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서른여덟, 한창 무료함에 시달리던 나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해 주었던 필립을 통해 나는 스물일곱의 그를 만났다.
첫 만남에서부터 그는 나를 감지하는 어떤 당연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내가 돋보일 수 있는 여러 가지 단서를 내밀었다. 예컨대, 형형색색, 생기발랄한 나의 옷차림과 독창적인 말투, “됐다 그래라” 한마디의 앙큼한 우격다짐, 그는 전적으로 분위기에 앞장서는 내 모습에서 묘한 수심의 세계를 엿본 첫 방문객이었다. 나는 다소 과장되게 나의 전적을 과시했다. 남자라면 대충 찜도 찌고 회도 쳐서 특허품 개발 또는 폐품 선정에 힘써온 나를 누가 감히 넘보겠느냐는 우스개 소리에 그는 흔쾌히 나만의 제품이 되겠노라 너스레를 떨었다. 서른여덟 해를 살아온 역사의 고뇌를 일단 접고 온전히 그들과 흡수하려는 내 모습이 통쾌했던지 그는 관심과 호응, 유쾌한 웃음으로 나를 들뜨게 해 주었다. 대뜸 보기에도 내가 서울 풍토에 맞지 않는다는 염려의 눈길과 함께.....
다소 얌전하고 어색하게 눈인사를 하던 그에게 나는 상당한 눈요기 감이었을 것이다. 나는 기필코 그의 눈요기 감이 되어주었다. 사실 그 즈음의 나는 누구하고든 마주하고 싶었고 누구하고든 시간을 보내고자 했다. 나의 달라진 의지와 그의 적극적인 반응이 보류 중이던 내 신경을 깨워놓았다. 살짝 수줍어하던 그도 허물없이 다가와 주었다. 한결같이 우겨대는 농담만으로 전혀 생소함 없이 서로에게 매료되고 영혼마저 교류할 수 있다는 것에 나는 몹시 놀라고 있었다. 100년 같았던 10년간의 암울한 백열등이 꺼지고 나는 자그마한 햇살을 맞이했다. 그렇게 아침 햇살 같은 그가 이른 나른함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는 정교하고 섬세한 동양의 정취로 나를 잠재우기도 하고 획기적인 긴장감으로 나를 깨우기도 했다. 술기운에도 그는 나태하지 않았고 정신은 몽롱해도 나는 방심하지 않았다. 만취를 기회로 장난을 일삼다가도 우리는 사려 깊게 서로에게 다가갔다.
기차 여행 중 아무렇게나 닿은 이태리의 작은 마을, 작은 벽돌 모퉁이를 돌아보면 노랗고 허름한 문틈을 비집는 한 줄기 빛의 모호함, 나는 그 모호함에 끌려 염탐꾼처럼 그를 따라 영문모를 곳을 이리 저리 배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의 솜털 같은 부스스한 머리카락, 약간 피곤해 보이는 옅은 눈동자에 끌려가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나는 그들과 합류할 수 있도록 솔선수범했다.
그는 싸움닭처럼 나를 질타하다가도 나의 농염한 눈길에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는 천정까지 치솟는 고약한 목소리로 재차 나를 대적해 왔다. “이것보슈!!! 제정신이야!!” 필립은 무거운 등을 벽에 기대고 시종일관 관객이 되어주었다. 내게서 풍기는 향수냄새가 그의 코를 포섭했다. 내가 슬그머니 그의 손에 이르면 “잠깐 잠깐만” 그는 명랑하고 기분 좋게 웃어주었다. 그가 그윽한 눈길을 건네 왔다. “해 볼 테면 해봅시다.” 나는 얼른 얼굴을 붉혔다. 파페라 가수를 연상케 하는 까탈스러운 목소리, 밤색 눈동자를 감싸 도는 섬세한 눈꺼풀, 동그란 얼굴에 조화로운 입술은 “오 그래” “내가 한마디 해도 될까?” 연신 내 속도를 쫓느라 분주히 움직였다. 스물일곱과 서른여덟, 청년과 중년의 엉뚱한 만남은 초가집 앞마당을 나르는 다듬이 소리처럼 토닥토닥 분주히 설왕설래하며 겨울밤을 지탱해 주고 있었다. 그는 난장이 화가, 제임스 조이스, 물랑루즈, 잭키 브라운을 나는 삼류 소설속의 욕망과 애정행각을 이야기 했다. 직선적이고 사실적인 소설에 가담한 나의 인생을 나는 틈틈이 건넸다. 결혼, 이혼 또 결혼 별거로 이어졌던 내 인생 전반은 소설에서 수필로 전환되었고 지금 내 머릿속에는 당최 사람에게서 깊이를 추적하는 것이 참으로 난감하다는 고뇌를 아울러 털어놓았다.
이렇게 엉키고 풀리는 대화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그에게서 풍기는 독특한 향기나 남자로서는 드문 매혹적인 자태를 순간순간 감지했다. 만일 필립이 하층민을 대표하는 반나체의 백정을 연기했다면 그는 전설의 화신 또는 망망대해를 가르는 한 마리의 기러기를 연출해 냈다. 나는 그가 독방에서 절규하는 필립의 원석 같은 거친 면과 남달리 험한 사내의 기질에 반했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그가 성(sex)과 무관한 원초적 상품에 순순히 매혹당하면서 막상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는 비밀리에 가혹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완고하게 자아를 함구하고 (말하지 않기로 한 사람)처럼 행동했으나 잠시 스스로를 노출하고 들키기도 하는 것은 순수의 잔재로 살아가는 나를 경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나야말로 그의 정체성에 도전할 사람이고 그것이 우리 둘에게 멎진 게임이 될 것을 예감해서였는지도....모를 일이다.
남자로서 청초하기도 하고 자태조차 고은 그의 독특함, 고조된 목소리와 고조된 감정으로 의논의 대상이 되어왔던 그에게 필립 역시 적지 않게 끌려 다니고 있는 듯 보였다. 필립이 온갖 사람을 만난다면 그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사람을 이내 가려내고 맘으로 품는 사람이었다. 그가 자신에 대해 철저히 접근 불가령을 내리고 자기 취향으로 사람을 가리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면이었다. 그와 필립은 버클리 대학동창이었다. 필립이 버클리 동창, 선배, 후배들로 만남을 이어가는 동안 그는 사채업자 밑에서 빗 받아주는 덩치 큰 친구를 비롯해 구로동의 헬스클럽 코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TV만 보는 젊은 총각, 대부분 온순하고 단순한 군대 동기들로 친목을 도모했다. 이제, 가끔 예술 작품을 얘기하고 얼핏 듣던 옛 노래를 공감하고 때때로 연예인을 칭송할 만한 벗이 필요하고 자신을 표현할 술이 필요할 때 그는 위의 친구들과 나를 포함시킨 만남의 자리를 매번 제공할 예정인 것 같았다.
자칫 소년이면서도 상당부분 남자이기도 한 그의 매력이 일반 사람에게는 난해하다는 것이 나에게는 얼른 다행스럽고 한편 위로가 됐다. 그가 나를 이해했기 때문에 내가 그로 하여금 위로받을 수 있도록 자신의 일정부분을 허용하는 듯한 태도 때문인지 성급하지만 나는 그에게 마음으로 의지했다. 나는 나의 직관력과 적중률 높은 직감력을 도구로 계속 그를 관찰 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