목적에 비추어 그 윤곽을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국가 보안법이 개정되고 4개월 동안 국가보안법의 적용을 받은 사건수는 도합 551건이고 그

의 인원은 2189명이고 기소된 건수는 271건이고 그의 인원은 560명이고 불기소처분을 받은 건

수는 126건이고 인원은 1046명이다. 이 통계에 의하면 점차로 국가보안법 위반건수가 늘고 있

는 경향으로서 2월의 170건에 비하여 3월에는 그보다 21건이나 증가한 191건에 달하고 있는 것

이다. >>


<<이 법의 시행에 의해 반미, 반정부의 정치.언론활동, 개인적이고 우발적인 언동까지도 처벌받

게 되었다. '국제연합 조선위원단'의 보고에 의하면 이 국가보안법의 시행에 의해 1949년 한 해

동안만도 118,621인이 검거.투옥되고 같은 해 9∼10월에 132개 정당.사회단체가 해체되었다.>>

 

 

이승만정권은 국가보안법사건과 적용자수가 폭주함에 따라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법의 개정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개정 국가보안법은 수괴, 간부는 물론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까지

사형이 가능하도록 '법정최고형을 상향조정'하고 그 적용범위를 확대하였다.(제1조)

 

또 제정 국가보안법은 특별히 심급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일반 형사소송법에 따른 3심제가 보장되고 있었다.

 

그러나 개정 국가보안법은 이 법에 규정한 죄에 관한 사건의 심판은

단심으로 하고 지방법원 또는 지원의 합의부에서 행한다(제11조)고 하여

'3심제에서 단심제로' 축소하였다.

 

그리고 사상전향되었다고 판단하여 석방한 사람이 의무적으로 가입하던

'국민보도연맹'의 맹원수는 1950년 초반에 30만명이 넘었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후퇴하는 국군에 의해 사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

다.

 

(추정이 아니라 실제 한 마을 사람들이

전부 사살당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고 밝혀지고 있다

단지 군부에서 쉬쉬할 뿐이지....)

 

 

국가보안법은 일반 민중을 향해 '부역자'라는 딱지를 붙여 처벌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정적'들을 '공산당'으로 몰아 탄압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이승만은 1954년 4사5입 개헌으로 연임의 길을 열었으나 1956년 대선에서 진보당의 조봉암

후보가 선전하여 보수정권을 위협하였다. 이에 이승만정권은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리고 1958년 진보당사건이 발생하였다. 진보당의 조봉암, 박기출, 김달호, 윤길중 등 10여 명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검거되고, 조봉암은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으나 대법원에서 사형

이 확정되어 1959년 7월 31일 사형집행을 당했다. >>

 

 

한국전쟁 휴전후 남한에서는 친미반공이데올로기가 확고하게 정착된다.

사회전체가 반공이데올로기로 뒤덮여 있었으나

일반국민들은 전쟁에 대한 피해의식이 강하게 남았고

또한 보수세력이 지배적인 위치에서 사회의 모든 부분을 압도하고 있었으므로

그 폐해를 잘 인식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모든 '진보적인 것'은 '공산주의'와 동일시 되어

국가보안법의 적용대상이 되었으며

이에 대하여 어떠한 의구심도 제기되지 않았다.

 

이는 이승만 정권 이후 권력을 잡은 군부가

국가보안법을 국민 억압수단으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원인이기도 했다.

 


5.16군사쿠데타 직후에 쿠데타의 명분을 얻기 위하여 군부는

"5.16군사혁명 이전 또는 이후에 반국가적 반민족적 부정행위 또는 반혁명행위를 처벌한다"는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1961년 6월 22일 제정하였다.

 

이 법률 조항 가운데 제 6조 '특수반국가행위' 조항은

"국가보안법 제 1조에 규정된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된다는 정을 알면서

그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고무.동조하거나 또는 기타의 방법으로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사형·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되어있다.

 

이 조항을 통해 '특수반국가행위'죄가 국가보안법의 특별법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16군사 쿠테타에 의한 군정을 거치면서 1961년 7월 3일 반공법이,

같은 해 6월 10일에 중앙정보부법이 제정되었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은 3공의 전기간을 통해 꾸준하게 적용되었으며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억압하는 데 반공과 안보의 이데올로기가

가장 강력한 무기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의 적용 통계를 통해 우리는

군부 정권의 정치적 위기가 가중될수록 국가 보안법의 적용횟수가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80년대에는 민중의 의식화…조직화…이론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이전의 시기에는 국가보안법이 집중적으로 적용될 조직적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분산적 우발적으로 적용되고 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르러 반민주적 반민중적 반민족적 군부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조직적 실체가 확고한 의식과 이론적 뒷받침 위에 부각되고 있었기 때문에

정권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언제든지 국가보안법의 '먹이'는 준비되어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1980년부터 1987년까지의 5공화국 전기간 동안에 국가보안법으로 입건된

사건의 죄목별 통계를 보면, 찬양.고무죄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반국가단체 구성.가입죄는 정권성립기인 1981년과 정권의 최대 위기국면인

1986년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가 극히 억압받고 있음과 동시에

정권의 성립과 유지에 국가보안법 구속자가 희생양으로 이용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재판에 기소된 기소자는 1981년부터 1987년 사이에 총 1,512명으로 집계되었고

그가운데 13명이 사형, 28명이 무기징역 선고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여전히 국가보안법의 운용이 잔혹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집권한 제6공화국은 제5공화국의 시신을 딛고선 정권이다.

5공 붕괴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던 인권문제에 대한 확고한 개선이야말로

'5공청산'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었다.

 

인권의 개선을 이루는 데에는 5공의 악정을 가능케 하였던 악법의 철폐,

그 악법하에 생겨난 희생자들의 석방과 보상, 인권억압기구의 철폐,

그리고 인권의 유린에 가담하였던 수많은 수사기관, 재판기구의 담당자들에 대한 처벌등이 필수

적이었다.

그러나 구속된 양심수의 선별적 석방, 국회 내 '민주발전 법률개폐특별위원회'구성 등

인권개선의 시늉만 보였을 뿐 시간이 갈수록 인권문제는

제6공화국의 관심사가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국가보안법은 이와 같은 제6공화국 인권문제의 핵심이 되었다.

이미 인권 탄압의 상징으로 낙인찍힌 국가보안법은 6공초기에는 개폐의 논란 때문에 적용이 자

제되었지만,

1989년 4월 문익환 목사의 방북사건이후 이른바 공안정국 속에서 완전히 복권되었다.

 

국가보안법의 적용숫자는 5공보다 훨씬 증가하였고

구속근거법률 가운데에서도 그 비중이 높아졌다.

 

제6공화국하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자수는 양심수에게 적용된 다른 죄명에 비추어 볼 때

그 비율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이 무차별 적용됨으로써 수많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구속되었으며,

특히 노동자, 출판인, 화가, 교사 등이 상대적으로 더 심한 탄압을 받았다.

 

국가보안법의 적용조문별 숫자를 볼 때 이적표현물 제작.반포등과

찬양.고무.동조가 전체의 약80%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쓸데없이 구속을 위한 구속을 벌이고 있거나

조직사건을 만드는데 수사기관이 혈안이 되어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에 대한 수사기관과 재판부의 처리태도와 관행은 거의 달라짐 바 없다.

수사기관에서의 가혹행위는 여러 가지 형태로 잔존하였으며,

안기부의 수사주도권도 계속 유지되었다.

사법부의 국가보안법에 관한 구속영장 기각률과 무죄비율은 지극히 저조하였다.

 

 


소위 문민정부출범후 상반기에는 이전에 비하여 국가보안법의 적용으로

인신을 구속하는 사례가 줄어드는 양상을 띠었다.

 

그러나 하반기부터 공안당국에 의한 인신구속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는 바

점차 과거 군사정권의 행태와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을 띠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하여는 문민정부 발족 이후 상대적으로 입지가 축소된

공안당국의 자리보전을 위한 남용의 경향마저 띠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 컴퓨터 통신에 대한 탄압

1993. 11. 18. 대검 공안부는 데이콤의 컴퓨터 통신망 '천리안'에 게재된 '현대철학동호회'의 일

부 게시물이 국가보안법상의 이적표현물에 해당한다며 수사를 게시한다고 발표하였고, 이후 서

울경찰청은 12. 8. 위 동호회 회장 김형렬씨를 구속하였다. (현재 원심 결과인 유제 판결이 파기

되고 무죄가 선고되었다.)

▶ 출판사 탄압

1994년 한 해동안 출판사 탄압이 부쩍 늘었다. 구속된 출판인 수가 1991 - 3명, 1992 - 1명,

1993 - 3명이었던 것이 1994년에는 8월까지 도합 8명이 구속되었다.(경찰청, 94국감자료) 이상

의 책들은 대부분 3∼7년전에 출간된 책들로서 이전 군사정권하에서도 구속에 이르는 문제로까

지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소위 문민정부하에서 새삼스레 문제삼은 것이다. 이와 같이 출판

인들을 구속하면서 당국이 내세운 근거는 군사정권시절인 1989년에 작성된 '대검분석 이적도서

목록'이었다는 점에서도 얼마나 시대에 뒤떨어진 법적용인가를 보여준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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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줄 요약>

 

1. 국가보안법은 태생 자체가 일제시대 치안유지법을 모태로 만들어진 말도 안되는 법이다.

 

2.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까지 국가 보안법은 정적 제거용, 국민 탄압용으로 유

용하게 이용되었다.

 

3. 2006년까지 한나라당의 반대로 인해 국가 보안법은 폐지되지 않고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법이 폐지가 되면 이 법을 등에 업고 했던 수많은 파렴치한 짓들이 들통날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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