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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후, 하연의 물건들은 몽땅 새것으로 교체되었다.
하연이 쓰던 화장품보다 훨씬 비싼 수입 화장품들로 화장대가 채워졌다.
스킨 한 방울 따라 쓰는 것조차 아까운 것으로 말이다.
벽에 걸린 거울은 좀 더 큰 것으로 걸렸고
슈퍼에서 산 브러쉬는 독일제 브러쉬로 교체되었다.
다쳤던 하연의 발바닥도 이젠 거의 아물어서 붕대를 풀어 버렸더랬다.
변하지 않은 건 딱 한 가지 있었다.
하연의 불편한 마음.
덕분에 하연은 아주머니께서 하신 음식을 절반이나 남겼고
아주머니와 밝게 웃음 지으며 이야기 하지도 않았다.
그냥 아침이 되어 눈을 뜨고,
민혁의 호출이 있으면 방으로 갔으며 밤이 되면 눈을 감고 잠을 잤다.
민혁은 그 날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단 한 마디도!
“도련님께서 잠깐 방으로 건너오시랍니다.”
“혹시…무슨 특별한 기미라도 보이셨나요?”
“특별한 기미 같은 건 없었습니다. 어서 가 보십시오. 전 그럼 이만.”
“도대체 조비서님은 뭐가 그렇게 항상 바쁜 거에요?
식사 시간 아니면 저녁때 잠깐 집에 들렀다가 서둘러서 나가 버리니 말이에요.
신문도 없고,
텔레비전은 장식용이고,
핸드폰도 압수당한 상태라면…벽이라도 붙들고 이야기를 해야 할 판이라구요!”
정말 그랬다.
하연의 말은 빈 말이 아니었다.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눈다 해도
그것은 손바닥 글씨와 종이 위에 쓴 글씨로 나누는 짤막한 대화일 뿐
하연이 입을 여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아주머니도 매일같이 집에 오는 것이 아닌데다
민혁이 하연의 말상대가 되어 줄 리는 더더욱 만무했기 때문에
하연은 입 속에 곰팡이가 슬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조비서는 하연의 심정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무심하게 대꾸했다.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은 완벽하게 작동하는데요. 채널 입력도 다 되어 있고.”
“…그걸 누가 몰라서 이래요?
집 안 물건에 손대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데다
이렇게 쥐죽은 듯 고요한데 텔레비전을 틀어 놓게 생겼어요?
정말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 거에요, 아님….”
“…필요한 게 뭡니까?”
“많이 바라지도 않아요.
그냥…읽을 책! 잡지라든가 소설이라든가.
시집이라든가…뭐든 있었으면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다음에 집으로 올 때 가져오겠습니다. 분명 뭐든지라고 했습니다.”
“네. 뭐든지. 정말이지 내가 딱히 할 일도 없잖아요.”
조비서는 그런 하연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원래도 하연은 말이 많은 수다쟁이가 아니었다.
필요한 말만 골라서 했고 윤경이 툭툭 던지는 농담을 받아칠 능력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침묵. 고요. 적막.
차라리 손이라도 바빴다면 그럭저럭 견딜만 했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실제로 하연이 하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고
아직까지도 민혁의 눈빛을 쳐다볼라치면 주눅이 들곤 했다.
게다가 책이 있는 곳은 민혁의 방 밖에 없었다.
정기적으로 배달되는 신문도 없었고 잡지는 더더욱 찾을 수 없었다.
민혁의 방.
하연은 생각만 해도 부르르르 몸이 떨리는 것이었다.
주인 없는 방에 들어갔다가 어떤 꼴을 당해야 했는지.
이곳에 오기 전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고 딱 하루만 혼자서 푹 쉬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지만 이곳에 온 뒤로는 그게 얼마나 행복한 투정이었는지 철저히 깨달았다.
조비서가 방을 나간 뒤 하연은
화장대 위에 가지런히 정리 된 화장품 병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도대체 그는 뭐 하는 사람일까?
그나마 이 질문 하나로 시간을 보내는 하연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뭔가 허전하고 잊어버린 것 같은 느낌.
“허억…! 이, 이를 어째!”
조비서를 붙잡고 사정하는 터에
민혁이 잠깐 방으로 건너오라고 했던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용수철처럼 튕겨지듯 일어난 하연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신음소리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
하연이 머물고 있는 방에서 민혁의 방까지는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다리가 후들거렸다.
문을 열자마자 죄송하다는 말을 해야겠다고
수도 없이 되뇌었다.
축축하게 배어나온 땀을 옷에 대충 문질러 닦고서
하연은 문을 노크했다.
길게 두 번.
죄송하다고 말할 준비를 하고서 손잡이를 잡으려는데 별안간 방문이 벌컥 열렸다.
“이제 왔나? 좀 늦었군.”
“예? 아, 예…아, 아니. 죄, 죄송합니다.”
“들어와. 내 방에 한 두 번 들어와 보나?”
이민혁씨, 지금 당신이 방문을 열어 준 건가요? 그래요?
이렇게 묻고 싶은 것을 하연은 꾹 참았다.
마치 자신이 방 문 앞에 도착했다는 것을 미리 알기라도 한 듯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서 문을 열었던 민혁이었다.
하지만 하연은 여전히 싸늘한 눈초리를 하고 있는 민혁을 보며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 따위는 재빨리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렇지만 사실 하연의 상상이 옳았다.
민혁은 불러도 오지 않는 하연을 기다리기 위해
방문 가까이에 있었고 예민한 감각으로 하연이 방 문 앞에 도착한 것을 느꼈다.
문과 문 사이.
두 사람의 생각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가 그만…잊어 버렸습니다.”
“내가 질책도 하지 않았는데 왜 죄송하다는 말만 하지?
내가 예전에 했던 말도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예? 무슨…?”
“내 머리를 손질해 줬으면 하는데. 머리 손질은 혼자 할 수 없어서 말이야.”
하연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민혁을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도무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남자라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
하연은 맞벌이 하는 자식들의 관심 밖인 노인들을 간호 하면서
간단히 머리를 다듬거나 자르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몸이 불편한 노인들을 모시고 미용실을 찾아 가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그분들도 하연이 머리를 다듬어 주면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더랬다.
“…특이한 경력이더군. 미용기술 자격증까지 있으니 말이야.”
“그건 어떻게 알았죠?”
“그런 것도 조사해 보지 않고 쓸데없이 돈을 지불할 거라 생각했나?”
“…제가 자격증이 있다고 해서…손가락으로 머리를 자르라는 건…아니겠죠?”
민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휠체어를 움직여 방 귀퉁이 쪽으로 갔다.
민혁을 따라가던 하연의 눈길은
민혁이 멈춰 선 곳에 놓여 있는 작은 테이블 위에
커트용 가위와 전동 커트기, 커트 전용 커버까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는 것에 머물렀다.
도대체 저 남자에게 불가능한 게 있기나 한 걸까.
하연은 일단 커트 전용 커버를 들었다.
“그건 싫어.”
“이걸 두르기 싫다구요? 그럼 머리카락들이 고스란히 어깨 위로 떨어진다구요.”
“…싫어!”
한 번 싫은 건 죽어도 싫은 남자.
하연은 할 수 없이 잘 마른 수건 한 장을 손에 들고 사정조로 말했다.
“그럼 이 수건만이라도 어깨에 걸치면 안 될까요? 그것도…싫어요…?”
“꼭 그런 걸…해야 하나…?”
민혁의 얼굴에 절반정도 승낙의 표정이 떠오르자
하연은 들고 있던 수건을 민혁의 어깨 위에 덮었다.
꽤 큰 수건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민혁의 어깨가 탄탄하고 넓어서였을까.
겨우 어깨를 가릴 정도였다.
하연은 조금 떨리는 손으로 민혁의 머리카락들을 등분했다.
민혁의 머리는 제멋대로 길게 자라 있었기에 집게핀이 필요했지만
어깨에 덮는 수건조차 싫다고 마다하는 민혁에게
그것까지 요구할 수는 없었다.
반면 민혁은 바짝 긴장하는 하연의 손길이 머리카락을 통해 전해졌다.
사각사각하며 머리카락들을 자를 땐
하연의 숨소리에서조차 긴장감이 묻어났다.
뭐든지 예민하게 반응하는 하연은 민혁에게 있어서 관심 이상의 존재였다.
“저…앞머리는 어떻게…할까요…?”
앞머리에 대한 질문은 하연을 더욱 더 바짝 긴장시켰다.
혹시 이번에도 오해를 하면 어쩌나.
하연은 적당한 길이만 남겨둔 뒤 남김없이 잘라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민혁의 생각을 알 수 없었기에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는 흉한 얼굴을 드러내기 싫어할 지도 모르니까.
“좋을대로!”
“조, 좋을대로라뇨? 잘라내라는 말씀인가요, 아니면 그냥 남겨놓으라는 말씀인가요?”
“국어 안 배웠나? 좋을대로라는 말은 뜻대로 하라는 말 아닌가?”
자신의 작은 배려마저 철저히 무시당한 하연은 더 이상 섭섭함조차 들지 않았다.
다만 손에 들고 있는 가위의 날과 손가락 사이에 잡혀 있는 남자의 머리카락에
다시 집중했다.
손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민혁의 머리카락은 놀랄만큼이나 부드러웠다.
덥수룩한 머리 덕분에 머릿결도 푸석할거라 생각했던
하연의 예상은 철저히 빗나가 버렸다.
그리고 한편으로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머릿결이 부드럽다면 균형잡힌 영양 섭취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앞머리 길이 가늠을 위해
하연이 민혁의 앞으로 와서 살짝 허리를 숙인 순간
민혁은 하연에게서 풍기는 체취를 잡아냈다.
그리고 그 체취 때문에 흔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저리가지 못해? 가까이, 더구나 내 앞으로! 다가오지 마! 불쾌해!”
자신을 향한 당혹감 때문에 또다시 그녀에게 모진 소리를 뱉고 말았다.
그녀에게 상처를 줄 지도 모를 말들은 앞으로 삼가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입에 밴 말투와 습관적인 어휘들은
하루아침에 고쳐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민혁이 불쾌하다는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하연은 움찔 놀라며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하연은 그녀 나름대로 자책하는 중이었다.
아직은 그가 스스로의 얼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데.
게다가 경솔하게도 미리 양해조차 구하지 못했더랬다.
미안해요. 내가 너무 경솔했어요. 제발 화내지 말아요.
“…계속해.”
민혁은 짤막하게 한 마디 함으로써 하연을 안심시켜 주었다.
“…괜찮아요.”
“뭐가?”
“…괜찮다구요. 당신은 어떨지 모르지만 그게 저….”
“본론만 말해. 뭐가 괜찮다는 거지?”
“뜬금없는 말인 줄 잘 알아요.
단지 내가 당신의 얼굴을 쳐다보는 걸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민혁은 눈앞에 서 있는 여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소리만 질러도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떠는 여자.
두려움에 질려 겁먹은 채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구던 여자.
그러면서 지금 오히려 민혁 자신을 걱정해 주고 있는 여자.
이런 여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나미가 떨어진다며 진저리를 쳐도 모자란 자신을 배려해주는 여자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쓸데없는 걱정! 그 따위 동정이나 받자고 널 부른 건 줄 알아?”
“…알았어요. 쓸데없는 걱정 같은 거 하지 않을께요. 그러니까…하던 거나 마저 하죠.”
하연은 민혁을 자극시키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그를 자극시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뒤에야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무조건 항복.
하연은 그가 동정이라고 받아들이든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받아들이든 간에
자신의 진심은 전해졌으리라 믿었다.
지금 당장 전해지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다만 오해만 하지 말아요.
하연은 가만히 속으로 중얼거리며
조금 빠른 속도로 머리카락을 쳐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확히 7분 25초 뒤 민혁은 어깨를 덮고 있던 수건을 걷어내는
하연의 손길을 느꼈다.
“거울…가져다줄까요? 보고 싶어요…?”
“아니. 별로 보고 싶지 않아. 수고 했어. 가 봐.”
“…잠깐만요. 이 머리카락들…치우고 나서 나갈께요.
그냥 이렇게 방 안을 돌아다니도록 놔둘 수는 없잖아요….”
“그런 일은 할 필요 없어. 당신은 하우스 헬퍼가 아니니까.”
“하우스 헬퍼가 아니라도 이건 내가 할 일이에요.
정 거슬리면…저 쪽으로 가세요. 그럼 재빨리 치우고 나서 사라져 줄께요.”
“…마음대로 해! 쓸데없는 고집!”
민혁은 휠체어 바퀴를 거칠게 굴리며 방을 나가버렸다.
차가운 바윗덩어리마냥 냉랭한 사람.
하연은 거울조차 보지 않고 나가버린 민혁의 태도에
조금 섭섭한 감정이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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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잘 보내셨나요? ^^
지금 제가 있는 곳은 비가 엄청 오고 있답니다. 언제쯤 이 비가 그칠까요...
붕어빵님, 스킨 선물 넘 감사합니다. 아껴가면서 예쁘게 쓰겠습니다. 선물 메시지 확인
하자마자 곧장 효과 설정 들어갔답니다. 헤헤.
바람의 유혹님, 괜시리 들락거리게 해서 죄송해요. ^^; 월요일 아침엔 제 글 읽으실 수
있겠죠..? ㅎㅎ 글 늦어진다고 미강이 미워하심 안 됩니당.
행복한 주말 마무리 하시고, 힘차게 한 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
그럼 이만 총총총. 물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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