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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귀거래사 79 / 하얀 등대가 보이는 솔밭에서

김명수 |2004.07.03 19:41
조회 256 |추천 0

하얀 등대가 보이는 솔밭에서



“얼른 이것 좀 마셔라. 소리공부 하는 사람 치고 이것  안 먹은 사람은 없다.

목 안의 열을 식혀 주는 데는 이것이 제일이다.”

어머니는 뒷간 똥통에 박아 두었던 왕대나무를 건져다가 맑은 물로 깨끗이 씻어 낸 다음 밑에 그릇을 받치고 칼로 반쪽을 쪼갠다.

시퍼런 대나무가 쪼개지는 순간 대나무 마디 안에서는 누르스름하면서도 맑은 똥물이 쏟아져 나온다.


자경이는 처음에는 이것을 마시지 못했다.

코에 닿는 순간 구린 냄새와 씁쓸한 맛에 금방 창자까지 토해 낼 것만 같았다.

어머니이자 스승인 무당어멈의 회초리가 무서워 손으로 코를 잡고 억지로 마시면 으레 헛구역질을 해 대곤 했다.

그러던 것이 목 안이 화롯불 담아 놓은 것처럼 뜨거워지자 이젠 자경이 혼자서 직접 찾아 마시게 되었다.


하얀 등대가 바라다 보이는 솔밭에서 나는 자경 누님의 옛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있다.

열네 살에 소리공부를 위해 팔리다 시피 남의 집 양녀로 간 자경 누님, 궂은일로 하루를 보내면서 짬짬이 장단을 익히고, 밤이면 소리로 목청을 갈아야 했다.


자경 누님은 꼽추다.

병명도 모른 채 몇 년 앓고 일어나니 꼽추가 되어 있더란다.

어릴 적 한이웃에 산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누님이 양녀로 간 집은 대대로 마을 굿을 하며 살아가는 먼 산골짝 당골네 집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비록 아이 입이지만 한 입 낸다는 것은 한 입 줄어든 만큼 가난도 덜어지기에 양녀란 그럴싸한 명목으로 자경누님을 일찍 당골네로 보낸 것이다.


자경이 어머니라 부르는 스승은 동네에서 굿을 하는 당골네였다.

무당 세습을 위해서는 어릴 적부터 배워야만 했다.

소리는 기본이고 굿 장단과 춤사위 까지, 그 훈련은 혹독했다.

자경누님 외에도 또 한 사람 배우고 있으니 자경누님보다 너 댓살 많은 청맹과니 곰보 아이였다.

곰보아이가 굿거리장단을 덩그렁 덩덩 때리면 자경이는 옆에 앉아 구음 소리를 메긴다.


꼽추 소녀와 곰보 아이의 목소리가 산골짜기에 울려 퍼지고 메아리 되어 되돌아오면 또 소리를 지르고 하루 이틀 삼년 오년 이렇게 세월 흘러가자 어느 듯 자경누님은 엄연한 당골무당이 되어 있었고 곰보 소년은 누님의 신랑이 되어있었다.

꼽추 소녀무당의 신통이 백리 안에 소문이 나고 자경누님과 청맹과니 곰보 신랑은 무당으로서의 명성도 높아져 갔다.

                        

              *       *       *       *       *       *       *


며칠 전 해거름에 나는 읍내 선창가에 있는 막걸리 집에 목이나 추기기 위해 들렸다.

누구나 가볍게 목을 적시기 위해 들리는 부담 없는 집인지라 항상 손님들이 많았다.

먼저 온 뱃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육두문자가 질퍽하게 선술집안을 휘젓고 있었다.


막걸리 한 통을 다 비울 무렵 낯선 꼽추 여자가 문을 밀며 들어서는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어릴 적 나를 곰살갑게도 보살펴 주었던 옆집 꼽추 누나, 바로 자경누님이었다.

세월이 흘러 그녀의 머리는 하얀 서리가 내려 있었고, 그녀의 자라다 만 키는 더 줄어 든 것 같았다.


새삼 어릴 적 생각이 나서 나는 나도 몰래 흠칫 했다.

아는 척을 해야 하나, 모른 척 하고 있어야 하나?

그 고민의 순간은 자경누님이 먼저 나를 알아보면서 내 부담을 들어 주었기에 자연스레 우리는 반가운 합석을 하여 술잔을 나누게 되었고 그녀의 지난 날 이야기를 나는 심금을 울리며 들어야 했다.


누님은 한 잔 전주가 있었다.

취기어린 그녀의 얼굴은 산전수전 겪은 술꾼의 모습이었다.

걸쭉한 입담에 보통 아닌 주량은 내 약한 술 실력이 그만 무색해지도록 대단한 주량이었다.


                 *       *       *       *       *       *



꼽추 무당과 곰보 신랑의 높아지는 명성만큼이나 살림도 제법 풍족해지고 무당의 이력도 어느새 쌓여갔다.

비록 무당이라 하지만 남부러울 것 없었다.

장애인이 된 후 천직으로 여긴 무당의 삶이 순탄하지는 못하다 하여도 두 부부의 삶이 그렇게 궁색하지는 않았다.

일은 바쁘지 않을 만큼 들어왔고 어느새 아이도 태어났다.


자경누님은 아이가 태어났을 때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혼이 나갈 지경이라 했다.

혹시나 눈먼 아이가 태어날까 봐서 가슴은 숯검정처럼 타들어갔노라 했다.

아이는 다행히 두 눈이 초롱초롱한 아이였다.

자경누님은 그것이 감격스러워 아이를 볼 때 마다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아빠 엄마를 닮지 않은, 남들과 똑 같은 이목구비를 가진 아이는 그들 부부에게는 성스러운 아이였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는 것과 비례해서 사회는 점점 당골네를 부르지 않았다.

모든 무속을 미신으로 터부시하는 사회의 분위기는  무속인을 보는 눈도 차츰 냉담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생활과 직결되기 시작했다.


--- 계속 ===


김 명 수

 

           
비가 오는 날은 하루가 참으로 느리게 갑니다.아무도 찾아오는이 없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습니다.창밖으로 내리는 빗줄기는 세상 천지를 빗금으로 긋고 있습니다.날아다니는 빗줄기 만큼이나 세상의 근심도 빗금을 긋고 있습니다.내리는 빗줄기 속에 마음을 적시고 있습니다.아름다운 꿈만 꾸다 일어난 평화로움이 빗줄기속에 젖어버립니다.빗줄기가 굵어질수록 마음은 축축하니 젖어갑니다.마음이 젖어갈수록 사랑을 갈구하는 염원은 깊어져 갑니다.무겁기만 하던 애욕의 덩어리가 빗줄기속에 녹아 나옵니다.그 많았던 애욕의 편린 한 장이 뜨거운 양철지붕위의 고양이처럼발길 놓을 곳 없어서 두려운 생각만 빨라집니다.내리는 빗줄기 바라보며 마음의 줄이나 바르고 분명하게 치고 흠벅 젖은 마음 향기로운 술 한 잔으로 말려볼까 합니다. 김 명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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