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雪化)
28 쫓아오는 그림자
부여와 가우리가 모두 안정을 되찾고 평화로운 시기가 찾아왔다.
계루부 족장의 집은 꼬박 이틀째 소리없이 분주했고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안주인인 사와가 예정보다 두달이나 일찍 산기가 왔기 때문이다.
첫 출산인데다 평소 몸이 약하던 사와는 꼬박 하룻밤을 진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결도 방안에 앉아 꼼짝않고 날을 지샜다.
산파가 한 말이 내내 결을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들었다.
‘고비입니다. 마님도 아기도 위험해요. 둘 중 하나만 살아도 다행일지도...
어쨌든 맘을 단단히 먹으세요.’
결은 사와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사와는 좋은 여자다. 좋은 안주인이자 좋은 부인이고,
아이를 낳으면 좋은 어머니가 될것이다.
사와가 자신에게 조금도 부족한 여인이 아니란걸 알면서도
한 번도 사와를 진심으로 대한적이 없다...
신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와를 택했다고 생각해왔던 결은, 문득 깨달았다.
사와는...?
사와 역시 자신이 원했던 혼인은 아니지 않은가...
하나만 살리라고 한다면... 결은 사와를 택해야 했다.
그녀는 행복을 누릴 충분한 자격이 있다. 그 기회를 가져야만 한다...
내가 줄 것은 비록 정성밖에 없지만... 노력하리다...
결은 어느새 그렇게 빌고 있었다.
“족장님! 족장님!”
계집종이 급하게 결을 불렀다.
결은 방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혹시 무슨 안좋은 일이라도...?
“해... 해산 하셨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결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부인은...?”
계집종은 급히 뛰어오느라 숨이 가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결은 재차 다그쳤다.
“부인은 어떻느냐!”
“무... 무사하십니다. 예쁜 여자 아기씨를 낳으셨구요~”
“......”
잠시 결은 멍해졌다.
사와가 무사하고... 아이도 무사하다...?
“아... 알았다. 나도 곧 건너가마.”
“예에~!”
결은 사와가 있는 방에 쉽사리 들어가지 못하고 조금 서성였다.
왠지 두렵고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아기를 처음 대면한 순간... 무언가 뜨거운 것이 목을 가득 채웠다.
사와는... 결의 표정을 보는것만으로 아픔과 고통을 모두 잊었다.
그것은, 지나간 세월을 한꺼번에 보상해줄만큼 크나 큰 행복이었다.
담은 떠날 차비를 했다.
휘가 담이와 지내라고 보내준 아옥이 역시 짐을 꾸리고 있었다.
“아가씨, 그 먼길까지 가서 꼭 봐야 할 사람이란 대체 누구랍니까요?”
“으응... 있어... 은인...”
“은인이라구요? 어휴... 길이 멀다고 투덜대지도 못하겠네...”
“훗... 급한길은 아니니 천천히 가자꾸나.”
“급하지 않긴요! 옥저땅을 벗어나면 또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데...”
“......”
남장을 한 담이와 아옥이는 말을 타고 산 아래 마을로 내려왔다.
오랫동안 길을 떠나려면 필요한 물품이 있었기 때문에 마을에서 구하기로 한 것이다.
담이는 휘가 보내주는 세포(*細布:모시와 같이 가는 천으로 화폐역할도 했다)는
쌓아두고 주로 사냥을 해서 물건을 통용했다.
때문에 마을에서 담이를 알아보는 이들도 생겼지만, 담이가 여자라고
생각하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사냥한 짐승의 가죽을 곡식과 바꾸고 마을을 떠날즈음이었다.
말을 매어둔 곳으로 걸어가던 담이는 한 무리의 사내들과 살짝 스쳐갔다.
담은 마침 아옥이와 이야기를 하느라 이들을 보지 못했지만,
사내들중 한명의 시선은 담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눈빛은 사뭇 날카로웠다.
갑자기 우뚝 멈춘 그는 무리들 중 한 명의 사내에게 조용히 지시를 내렸다.
“저 자의 뒤를 밟아라. 눈치채지 못하게.”
“예...!”
그리고 나서 무어라고 몇가지 더 지시를 하자, 명을 받은 사내가 자리를 떴다.
이윽고 명령을 내린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부여의 둘째왕자... 무연이었다.
담이의 무공도 녹슬어 버린걸까.
순노부에 도착할때까지도 담이는 수상한 그림자가 따라붙은 것을 알지 못했다.
허나... 알고 미리 경계하지 않았다면 어느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었다.
담이의 뒤를 밟는 자는 조금 더 자란 바이였던 것이다.
“아이고오... 아가씨, 아직도 멀었습니까?”
“이제 거의 다 왔어.”
“아니, 이런 깊은 산속에 사람이 살기는 한답니까? 혹시 도인이라도 계신건가요?”
“어찌보면... 도인이라고 할 수도 있지.”
“정말 도인이시라면, 우리 인생은 언제나 풀리나~ 그거나 여쭤보세요~”
담이가 찾아온 곳은 강술아비의 산장... 비조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다.
“갑자기 왠일이십니까? 기일도 아닌데...”
“이제 곧 추워질테니 미리 왔어요. 아무래도 다음해에는 못 오지 싶어요...”
“흐음... 그렇군요. 어쨌든 잘 오셨어요. 내가 얼른 방을 치울테니 다녀오세요.”
담은 아옥이에게 부엌일을 시키고 홀로 비조의 무덤을 찾았다.
강술아비가 부지런한 덕에 비조의 무덤주변은 깨끗하게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담이는 무덤 옆에 앉아 그동안의 일을 돌이키며 눈을 지긋이 감았다.
휘의 얼굴도, 결의 얼굴도 가물가물했다.
휘는 담이의 행방을 감추고 행방을 쫓는자들을 교란했고,
자신 역시도 담이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매달 도착하는 세포로 서로의 안부를 아는 것이 전부였다.
그만큼 휘가 담이를 지키려는 노력은 철저했다.
“비조... 어쩌면 여기 오는게 마지막일지도 몰라요. 멀리...
아주 멀리 떠날 생각이거든요. 너무 까마득히 멀어서 어쩌면 난
돌아오는 길을 잊을지 몰라요. 내가 오지 않아도, 섭섭해 하지 않을거죠?”
갑자기 담은 몸을 옆으로 날렸다.
뒤에서 덮치는 자의 움직임을 느낀것이다.
하지만 몸이 둔해진 담이는 날아온 검을 미처 다 피하지 못하고 어깨에 상처를 입었다.
날쌘 몸놀림으로 괴한이 나무에서 내려왔다.
“저런 저런... 내가 시시할 정도로 몸놀림이 둔해졌네...”
“누구냣!”
괴한이 복면을 벗자 웃는 얼굴이 드러났다.
“너는...!”
“오랜만이에요, 담이 아가씨.”
바이는 날 어떻게 찾았으며, 왜 찾은걸까... 바이가 추적했다는 것은 그 뒤에
무연왕자가 있다는 뜻이다. 이번엔 또 어떤 계략을 꾸민것일까.
“날... 어떻게 찾은거지? 아니, 그보다 왜 찾은거지?”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왕자를 어떻게 찾은거죠?”
“왕자를 찾다니...?”
바이가 손에 깍지를 틀며 몸을 풀었다.
“뭐, 어떻게 서로를 찾았는지 그런 사소한것에 신경쓸 시간 없어요.
빨리 일을 끝내고 돌아가야 해요.”
일을 끝내다니...?
바이가 칼을 빼들었다.
“너...! 날 죽일셈이야? 대체 왜...?”
“발뺌하면 순순히 물러갈거라고 착각하고 있는건 아니죠?
어쨌든 당신을 죽이는건 내키지 않아요. 오래전에 죽인 자의 자식까지 죽여야 하다니...
누가 그런걸 좋아하겠어요.”
갑자기 담이의 눈에서 불이 번쩍 났다.
“뭐...어?”
섬광처럼 강술아비의 말이 스쳤다.
‘아버지를 죽인 상처는 급소를 정확히 노린것이었습니다.
변변찮은 솜씨가 아니었습니다.’
담이가 일어났다. 얼굴은 무표정 했지만 두 눈만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너였구나...”
담이도 칼을 빼들었다.
돌변한 담이의 태도에 바이는 흠칫 놀란 듯 했다.
곧 바이도 자세를 잡았다.
“그땐 빌어먹을 달나미들 때문에 놓쳤지만 오늘은 당신 아니면 나,
둘 중 하나가 죽는거에요.”
담이가 씨익 웃었다.
“좋을대로.”
이윽고 칼과 칼이 맞부딪치기 시작했다.
몸이 무뎌진 담이는 수세에 몰렸다.
바이를 도저히 당해내지 못할것처럼 오로지 피하고 막는것에만 급급하고 있었다.
담이의 실력을 몸으로 느끼고 있는 바이는 갈수록 맹렬하고 과감한 공격을 시도했다.
몇차례나 겨우 바이의 칼끝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던 담이가 잠시 숨을 고르며
우뚝 멈췄고, 바이 역시 멈췄다.
“그것 참... 내가 전에 보던 아가씨가 아닌데요... 이 정도로 숨이 차오다니...
대체 얼마나 게을러진거에요?”
담이가 고개를 들며 씩 웃었다.
“그럼 이제 부지런한 네가 막아라.”
“네...??”
담이의 칼이 날카롭게 바이를 파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로 조금전까지만 해도 뚱뚱한 아낙 같았던 담이가 이젠 자유자재로
칼을 휘두르며 그 유연함이 실로 놀라웠다.
아뿔사...! 일부러 맞붙어 싸우지 않고 방어만 했던 것이구나...
담이는 타고난 무사임이 틀림없었다. 예전감각이 잠깐 동안에
구석구석 모두 살아난 것이다.
밀고 당기며 어느 한 쪽, 한 치의 빈틈도 없는 결투가 벌어졌다.
둘 다 온 힘을 쏟아부어 싸운지도 한참이 흘렀다.
아버지의 얼굴이 담의 머릿속를 가득 채우는 그 순간...
담의 칼은 바이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바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과 담이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푹 쓰러졌다.
담이는 바이를 잠시 내려보다 몸을 돌렸다.
힘겨운 결투를 끝낸 담이가 잠시 방심한 순간이었다.
죽어가는 바이의 눈에, 처음 담이에게 날렸던 단검이 뜨인것이다.
무연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담이의 등에 칼을 날렸다.
등에 칼을 맞은 순간, 담이는 갑작스런 고통으로 몸이 활처럼 휘었다.
바닥을 몇차례 구른 담이는 정신이 깨어있음에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미 바이와의 결투에 마지막 힘까지 다 쏟은 후였다.
서서히 정신이 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