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눈물이 마를새가 없다.
사랑이란 이렇게 눈물 콧물 다 찍는건가?
도무지 사람이 기억이란 왜 이럴때만 선명하게 나는건지...
자판을 두드리던 명우의 눈가가 촉촉하다.
"제길... "
낮게 웅얼거리며 페파민트 한잔을 잔에 따라 입가에 가져간다.
입안 가득 페파민트의 향이 느껴진다.
지금 명우는 은수에게 보낼 메일을 쓰고 있던 참이었다.
'은수야 결혼 축하해'
여기까지 치고 나선 명우는 그만 울컥해 버린 것이다.
지난 삼년간의 기억이 치고 올라서 더 이상 은수를 축하해 줄 기분은 나지 않았다.
어젯밤 오랜만에 연락온 대학동창에게 은수의 결혼소식을 들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동창모임에서 다시만난 은수는 명우와 곧 연인으로 발전했다.
삼년간 그렇게 긴 시간을 함께 했겄만
어느날 은수는 일방적인 이별을 통보했다.
"너하고는 안 맞는거 같아."
명우는 도무지 받아 들일수가 없었다.
"뭐가 안맞다는 거지...?"
"모든게 너와 맞지 않는거 같아..."
막연한 은수의 대답에 기가 막힌건 명우였다.
"이런 나를 사랑한거 아냐? 뭐가 맞지 않는다는 거야?"
"난 빨리 결혼해서 안정을 찾고 싶어... 너에게 결혼 이야기를 수십번 꺼냈지만..
넌 항상 이런 저런 이유로 비켜가잖아. 지친다."
명우는 아찔했다.
"결혼? 너에게 이야기했잖아.. 내가 방송국에 들어가고, 조금 안정되면..."
"됐어...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항상 같은 자리잖아."
"너야 직장도 가지고 지금 니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지만, 난 결혼하면 힘들어. 어렵다고...'
"그래. 결국 그말이잖아. 그래서 너와 난 결혼이 힘들어. 난 안정을 찾고 싶고,
넌 네 일이 하고 싶은거고... 난 기다리기 지쳤어"
"은수야... 너 너무한거 아냐? 결혼이 너 혼자 안정을 찾기 위한 것만이 아니잖아.
왜 내 생각은 하지 않는거야?"
"그만하자. 이제 됐다고... 너와 이렇게 지리한 말싸움도 지쳤고...
나 역시 맨날 집에서 결혼 이야기 안듣는것도 아니고, 나도 지쳤어.
그냥 우리 여기서 그만 헤어지자"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그래... 은수 니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러자."
명우는 그냥 지금은 피하는게, 잠시 덮어두는게 은수를 달래는 길이라 생각했다.
은수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온 명우는 그저 갑갑하고 답답한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몇달이 흘렀다.
간간히 연락을 안한것도 아니고 그저 안부를 묻고 전화를 끊고...
대학동창으로 부터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이야?"
"뭐?"
"너 은수랑 결혼하는거 아니었어?"
"무슨 이야기야?"
"은수 시월 오일에 결혼한다는데..."
그 이후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눈을 뜨니 병원이었다.
"명우야 정신이 드니?"
엄마의 걱정스런 목소리였다.
아무것도 더 이상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약속을 잡고 은수를 만났다.
"집에서도 그렇고.... 나 역시 널 기다릴 여유가 없더라.."
명우는 더 이상 말 하기가 싫었다.
자신을 기다릴 여유가 없더라는 은수앞에...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알았어. 그동안 고마웠어. 은수야... 예전에는 널 사랑했지만 지금은 아니네. 행복해라"
그냥 뱉듯이 이야기하고 명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서버렸다.
그렇게 그녀의 삼년 사랑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그래 잊자.."
'오늘 방송이 있는 날이지.."
식어버린 페퍼민트를 단숨에 들이키고 곧바로 방송국으로 나섰다.
'빵빵~'
"야~ 거기 비켜.."
길을 걷던 명우는 갑자기 나는 소리에 움찔놀라 돌아섰다
'뭐야...?'
"어이...거기 아줌마 뭔생각을 하는거야? 그리고 가려면 여자가 길 가장자리로나 갈 것이지."
순간 명우는 기가 막혀 할말을 잃어 버렸다.
"앞으로 잘 비키고 다니라고... 후후"
하얀 오픈카가 그녀의 옆을 휙 지나쳐 내달렸다.
"야...야아..."
뒷꽁무니가 사라지는 차를 향해 명우는 고함지르기 시작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다음말이 연결되지 않았다.
'에이~ 그래...그냥 똥 밟은 셈 치자... 오늘 재수 되게 없네'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복잡한데...
일단 오늘의 방송만...
그래 방송만 생각하자.
명우는 좀전의 기분 나쁜 자식은 잊어버리자 맘먹고 서둘러 방송국으로 향했다.
방송국 도착하고서는 명우는 정신 차릴 틈이 없었다.
"아이씨~ 작가는 오늘 왜 펑크인거야"
방송국 도착하자마자 통보를 받은 내용이다.
'대본을 가지고 오다가 사고가 나?
그러면 대본만 보내면 되지...뭐가 문제야?
사고난 지점이 한강근처라나...
뭐... 종이가 날라가?'
아무래도 믿을수가 없다.
'다른데로 샌거 아냐?'
명우는 작가에 대해 화가 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오늘 풀리는 일이 없다.
"그래~ 다 그놈 때문이야..."
명우는 이제 방송을 시작하고 일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시점이었다.
낮에 만난 그 재수 없는 놈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키고서야
분이 풀린 명우는 일단 지난 방송대본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기본 루트대로 만들려면 일단 틀이 있어야 하니...'
"음... 일단 오프닝 멘트도 만들어야 겠고..."
조금씩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아~ 도대체 어떻게 적어야 하냐고...'
앞으로 남은 시간은 2시간..
"가만있자. 오늘이 무슨 날이지? 4월 14일네... 4월 14일....4월 14일
오늘은 쵸컬릿과 사탕을 못 받은 솔로들이 짜장면을 먹는 날이라 그랬지?
좀더 심오하게... 음...그래 그거다.
사랑에 아파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다루면 되겠다"
명우는 자기 머리속에 떠오른 순간적인 아이디어가 무척이나 대견했다.
"일단 오프닝 멘트는... 그래 이걸로 하고,1부는 사연이 있는 음악,
그럴려면 게시판을 뒤져서 그런 사연을 찾아야 겠지. 그리고 노래 띄우고...
음...2부는 그래 보낼수 없는 편지...너무 쳐진다고 뭐라 그러는거 아니야?
고민인데...그럼 3부는 미래의 연인에게... 그래 3부에서 활기차게 올라가는거야.
미래의 연인에게 하고 싶은 지금의 이야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명우는 잊을세라 재빨리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부지런히 게시판을 뒤지고 엽서를 챙기고 나서야 방송을 시작할 수 있었다.
"3..2..1..Q"
"그대를 잊기 위해 진탕 술을 마신적이 있습니다.
갖고 있는 기억을 지우기 위해
알콜의 힘을 빌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왠걸요...
술한잔씩 들어갈때마다 그대에 대한 기억이 더 선명해 집니다.
그렇게 선명해지는 기억때문에
이젠 그대를 더 기억하고 싶어
자꾸만 술잔을 들이킵니다.
술한잔에 그대가 더 보고파 지는 날입니다."
"안녕하세요. 기억으로 남는 그리움에 유명우입니다. 왜이리 슬픈 시로 첫 멘트를 날리냐구요?
오늘은 4월 14일 사랑하는 짝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맞는 4월의 기념일입니다.
외사랑일수도, 가슴아픈 이별일 수도 있고, 아직 막연하게 기다리는 아름다운 사랑일수도 있습니다.
오늘 기억으로 남는 그리움에서는 속칭 자장면을 먹는다는 장난스런 분위기를 접고
프로그램의 이름처럼 기억될수 있는 그리움이란 주제를 여러분께 드리려고 합니다.
1부는 사연이 있는 노래, 2부는 보낼수 없는 편지, 3부는 미래의 연인에게 라는 주제로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인터넷과 팩스로 여러분의 기억하고 싶은 그리움을 보내 주십시오.
오늘 진한 추억을 안고 기억으로 남는 그리움 문을 엽니다."
'그대 보내고 아주 가는 새와 작별하듯이...'
김광석의 노래가 흐르기 시작했다.
휴우~ 드디어 시작이네..
일년동안 라디오 방송을 한 명우 였지만 이번처럼 소위 자작극은 첨이었다.
'두시간을 방송을 현재 진행형으로 해야 한단 말이지..'
이전에 이리저리 흘려 적었던 다이어리의 글들을 뒤적이며 명우는 계속적인 스크랩이다.
팩스는 계속 쏟아져서 들어오고 인터넷도 계속적으로 올라온다.
'참 할말 많았나 보네...'
실연당한 이야기부터 짝사랑 이야기 그리고 아직도 그리워하는 이야기등등 사람들은
컴퓨터와 팩스기를 통해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많은 이야기를 방송했다.
명우는 은수를 잠시 기억했다.
'훗~~나도 자장면을 먹었어야 됐나?'
"네. 정말 많은 이야기가 올라오네요. 역시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없는 동물인가봐요?
이렇게 많은 외로움 많은 그리움이 올라오니 말이에요.
1부 시간도 얼마남지 않았네요. 다음 2부에서는 여러분의 맘속에 간직한 차마 보낼 수 없는
편지를 기억속의 그리움로 보내주세요. 잠시후 광고 듣고 2부에서는 조금 더 여러분께
맘속 깊이 다가갑니다."
광고가 흐르고, 창밖에서는 ok싸인을 보내고 있다.
페퍼민트 한모금을 들이키고 추억에 빠질새도 없이 다음 준비에 바빠졌다.
"2부 문을 엽니다. 편지라면 여러가지가 있죠? 박신양 최진실 주연의 슬픈 편지도 있고,
유재하의 눈물젖은 편지도 있고, 고 김광석의 아련한 이등병의 편지도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가슴 서랍에는 어떤 편지가 접혀있으세요? 가장 아래에 있는 가장 아련한
편지를 날려 주세요."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 잘 지내고 있나요?
지금은 행복하게 잘 살고 있겠죠.
내가 그토록 당신 마음을 아프게 했었는데...
시간은 잔인하게 기억에서 당신을 밀어 냅니다.
언제부터인지 그 기억을 붙잡고 있는 내 손이 흐려져
기억끝에 당신이 있었다는 아련한 흔적만 전해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눈물이 파도처럼 당신을 밀어내면서
씻겨져 정돈되는 모래처럼
내 마음속은 당신을 잊어갑니다.
이제는 기억도 희미해져
나에게 주었던 그 따뜻했던 목소리,손길이 기억나질 않습니다.
붙잡고 싶었습니다.
비디오를 돌리듯이 언제까지나 뒤돌려서
당신을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잘 지내고 있나요?
나역시 당신의 기억에서 옅어져 가고 있겠죠.
다해주지 못했던
아쉬웠던 사랑이 정말 기억나는 날입니다.
잘지내세요. "
"양천구 목동에서 이 진하님이 보내주신 편지입니다.
다른 어떤 절절한 편지보다 이 편지가 제 맘에 와 닿는 이유가 뭘까요?
내가 어떻게 해서 미안하다. 너 때문에 아프다는 이 말보다
단어 하나 하나가 가슴에 새겨지네요.
비디오를 돌리듯 당신과의 사랑을 다시 돌리고 싶다는 그 말,
눈물에 씻긴 모래처럼 잊혀진다는 그 말
다해주지 못했던 사랑이 기억난다는 그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네요."
"어떠세요? 세상에는 나만 슬픈 기억을 가지고 있는게 아니죠?
사람들은 때론 자기 혼자만의 착각에 빠지죠. 제일,가장,매우 이런 단어를 써가면서요.
내 사랑이 제일 힘들고, 가장 아프며, 매우 슬프다고 말이죠.
하지만 오늘 다른 분의 이야기 어떠세요?
다른 이의 사랑도 제일 슬프고, 매우 힘들고, 가장 슬퍼보이시죠.
힘 내세요. 아픈 가슴이 있는 사람일수록 강한 가슴을 갖게 됩니다.
저 역시 그랬으니까요."
"이진하님께는 기억으로 남는 그리움에서 작은 초청장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바로 다음 공개방송 초대권을 보내드리려구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멋진 분이신지 한번 이야기를 나눠보죠.
좋은 글을 보내주신 이진하님께 감사드립니다."
"네..다음 3부에서는 방송해드린대로 미래의 연인에게라는 주제입니다.
다짐도 좋고, 고백도 좋고, 절규도 좋습니다. 후후~ 넘 잔인한가요?
활력을 담아 미래의 연인에게로 향할 큐피트의 화살을 쏘아보겠습니다.
광고듣고 잠시후 뵙겠습니다."
좀 전 이진하라는 사람이 보낸 차분한 그 편지를 읽으며
조금씩 명우의 기분도 좋아지기 시작했다.
왠지 자신에게 보낸 것 같은 착각에 빠지며
모든것을 다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