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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ies · 하나

열흘나비 |2004.07.12 18:37
조회 561 |추천 0



THE MEMORIES





사람들은 누구나
기억에 얽매여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누구라도 예외가 아니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어쩔 수 없는 기억의 노예들이다





 (1)


 “저기, 잠깐만요…….”

 그것은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귀에 익숙하진 않았지만, 언젠가 들었던 것 같은 아련함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나로 하여금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게 만들었다.
 남자가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내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잘 다려진 베이지색 면바지, 밝은 느낌을 주는 하늘색 스프라이트 셔츠를 입은, 짧은 머리를 한 20대 후반의 남자였다. 다소 유약해 보이는 하얀 얼굴에는 은테 안경이 씌어져 있었다.
 그가 다시 말을 걸기 위해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을 봤지만 외면하고 돌아섰다. 굳이 듣지 않아도 뻔한 이야기일 것이다. 아마도 도(道)나 기(氣)를 운운하며 이상한 사이비 종교를 전도하는 사람 중 하나겠지.
 괜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저기……미안해요, 잠시만 잠깐이면 되요.”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어설픈 용기였지만 내 발목을 잡는 데엔 충분한 힘이 실린 목소리였다. 나는 다시 걸음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보았다.

 “부탁입니다. 1분만 이대로 있어 주세요.”

 너무나 어이없는 말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이럴 때는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 거지. 그의 얼굴을 쳐다봤지만 판단이 서질 않는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저토록 간절한 표정을 짓게 만드는 것일까. 궁금증이 일었지만 그에게 물을 수는 없었다.
 문득 대학 시절에 보았던 ‘아비정전’이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장국영이 장만옥에게 했던 말을, 지금 그가 하고 있다.
 1분만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냥 있어 달라고.
 이 사람,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머리가 이상해진 것은 아닐까?

 “무슨 말이죠?”

 나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정말 부탁드립니다. 1분만…….”

 내게 그의 부탁을 들어줄 의무 따윈 없었다. 그냥 거절하면 그만이었지만……. 넙죽 고개를 숙이는 그를 보니, 차마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거절하기엔 그의 표정이 너무나 간절했다.
 긍정의 의미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본다. 그리고 그렇게 1분 동안 아무런 말없이 서 있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오가는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아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 얼굴을 꼼꼼히 살펴보는, 안경너머로 그의 시선이 느껴진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어떤 촉감이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따뜻하면서도 아련한 느낌…….
 1분 동안 내 얼굴을 조용히 쳐다보던 그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정말, 많이 닮았네요. 너무나……. 하지만, 역시 다른 사람이군요.”

 그가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는 순간, 알 수 없는 마음의 동요가 일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저, 이 남자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일뿐인데.
 안경으로 가려져 잘은 보이진 않지만 희미하게 그의 눈시울이 젖어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시간을 내주셔서…… 그리고 죄송합니다, 그럼.”

 그가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처음 그랬던 것처럼 그가 왔던 그 어딘가로 돌아가려 했다. 서로 모르는 남이었다가 잠시 1분간의 시간을 공유하고, 다시 타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는 내게 왔을 때보다 훨씬 느리게 걸어갔다. 그렇게 천천히, 얼굴을 맞대고 바라볼 만큼 가까웠던 그와의 거리가 나를 지나쳐 가는 행인들만큼이나 멀어져간다.
 축 쳐진 그의 어깨가 왠지 쓸쓸하게 보였다.

 “이봐요, 잠깐만요. 기다려 봐요!”

 내가 그를 불렀다. 그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저기, 이봐요. 잠깐만요.”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그를 부르고 있었다.
 다급하지도, 그렇다고 무신경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내 목소리를 못 들었는지, 그는 계속해서 멀어져 갔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판단이 서질 않았다. 아니, 내가 왜 그를 부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나는 그를 좇아 달려가고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 봐요! 이봐요!”







 “잠깐만 기다려 봐요! 이봐요!”

 내 스스로의 행동에 놀라고 있었지만 그것을 멈추거나 하진 않았다. 다행히, 그의 걸음이 빠른 편이 아니어서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다행히? 순간, 난 내 자신에게 놀라고 말았다.
분명,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왜 일까.

 “하아, 하아, 숨 차.”

 그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나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말을 하지 않았지만, 많은 것을 묻고 있는 눈빛이었다.

 “…….”

 어떤 말을 해야 하는 거지. 그의 눈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 떠올랐던 수많은 단어들이 거짓말처럼 지워져버렸다. 일단 그를 붙잡는 데엔 성공했지만 다음 행동에 대해선 쉽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난감했다.

 “으흠. 저기 있잖아요. 그게 그러니까… 음… 그게 말이죠.”

 그의 눈이 웃는다. 아니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헛기침을 크게 한번하고,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내 입술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는 인내심을 갖고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좀더 어색해지기 전에 무언가 말을 해야 한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무슨 말을…….

 “커피 사세요!”

 맙소사, 커피라니. 도대체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네? 커…커피요?”

 순간 그는 무척이나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당사자인 나만큼이나 당황스러울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을 수습해야 했다.

 “남의 시간을 1분이나 뺏었으면 대가를 지불하세요. 사람을 붙들어 놓고 뭔가 설명도 없이…… 거리에 세워두고…… 그러니까 제 말은…… 음, 그게 있잖아요. 아무튼 그쪽이 커피를 사요. 아, 그리고 내 얼굴도 본 값이 포함되네요.”

 이번에도 그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아까와는 의미가 다른 것이었다. 10,000분의 1초 동안이나 고민을 했을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표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빙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안경을 벗어 렌즈를 닦았다.
 안경을 벗은 그의 눈은…… 정말 예뻤다. 남자의 눈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맑고 투명한 느낌을 주는 눈이었다.
 그가 다시 안경을 썼을 땐, 나도 모르게 아쉬움을 느꼈다. 처음 내게 부탁을 했던 모습과는 또 다른 얼굴이었다.
 결심이 섰는지 그가 내 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커피면 됩니까?”

 난 “네?"하고 반문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시간을 뺏은 대가 말입니다.”

 이번에도 “네.”라고 대답했다. 사실, 그 말 외에는 달리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시간을 뺏은 것이랑 그리고, 얼굴을 본 값으로 커피면 되는지 물었어요.”

 “아, 네.”

 나는 계속해서 “네”라는 대답만을 일관했다. 바보처럼.

 “좋아요, 그럼. 가요. 제가 커피를 살게요.”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처음 내게 말을 걸었을 때와는 달리 대범한 행동을 보였다.
지금, 내 손을 잡겠다는 말인가?

 “어, 이 봐요…아이…이것 참.”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일 틈도 없이 그가 내 손을 덥석 잡더니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난 너무 당황한 나머지 손을 뺄 생각도 못하고 그의 손에 이끌려갔다. 보폭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나는 잰걸음으로 그에게 맞춰야 했다.
 힐끔 곁눈질로 그를 훔쳐봤다.
 앞에서 마주 볼 땐 몰랐는데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보니, 생각보다 키가 큰 편이었다. 그가 잡은 손에 자꾸만 땀이 나서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도 느꼈는지 내 손을 놓칠까, 더욱 힘을 주는 듯 했다.
 이상한 것은 낯선 남자와 손을 잡고 걸어가는데도 전혀, 어색함을 느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오늘 처음 만난, 낯선 남자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걷고 있다. 이런 기분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너무나 낯설지만 싫지는 않았다.
 10여분 정도 걸었을 때, 그가 멈춰 섰다.








 “여기, 커피 맛이 괜찮아요. 들어가죠.”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요?”

 “넵. 자, 이쪽으로.”

 그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곳은 갤러리에서 운영하는 깔끔한 이미지의 카페였다. 문득, 이 카페의 분위기와 그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주 찾아오는 곳이었는지 사장으로 보이는 여자가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손수 전망이 좋은 창가로 안내를 해주었다.

 “어머, 인하씨 왔네. 오늘도 같은 자리지?”

 “그럼요. 저야 늘 같은 자리죠. 딴 사람한테 내주면 다신 안 올 겁니다.”

 “하하. 알았어. 5년 단골인데 잘 모셔야지.”

 “아암, 그래야죠. 하핫. 헤이즐넛 두 잔 주세요.”

 “응, 조금만 기다려.”

 “누님, 난 곱배기로!”

 “후훗, 알았어.”

 두 사람의 대화는 오누이처럼 오랜 시간동안 익숙해진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이 남자, 의외로 밝은 구석이 많아 보였다.

 “인하?”

 “아, 제 이름입니다. 박인하.”

 그의 이름은 박인하였다. 잘은 모르지만 그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여겨졌다.

 “저기…… 성함이…?”

 아! 생각해보니 내 이름도 말해주지 않았다.

 “저는 미애에요, 김미애. 조금 촌스럽죠?”

 “아…아뇨. 예쁜 이름인걸요. 그런데, 제 맘대로 시켰는데…….”

 이름이 예쁘다……. 상투적인 말이었지만 싫지 않은 느낌이었다. 다른 사람이 말했어도 그랬을까.

 “아니에요. 저도 헤이즐넛으로 하려고 했어요.”

 거짓말이다. 나는 커피를 즐기는 편이 아니다. 차라리 녹차 같은 전통차를 선호했지만 왠지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네.”

 “…….”

 “…….”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우리는 커피가 나올 때까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간혹, 시선이 마주치면 그가 '피식'거리며 먼지 같은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덕분에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천천히 감상(?)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남자치고는 선이 가는 그의 얼굴은 물기가 고여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눈빛과 잘 어울렸다. 지금은 짧은 스포츠머리지만, 좀더 머리를 길러서 이마를 살짝 가리는 스타일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턱을 괴고 있는 손, 그의 손가락은 가늘고 길었다.
 문득, 그에 비해 작고 예쁘지 못한 내 손에 그의 시선이 닿기가 무섭게 얼른 테이블 밑으로 감췄다. 다행히 그는 내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눈치였다.
 커피가 나왔다.

 “커피, 드세요. 이 집 커피가 정말 괜찮거든요.”

 오랜 침묵을 깨고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요. 음, 향도 좋은 것 같네요. 저 커피를 잘 모르지만.”

 “어, 혹시 커피 싫어하시는 것은 아니에요? 이런, 다른 것으로 시켜도 되는데…….”

 그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이 귀여워 보였다. 어쩌면 내게도 자신도 몰랐던 가학적인 취향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지금은 그를 안심(?)시키고 볼일이었다.

 “괜찮아요. 싫어하는 편은 아니에요. 저도 가끔 마셔요. 정말 커피 맛이 좋은데요.”

 내가 생각해도 오버하는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그래도 효과는 있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저기요.”

 “네?”

 “한 가지, 물어봐도 돼요?”

 “뭔 데요? 아, 아까 제 행동에 대해서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짓다가, 나직하게 들리지 않는 한숨을 쉬었다. 무언가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어 재빨리 말을 번복했다.

 “저기, 힘들면 말씀 안 하셔도 돼요.”

 “훗, 아니에요. 아깐 많이 당황하셨죠?”

 “음, 네. 솔직히 그랬어요.”

 그는 남아있던 커피를 단숨에 마셔버렸다. 급하게 마시다가 목에 걸렸는지 기침을 했다. 눈물이 글썽일 정도로 기침을 한 그가 냅킨으로 닦아내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후우. 미안해요.”

 “아, 아니요.”

 “음, 미애씨는…….”

 그가 망설였다. 안경에 가려져 볼 수는 없었지만 눈동자가 젖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닮았어요. 그 친구랑…… 그것도 아주 많이…….”

 “닮아요?”

 “네. 지하철역 앞에서 미애 씨를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그래서 계속 따라 온 거예요. 그럴 리가 없는데도 훗. 내가 잘못 봤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데, 정말 닮았어요. 내가 부질없는 희망을 갖게 할만큼.. 그 친구를 많이 닮았어요. 물론 다른 사람이지만……."

 눈동자에 이어 그의 목소리도 젖어가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물을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가 계속해서 들려준다면 몰라도……. 들어서는 안될 이야기를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 남자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후회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감 같은 그런 느낌.

 “아까는 많이 당황하셨죠? 다시 한번 사과드릴게요. 정말 그때는…….”

 그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뭐.”

 대답은 했지만, 뭐가 괜찮고 그럴 수 있는 것인지 나 자신도 모른다. 그냥 이 사람을 달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헛기침을 몇번 하고 나서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세상엔 이렇게 닮은 사람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죠. 꺼져 가는 불씨를 다시 살리고 싶은 마음 같은 느낌. 그런 마음이랄까. 우습죠?”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그분을 많이 좋아하셨나 봐요?”

 “네…….”

 “그렇군요.”

 “늘 같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여겼는데……. 하지만, 지금은…….”

 “인하씨…….”

 “더 이상…….”
 
 물기가 가득 담긴 그의 목소리가 점점 떨려간다는 것을 느꼈다.

 “후우. 그 친구를 이제는 볼 수가 없습니다. 만날 수도 없고……."

 그는 고개를 무겁게 떨구었다.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고 있었다.
 그리고…….

 툭. 툭.

 하얀 테이블 위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떨어졌다.
 남자의 눈물은 정말 처음 보았다. 내 마음까지 아파 왔다. 몰랐었다. 남자가 우는 모습이 이렇게 가슴이 메일만큼 아플 줄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숨소리조차 낼 수가 없었다. 그냥 이렇게 그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은 그를 방해해선 안될 것 같았다.

 “정말, 정말 좋아했었는데. 이젠 볼 수가 없다구요. 이제는…….”

 “인하씨…….”

 “너무 먼 곳에 가버렸어요. 아주 먼 곳에…….”

 더 이상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애써 그를 외면하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의 표정은 지금 내 앞에 있는 남자와는 달리 모두가 밝아 보였다. 마치 다른 세상에 사는 이들처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은 몰랐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아무 것도 난 몰랐잖아 너를 힘들게 했다는 게
  그런 것도 몰랐다는 걸 도무지 난 용서가 안돼
  아무 것도 넌 모르잖아 나를 차갑게 돌아서도
  내일부터 볼 수 없어도 내 안의 넌 달라지는 게 아니란 걸


 나는 의자에 몸을 깊게 묻고 조용히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이 알 수 없는 기분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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