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동상이몽
“전하, 위험합니다. 아직 안전여부가 제대로 파악되지도 않았는데...
기다리고 계시면 저희들이 유진님을 찾아 모셔갈 것입니다.”
“시끄러워! 그 말을 한 지 벌써 며칠이 지났느냐? 무능한 것들.”
앙칼지게 쏘아붙이는 소녀의 말에 쩔쩔 매는 일단의 검은 양복 무리들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두 개로 동그랗게 만 머리에 붉은 차이나 칼라 원피스를 입은 여자애는
확실히 눈길을 끌 정도로 귀여웠다.
“위치추적기는 작동되고 있는 것이냐? 왜 아직도 아무런 소식이 없어?”
“유진님께서도 아마 교란기를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추적결과로는 이 근처가 맞으나 정확한 지점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대체 너희들은 할 줄 아는 것이 무엇이냐?
어렵다, 힘들다! 이따위 소리밖에 못 하는 입이라면 당장 다물어!”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빽빽 질러대는 소녀는 이제 겨우 열 살이나 되어 보일까.
그러나 명령하는 모습은 자연스럽고 익숙했다.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고 모두가 자신을 향해 고개 숙여야 한다고 믿는 전형적인 지배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라탄은 역사가 생긴 그 순간부터 왕정체제였다.
철저한 신분사회로 이루어진 행성에서
그녀는 시초부터 왕이었던 자의 피를 받고 태어난 왕녀였다.
그녀의 위에는 아버지인 라탄의 왕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왕위 계승권 1순위인 그녀에게는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조차도 고개를 숙여야 했다.
철저한 혈통주의로 왕비라는 신분이 없는 라탄에서는
왕의 아내건 후계자의 어머니건 그다지 큰 의미가 되지 못 했다.
라탄의 수행원들이 그녀의 막무가내인 말 한 마디에도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보며
지원나온 MIB요원들은 혀를 내둘렀다.
“조그만 게 성질 한번 끝내주네.”
“그러게 말이야. 에구, 저런 딸내미 생길까봐 두렵다.”
“근데 대체 누굴 찾는 거야?”
“그 왜, 있잖아. 전에 화성으로 귀환한 7왕자.”
“엑? 지구로 돌아 온 거야? 화성의 지도자가 될 거라던데. 지도자면 왕이잖아.”
“화성의 쿠데타를 진압한 그 왕자 말이지? 근데 찾아서 뭘 어쩌려고?”
“결혼한다잖아.”
“뭐? 나이가 몇인데...”
소근거리며 천천히 뒤를 따르는 MIB요원들과는 달리
라니는 폭발하기 일보 전이었다.
이 곳이 지구가 아니라 라탄이었다면 벌써 여러 번 행성을 들었다 놨겠지만
이 곳은 자신의 별이 아니었다.
제왕학을 교육받은 왕녀로서 그런 품위 없는 짓은 할 수 없었다가 정답이겠다.
아무튼 라니는 차가운 얼굴로 수행원들을 노려보다가 휙 뒤돌아섰다.
아이의 몸으로 두 시간을 넘게 걸었으니 이미 체력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좀 더 체계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일단 숙소로 돌아간다.”
창밖을 내다보며 라니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거리를 오가는 지구인들은 뭐가 그렇게 기쁜지 연신 웃고 있었다.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걷는 연인들,
어깨동무를 하고 때로는 주먹을 날리면서도 떠들며 같은 길을 가는 친구들,
걸음을 재촉하며 손에 든 케이크 상자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중년의 남자...
어느 것 하나 라탄에서는 보지 못한 광경들뿐이었다.
‘천박해. 감정을 저렇게 드러내서 표현하다니... ’
그러나 한껏 못마땅한 눈으로도 라니는 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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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진! 너 딱걸렸어!”
윤이 등장하자 두 남자의 얼굴이 동시에 새파래졌다.
차마 세진에게 대놓고 화를 내지 못 하는 유진은
이런저런 치사한 방법으로 세진을 괴롭히는 중이었다.
시킨 일이라 기억을 지운 것은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윤의 사랑을 받는 세진의 모습에 배알이 뒤틀린 유진이 그냥 곱게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기회만 있으면 트집을 잡는 유진에게 질린 세진은 나날이 말라갔다.
안 그래도 이상하다 생각하던 윤에게 현장을 들킨 유진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세진오빠가 너 온 후로 비쩍 말라가기에 왜 그런가 했더니...”
“내가 뭘?”
“시끄러워. 아직도 반성의 기미가 없군. 이리 안 와?”
놀이인지 시비인지 모를 싸움을 벌이느라
온 집안에 먼지를 일으키며 뛰어다니는 윤과 유진의 뒤에서 세진이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제발 나가서 하란 말입니다... 청소기를 하나 사주시던가요.”
그러나 한참 쟁 중인 윤과 유진의 귀에 세진의 갸날픈 항의가 들릴 리가 없었다.
싸우는데 재미가 들린 둘은 왜 싸우는지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그저 쫓고 쫓기는 놀이에 빠져들었다.
한참 후 완전히 지쳐 거실에 뻗은 둘은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재밌다.”
“응. 근데 너 좀 많이 변한 거 같아. 요즘 군대는 성격 개조도 해 주냐?”
어렸을 때부터 붙어다닌 둘이라서 싸운 기억을 헤아리자면 한이 없다.
물론 그것은 윤의 일방적인 삐침이었지 싸움이 아니었다.
애당초 유진은 윤을 상대로 싸울 일이 없었다.
유진과 윤의 정신세계는 너무나 달라서 유진에게는 윤이 동렙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말도 많아졌고... 어, 그러고보니 말투도 변했네.
그래, 그래서 네가 낯설게 느껴졌구나. 뭔가 변했다고 생각은 했는데 몰랐었어.
진짜 신기하다. 너, 그것만은 절대 못 고쳤었잖아.”
“맞으면 고치게 돼.”
“그래? 그럼 진작 내가 패줄걸.”
아쉬운 듯 주먹을 들어보이는 윤의 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유진은 식은땀을 흘리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 세진이 오빠! 엥? 어디 갔지?”
“세진이는 왜 찾는데?”
뾰루퉁해진 유진이 쏘아붙이자 윤이 눈꼬리를 사정없이 치켜 올렸다.
“네가 알 바 아니잖아.”
“너 바보냐? 장수를 쏘려면 말을 먼저 쏘라는 말도 있잖아.
세진이한테 접근하고 싶으면 나를 먼저 넘겨 봐. 그럼 혹시 아냐, 내가 도와줄지.”
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듣고보니 그렇네. 세진오빠한테 유진이가 동생이니까...
게다가 이 집은 둘만 사니까 우애도 돈독한 것 같고.
아니, 일방적으로 세진오빠가 유진이한테 맞춰주는 거지만
어쨌거나 세진오빠는 유진이라면 끔찍하단 말야.
그럼 결론은 유진이한테 잘 보여야 한다는 건가? 엑!’
‘흥, 세진이? 꿈도 꾸지마. 뭐, 이용할 건 이용해주지.
어차피 넌 나한테 넘어오게 돼있다고.
세진이를 팔아야 한다는 게 마음에 안 들지만 이 기회에 윤이랑 데이트해야지.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나랑 다시 사귀게 될 거야.’
동상이몽이라 했던가. 서로를 마주보고 씩 웃어보인 둘은 완전히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진짜 도와줄 거야?”
“너 하는 거 봐서.”
“뭔가 믿음이 안 가는데.”
“싫으면 말고.”
“아냐! 성질도 급하긴.”
당황해 달래는 윤에게 냉랭한 얼굴을 하고 유진은 등 뒤로 v자를 그려보였다.
‘자, 이제 시작이다. 윤이 탈환 작전, 제 1단계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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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당하는 기분이 들어.“
“뭘 당하는데?”
“유진이 말야. 날이면 날마다 와서 이거 보자, 저거 하자 조르는데... 진짜 지겨워.”
“그러면서 왜 얼굴에 미소는 한 가득이냐? 유진이한테 전화 올 때마다 좋아 죽더만.”
“누가! 말도 안 돼!”
강하게 항의하는 윤에게 미진이 흥 콧방귀를 귀었다.
“누가 보면 네가 좋아하는 게 세진오빠가 아니라 유진이인줄 알 거다.
전화오면 헬렐레, 만나러 오면 헤롱헤롱. 솔직히 말해봐. 너 유진이 좋아하지?”
“이게 정말!”
결국 미진은 진실을 말한 죄로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스트레스가 풀려 좋긴 한데... 이구, 그건 말을 해도 꼭 얄밉게 해야 맛이지.”
씩씩거리며 집으로 향하던 윤은
변함없이 골목에서 유진을 기다리는 여자애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유진이 돌아온 후 일상이 되어버린 풍경이지만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쟤들 지금 며칠째냐. 저것들은 집에도 안 가나?
아니, 그보다 지금 애들 학교 파할 시간 아니잖아?”
유진의 집앞에 진을 치고 사는 몇 명은 이제 제법 눈에 익었다.
윤은 잠시 우리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 갑자기 그 무리 중에서 두세명이 뛰어와 윤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뭐냐, 니들?”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는 윤에게 교복을 입은 긴 머리의 여학생이 대뜸 앙칼지게 소리쳤다.
“당신, 유진오빠랑 무슨 관계야?”
“에? 무슨 관계냐니...”
“보기 싫으니까 오빠한테서 좀 떨어져 주지 그래?”
포위를 하듯 윤을 둘러싸는 여학생들은 척 보기에도 한 성질하게 보인다.
윤은 이마를 짚었다.
“아이고, 두야... 이젠 별게 다 날뛰네.
조그만 것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어디 사람한테 시비야?
니들 할일이 그렇게 없냐? 당신? 어디다 대고 당신이래?
공부를 안 하니 기본적인 공경심도 안 배워 모르냐?
모르는 사람한테 반말부터 하는 건 실례라는 것도 몰라?”
안 그래도 미진이 때문에 마음이 심란한데
어린 애들이 반말에다 인신공격까지 해 대니 심기가 꼬일대로 꼬여버린 윤이었다.
자연 말도 곱게 나가지 않았다.
“뭐야? 네가 내 학비 내 주냐? 어디서 공부 운운이야?”
“유진오빠 뒤를 졸졸 쫓아다닐 때부터 보통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진짜 웃기네, 이거.”
“이거? 이젠 국어도 제대로 말 못 하냐? 사람한테 이거가 뭐야, 이거가?”
“넌 너랑 유진오빠가 어울린다고 생각해?”
“눈이 있으면 거울을 좀 봐. 자기 분수나 좀 자각하시지.”
“그래서? 그럼 너랑은 어울리냐?”
“너보단 낫겠지. 유진오빠는 너보다 훨씬 나은 사람을 만나야 한단 말이야.”
“헛소리하지 말고 집에나 좀 가라, 응?”
실랑이를 벌이는 네 사람 사이로 유진의 집앞에 몰려 있던 아이들이 달려왔다.
“지금 무슨 짓이야? 언니, 죄송해요.”
“니들이 무슨 상관이야? 저리 비켜. 이게 먼저 시비를 걸었단 말야.”
윤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그 세명과 다른 아이들 사이의 말다툼을 지켜보았다.
그들 사이에도 나름대로 질서가 있는지
그 세명은 윤에게 덤빌 때와는 달리 아이들에게는 조금 누그러진 기색이었다.
필사적으로 변명하려는 그들에게 아이들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다 들었어요. 먼저 이 언니한테 반말했잖아요!”
“빨리 사과해. 그런 짓 할려면 다시는 오빠 집앞에 오지도 말고.”
“괜히 우리 인식만 나빠지잖아. 오빠한테는 뭐라고 할 거야? 오빠보기 민망해 죽겠네.”
“강퇴시켜요. 이건 명백한 팬클럽 규칙 위반이라구요.”
한마디씩 떠드는 통에 시끄러워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뒷전으로 몰러난 윤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한참 후에 정리가 되었는지 결국 그 세명은 돌아갔다.
물론 가면서도 윤을 노려보는 것은 잊지 않았지만.
“언니, 정말 죄송해요. 쟤들은 저희 팬클럽도 아니예요.
꼭 저런 애들이 문제를 일으킨다니까요.
오빠한테 저희들이랑은 상관없다고 이야기해 주세요.”
“유진이한테 팬클럽까지 생기다니... 역시 말세야.”
윤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근데요, 언니.”
아까 회장이라고 했던 아이가 망설이다가 유진에게 말을 걸었다.
“유진이오빠랑은 정말 무슨 사이예요? 굉장히 친해 보이던데...”
“원수.”
“네?”
“원수라고. 내 전생의 원수. 내 인생에 절대 도움이 안 되는 녀석.”
“언니, 오빠랑 안 친해요?”
“친하기야 하지. 어렸을 때부터 옆집 살았는데.”
“그럼 친구세요?”
“그렇게 부를 수도 있고.”
“오빠는 언니 되게 좋아하는 거 같던데...”
“유진이가? 나를?”
황당한 얼굴로 자신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보이자 아이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끔찍한 소리를... 그 녀석은 그냥 날 괴롭히는 게 좋을 뿐이라고.”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고
또 언니랑 나갈 때마다 아주 기분이 좋아보였는걸요.
그래서 저흰 당연히 언닌 줄 알았는데요.”
“절대 아냐. 그러니까 제발 헛소문 퍼트리지만 말아주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유진이 이 자식, 대체 어디서 무슨 소리를 하고 다니는 거야?
이젠 아주 별 방법으로 태클을 거네. 세진오빠 일만 잘 되면 그날로 제사지내주마.’
“언니, 오빠 마음 받아주세요~!”
합창을 하는 아이들을 피해 윤은 집으로 뛰어들어가 대문을 꼭꼭 잠궜다.
“아아아악! 이 웬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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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풀님, 말씀드렸다시피 세진이 튼튼합니다. ^^
절대 이런 걸로 기 안 죽어요.
괜히 유진이랑 같이 십몇년을 살아온 게 아니지요. ^^
(알고보면 유진이가 얼마나 못됐었는데요, 소근)
그리고 유진이, 패줬더니 이제 말 잘 듣습니다. ㅋㅋㅋ
라엘님, 흑흑...
한이 왈: 보신탕이라도 끓여주랴? 네 몸에 보신이라니 지나가는 개가 웃는다.
.............라는군여. -_- (젠장. 이자식을 이렇게 키우는 게 아니었는데.)
복수로 한이는 제가 가지기로 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
전 한이 안 무서워요. ^^
봄꽃님, 아직 유진이 고생은 멀었답니다.
그렇게 쉽게 윤이를 줄 수는 없죠. -_- ㅎㅎㅎㅎ
하지만 워낙에 영악한 녀석이라... 아니, 윤이가 나를 배신할지도..ㅠ.ㅠ
이점님, 그럼요. ^^ 그런 날은.... 올까....요? -_-;;
아직도 이 녀석들이 어디로 튈지를 몰라서리...
제가 살짝 물어보고 귀뜸해 드릴게요. ^^
보노보노님, 덕분에 주말 푸욱 놀아버렸습니다. ㅠ.ㅠ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다 점점 게을러져서 하루 한편도 안 되는 거 아닌지...
걱정입니다. 휴우~
비야님, 왕 자리까지 내팽개치고 온 유진인걸요. ^^
유진이에게 지금 윤이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근데 과연 이 둘의 성격상 예쁜 사랑은... 먼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