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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릴 수 없는 당신 (2)

열흘나비 |2004.07.13 22:49
조회 352 |추천 0



 


그릴 수 없는 당신






과거를 회상하다


나른한 오후, 따듯한 햇살에 몸을 맡겨 잠이 들면 좀처럼 눈을 뜨기 힘든 시간대다.
점심을 과하게 먹은 탓도 있다. 아마도 친구가 사는 밥이었기에 과식을 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식대에 대한 부담이 없었으니까.
점심시간에 맞춰 대학동기인 명석이 다음달에 결혼을 한다며 청첩장을 들고 회사로 찾아왔다. 물론 축하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고 그 답례로 점심을 대접받았다.
그리고 낮술까지.
과음을 하지는 않았지만 알코올 기운은 여전히 내 몸 어딘가에 남아 제멋대로 돌아다니고 있다.
그래서인지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다.
몸도 노곤하다.
나를 지켜보는 과장의 시선만 아니라면 잠시 책상에 엎드려서 눈을 붙이고 싶은 심정이다.
꼭 술 때문만은 아니었다.
명석이 은수의 안부만 묻지 않았어도 그렇게 몇 잔씩 털어 넣지 않았을 것이고 기분도 지금보다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랬다. 지금 나를 지배하고 있는 이 불편한 심기의 근원에는 은수가 있었다.
그 날 이후로 은수에게선 아직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어쩌면 그것으로 우리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은수의 성격상 그리 쉽게 끝맺을 것 같진 않다.
아마도 오늘이나 내일, 아니면 좀더 시일이 걸리더라도 어떤 제스처를 취할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은수는 틀림없이 그러리라 예상된다.
그건 나뿐만 아니라 은수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명석도 그렇게 말했다.
은수와 나는 대학시절 동아리 선후배 사이로 처음 만났다.
당시 나는 신입생이었고 은수는 2년 위 선배였다.
그때는 모든 것이 새롭고 어떤 일에든 흥미를 느끼는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때로는 이성보다는 감성에 의존하기도 하고 지나치게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일도 많았다.
그건 내가 동아리를 가입했을 때도 그랬고, 그리고 은수를 처음 만났던 날도 그랬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벌써 8년이나 지난 일이다.
동아리를 가입했던 것도, 은수를 처음만난 것도 모두 같은 날이었다.




“민재야, 저기 좀 봐라. 쟤 죽이지 않냐?”

캠퍼스 잔디밭에서 낮잠을 자는 것이 무슨 낭만인 줄 알았던 그해 5월의 봄날, 비슷한 이유로 옆자리에 배 깔고 누워있던 명석이 호들갑을 떨며 나를 깨웠다. 물론 쉽게 눈이 떠지진 않았지만 명석이 워낙 유난을 떠는 바람에 짜증을 내며 몸을 일으켰다.

“뭣 때문에 그렇게 요란을 떠는 건데? 나 어제 리포트 쓰느라 한숨도 못 잤다. 웬만하면 건드리지 마라.”

“졸려? 그래도 저길 보면 잠이 확 달아날걸.”

명석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뭘 보고 그러는 건데?”

라고 내가 묻자,

“저길 봐라. 저기 흰색 카디건을 입고 가는 애 보이지?”

명석이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맞은편에 보이는 법과대 건물을 가리킨다.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고, 곧 명석의 말대로 졸음이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눈이 번뜩 뜨였다고나 할까? 명석의 말대로 하얀 카디건을 걸친 여자가 법과대 건물을 지나고 있었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몸매도 균형 잡히고, 무엇보다도 살짝 눈웃음을 짓는 얼굴이 우리의 시선을 끌었다.

“어떠냐? 내 말이 맞지? 잠이 확 깨지?”

명석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네? 몇 학년일까? 혹시 연상은 아니겠지.”

“궁금하면 직접 확인해봐야지. 쳐다만 본다고 누가 가르쳐주겠냐?”

하고 명석이 말하더니,

“그냥 이렇게 있을 거냐? 난 요즘 작업 중인 애가 있어서 너한테 양보할까 하는데. 어때? 생각 있어? 정, 자신 없으면 내가 무리를 해서라도 두 여자를 거느리고.”

라며 나를 부추겼다.
나는 명석을 힐끔 보고는 씩 웃어줬다.
그리고 명석이 미소를 짓기도 전에 곧바로 자리를 박찼다.

“확실하게 엮지 못하면 돌아오지 마라. 알았지? 이민재 화이팅!”

나는 명석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하얀 카디건을 열심히 쫓아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렇게 달려본 적은 처음인 듯싶었다.
5분 정도를 전력질주 한 끝에 여자를 따라잡을 수 있었지만 막상 가까이에 가자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5분 정도를 말없이 따라갔다.
물론 그녀는 나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그랬다면 나를 꽤 한심한 놈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건 진짜 스타일을 구기는 거다. 첫인상이 나쁘게 박히면 이후의 진행은 상당히 더뎌지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나는 깎인 점수를 만회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어야하고 자칫하면 영영 회복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 정말 밑 빠진 독에 물붓기다.
그런데 이 친구가 그런 문제들을 모두 감수할 만큼 매력이 있느냐? 그건 또 아닌 듯싶다. 늦기 전에 돌아서야하는 걸까.
하지만 숨이 가쁘도록 달려온 것이 너무나 아깝다.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어려운 문제다.

“어떻게 왔죠?”

이런저런 생각으로 고민에 빠져 있다가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니 어느 동아리 사무실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빠르게 분위기를 살폈다.
서너 평 남짓한 공간에는 의례 그렇듯 중앙에 작은 탁자가 있었고, 그 주위로 다섯 명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여자 셋, 남자 둘.
그중 한 명은 나로 하여금 이곳까지 좇아오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봤을 때보다 가까이서 봤을 때가 더 예뻤다. 역시 헛된 수고는 아니었다.

“무슨 일로 왔냐고 물었는데?”

두 명 중 좀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자가 내게 물었다.
유행이 지난 한참 지난 5대5 가르마를 탄 헤어스타일에 넙적한 얼굴에는 별로 우호적이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고, 전반적으로 노회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것이 예비역 복학생인 듯싶었다. 하지만 초면에 무턱대고 던지는 반말은 조금 거슬렸다.

“아, 그게 그러니까…… 네! 동아리에 가입을 하려고 왔습니다.”

즉흥적으로 내뱉은 대답이지만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다. 예비역 아저씨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아마도 신입회원이 거의 없는 듯했다. 왠지 대답을 잘못 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오호라, 그렇다면 자네는 신입생?”

예비역 아저씨의 목소리가 느끼해졌다.

“뭐, 그런 셈이죠. 하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동아리랑은 조금 다른데, 혹시 그림은 그려봤어요?”

이번엔 그녀가 물었다.

“그냥 조금.”

다시 웃어줬다. 사실 웃는 것 외엔 다른 대처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뭐 그림이야 하다보면 늘잖아. 나도 처음엔 거의 젬병이었잖아. 다들 알지? 내가 얼마나 그림을 못 그렸는지? 이봐, 자네. 우리는 말이야. 여행을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는 모임이야. 그렇다고 거창한 건 아니고, 혹시 크로키라고 들어봤어?”

예비역 아저씨가 눈웃음을 치며 물었다. 속이 느글거리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빠르게 그리는 거 말인가요?”

“맞았어! 바로 그거야. 이야, 기본이 되었는걸. 이 정도면 훌륭해. 그냥 여기저기 내킬 때마다 여행을 다니면서 여러 가지를 화폭에 담는 거지. 크로키로 말이야. 그래서 우리 동아리 이름은 방황하는 고호야. 어때? 예술적인 풍취가 느껴지지 않나, 젊은 친구?”

점점 수렁에 빠져드는 기분이 들었다.

“네, 그렇군요. 그럼 가입은 어떻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입? 이미 가입이 된 거지. 그런 말도 있잖아. 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3천 번의 인연이 있는 거라고.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그런 전생의 인연인지도 모른다고. 자넨 이미 우리 동아리의 식구가 된 거야. 저 문을 들어서면서부터. 하하하!”

“아, 네.”

“좋아, 그러면 우리 식구들을 소개하지. 그럼 우선 나부터. 내 이름은 이창수. 이 동아리의 회장을 맡고 있어. 작년에 복학했지. 내년이면 졸업반이야. 아 참 그러고 보니 자네 이름은?”

“전 이민재입니다.”

“오오, 민재군이군. 혹시 어디 이씨인가?”

“경주 이씨입니다.”

“오호라, 그렇구먼. 나는 전주 이씨일세. 그리고 여기 아리따운 아가씨는 성예진, 자네랑 같은 신입생이야. 미술학부 1학년이야.”

그녀의 이름은 성예진, 다행히도 나랑 같은 신입생이었다.
예비역 아저씨는 이후로 주절주절 동아리 식구들 소개했지만, 다른 이름은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기 이 친구는 김은수, 내가 졸업을 하면 우리 동아리를 맡아줄 친구지. 예진이 직속 선배이기도 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나보다는 이 친구에게 물어보도록 해. 사실 실력으로 따져도 내가 배워야 할 입장이거든.”

예비역 아저씨가 과장된 목소리로 칭찬을 곁들여서인지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갔다.
긴 생머리, 다소 고집스럽게 다문 작은 입술, 아주 빼어난 외모는 아니었지만 차분한 분위기를 갖고 있는, 명석이 봤다면 복고풍의 미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가 바로 은수였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요?"

그것이 은수가 내게 처음 건넨 말이었다.

“네, 물어보세요. 아프지만 않게.”

“와하하하! 아프지만 않게! 우리 새 식구의 유머가 정말 대단하지 않아? 으하하하! 정말 대단한 유머감각이야.”

그냥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인데, 예비역 아저씨는 무슨 의도에선지 오버를 남발하며 나를 치켜세웠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침묵으로 일관할 뿐, 그에 동조하지 않았다. 당연히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말 한마디로 사람들을 침묵시키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우리 동아리에 가입한 진짜 이유가 뭐예요?”

“아, 그건…….”

나는 은수의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알 것 같기도 한데.”

은수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맞춰 볼까요?”

“하하, 무슨 말씀인지…….”

내가 어색하게 웃자, 은수는,

“본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정말 모르겠어요.”

라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전 그냥 그림을 배우고 싶어서 왔는데요.”

어설픈 변명이었다. 하지만 달리 떠오르는 말도 없었다. 그냥 이대로 밀어붙이는 수밖에.

“그래요? 그럼 그건 뭘까? 아까 보니까 그쪽이 법대서부터 예진을 졸졸 따라오던데.”

“아, 그건 그냥 우연히 가는 방향이 같았을 뿐이에요.”

“오호, 그래요?”

“네, 전 결백합니다.”

무엇이 결백하다는 건지 나 자신도 몰랐지만 일단 대답은 그렇게 했다.
은수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짓고는 예비역 아저씨에게 말했다.

“창수 오빠, 신입회원 지도는 내가 해도 되죠?”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그럼 그렇게 해. 은수 네 실력이면 유치원 애들도 피카소를 그릴 수 있을 테니까.”

은수가 다시 나를 보더니 윙크하며 말했다.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했죠? 나는 누굴 가르칠 때는 조금 엄격해지니까, 미리 각오를 해두는 게 좋을 거예요. 알았죠?”




“이민재! 임마, 이민재!”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고개를 드니 과장이 뚱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일어나며 입가에 묻은 침을 닦았다. 과장은 그런 나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퇴근시간까지 내내 시달릴 분위기다.

“너는 장가도 안 간 놈이 밤에 잠 안자고 뭐했어? 잠이 모자라? 이제 겨우 3시야. 웬만하면 우리 업무에 충실하자. 그리고 전화 좀 받아라. 아까부터 네 휴대폰에 불난다, 불나.”

과장의 말처럼 휴대폰이 혼자서 요란하게 울고 있었다. 나는 슬쩍 과장의 눈치를 봤다.

“뭐해, 빨리 받아.”

나는 과장이 돌아서는 것을 확인한 후에 휴대폰을 받았다.

“여보세요?”

너무 늦게 받은 탓인지 ‘뚜―’하는 신호음만 울렸다.
나는 발신자 확인 서비스를 점검했다. 그리고 액정화면에 뜨는 이름을 보는 순간, 입안에 쓴맛이 도는 것을 느꼈다.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던 사람은 은수였다.
보름만의 연락이다.
나는 한참동안 액정화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보름 만에 눌러보는 은수의 전화번호였다.
그리고 은수가 전화를 받았다.

“나야, 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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