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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 안개꽃의 외출, 제8편

은하철도 |2004.06.30 19:07
조회 189 |추천 0

8.


혹독한 여름날의 고열에 시달린 지도 어언 몇 달이 지났다.  돌이엄마는 초가을로 접어드는 9월의 오후에 핑크빛 언더웨어에 연한 회색 투피스를 입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립스틱이 너무 짙은 것 같았다.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가 어깨까지 내려오는 웨이브파마머리를 아래로 쓰다듬어 내렸다.  대모험이 세 번째 시집을 출판하고 오늘 저녁 여섯 시에 팬사인회를 한다는 것이었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대모험을 직접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남의 눈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모험에게 착착 달라붙는 꼬꼬맹추라는 여자도 보고 싶었다.  돌이엄마의 정신적인 힘과 심미적인 감각은 몇 달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높은 단계에 올라서 있었다.  지글지글 끓는 자기만의 감정에 녹아들고 매일 머리를 두드리는 자기 연민의 쇠망치에 정제되고 단단해진 돌이엄마의 정신은 흰빛을 발하는 칼날처럼 예리했다. 바람만 스쳐도 천리 밖의 꽃향기를 맡을 수 있는 심미적 감각은 사냥개의 예민한 후각과 같았다. 


고열의 시간동안 카페에 올린 수십 편의 시는 회원들에게 대단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예측을 불허하는 소재로 때로는 심연의 고통을, 때로는 창공을 훨훨 날아다니며 자유자재로 변신을 계속하는 돌이엄마의 시는 형형색색으로 사랑을 표현했다. 점점 카페회원 중에서 돌이엄마의 팬이 생기기 시작할 즈음에 올린 파격적인 제목의 시는 아랍전사의 폭탄테러 같은 위력으로 카페를 강타했다. 


* 섹스 *


살이 녹고 뼈가 으스러지는 광란의 밤에

너울너울 날아든 나비 한 마리

애무해 주세요.

가까이도 멀리도 아닌,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와 은밀함으로

애무해 주세요.


나는 거미줄에 걸린 나비 한 마리


봄은 당신의 거친 숨결을 타고 오는군요.

내 몸 구석구석 더듬는 당신의 손길마다

피어나는 목련꽃, 개나리, 진달래,

그리고 어둠을 뒤덮는 환한 벚꽃의 휘날림


아,

평생에 단 한 번이라도,

이런 섹스를 만난다면

죽음 넘나드는 절정의 비명으로

사랑을 고백하겠습니다.



중년의 가정주부로서는 대단한 용기를 보인 글이었다.  같은 또래의 여자회원들은 환호했다.  교향곡이나 대모험 같은 기성시인은 침묵했다.  직선적이고 불꽃이 팍팍 튀는 듯한 돌이엄마의 시는 소극적이며 먼 산만 바라보고 읊는 듯한 기존의 모든 시풍을 확 뒤집어버렸다.  그리움을 말하느니 차라리 돌진하다가 죽는 길을 택하고, 실연의 아픔을 노래하느니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치열함을 보인 돌이엄마의 시는 중년여성의 가슴을 후련하게 뚫어주었다.  노골적인 꼬리글이 마구 달렸다.

"아, 정말 저도 그런 섹스를 나누고 싶어요."

"맞아요. 평생에 한번을 하더라도 제대로 해야지.  아휴~ 가슴 떨려."

"안개꽃님~ 저도 그런 분위기 있는 곳으로 데려가 주세요."

"우리의 우상인 안개꽃님 파이팅~ 나도 샤워를 하고 나서 봐? 호호호,"


종각역에서 내린 돌이엄마는 또박또박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걸어 올랐다.  국내에서 제일 큰 서점에서 하는 대모험의 팬사인회에 참석하는 길이었다.  엷은 가을빛이 가로수에 깃들고 사람들은 바글바글 그 아래를 분주히 오갔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 쉰 돌이엄마는 뛰는 가슴을 억제하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꿈에도 잊지 못하던 대모험을 먼발치에서라도 한번 보고 싶었다.  큰 빌딩 지하로 통하는 계단에 선 돌이엄마는 다시 한번 하늘을 바라보며 서성거렸다.  문득 대모험이나 카페의 모든 회원들이 자기의 얼굴을 모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모른 척 하면서 대모험의 시집을 한 권 사가지고 그의 사인을 직접 받아도 될 것이다.  씩 하고 돌이엄마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


또박또박 서점으로 통하는 계단을 걸어 내려가다가 중간에서 딱 멈추어 섰다. 서점 입구에 책상이 놓여져 있었고 책상 뒤에는 김00 시인의 팬사인회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서 굽실굽실 인사를 하며 사인을 하는 중년남자,

바로 꿈에 그리던 대모험이었다.

먼발치로 빙 돌며 대모험을 세심히 관찰했다.  적당한 키에 마른 듯한 몸매, 그리고 희끗희끗한 머리칼, 겁이 많은 듯한 큰 눈과 훤한 이마,  마치 섬소년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인상이었다.  한참 대모험을 관찰하던 돌이엄마의 눈에 삼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보였다.  분주히 대모험의 주위를 착착 감아 돌며 잔일을 거들어주는 그 여자는 생글생글 거리는 얼굴로 카페의 회원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렴풋이 들리는 그 여자를 부르는 소리...... 바로 꼬꼬맹추였다.


돌이엄마는 다른 코너에서 책을 고르는 척 하면서 팬사인회 장면을 주시하다가 서서히 발길을 그곳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한걸음마다  숨이 한번씩 꼴깍 넘어가는 기분이었다.  또박또박 걷던 걸음이 대모험 앞에 딱 멈추었다.  미소를 띈 대모험의 시선이 돌이엄마의 얼굴에 꽂혔다.  대모험의 시선을 살짝 비끼며 돌이엄마는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평소에 시인님의 글을 즐겨보는 팬입니다."

대모험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느낌이 감싸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비껴가는 돌이엄마의 시선과 마주친 순간 대모험의 눈빛이 약간 흔들리는 듯 했다.  가을바람이 살짝 스친 기분이었다. 

"호호, 김시인님의 팬이세요?  반갑습니다. 여기에 시집이 있어요."

옆에 서 있던 꼬꼬맹추가 책상 아래에 쌓인 시집을 한 권 들어서 불쑥 돌이엄마에게 내밀었다.  돌이엄마는 꼬꼬맹추를 지긋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어머나, 김시인님의 사모님 되시는 모양이죠?"

하고는 곧바로 김시인을 향하여 또 말을 이었다.

"평소에 존경하는 김시인님인데, 역시 사모님도 참 예쁜 분이네요."

대모험과 꼬꼬맹추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꼬꼬맹추가 아니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에 연속적인 돌이엄마의 말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사모님, 김시인님 같은 분하고 사시니 얼마나 좋겠어요?  시인의 아내라는 말은 시인보다도 더욱 아름다운 이름이죠? 호호호,"

대모험은 더듬더듬 거리기만 했지 제대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말할 틈도 안주고 시인의 아내라고 내모는 돌이엄마 앞에서 꼬꼬맹추는 그만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사인을 받은 시집을 들고 서점은 나선 돌이엄마의 가슴에 허탈한 바람이 불었다.  몇 달간 그리던 사람을 앞에 두고 엉뚱한 말만 토했던 자신의 행동이 비겁하게 느껴졌다.  이단자가 되려면 확실하게 되어야 한다.  변신을 하려면 먼저의 모습이 몽땅 사라져야 한다.  어중간한 자리에서 양다리 걸치고 눈치만 보기는 싫었다.  중년의 가정주부가 꿈꾸는 이탈은 그렇게 간단하고 적당히 넘어갈 문제는 아니었다.  돌이엄마는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짜증나게 갑갑한 세상이군.  발길로 차서 확 부셔버리고 싶어."


집에 돌아온 돌이엄마는 새벽까지 장문의 시를 썼다.  중년여성의 총결산이라고 할만한 이 글은 카페에 올려졌고, 또 다시 모든 여자회원의 가슴을 강타했다.  여기저기서 퍼 날은 <중년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돌이엄마의 시는 인터넷사이트에 마구 돌아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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