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EMORIES
사람들은 누구나
기억에 얽매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누구라도 예외가 아니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기억의 노예들이다
(4)
누군가와 데이트를 하고 아쉬움을 느끼며 집으로 귀가하기는 정말 오랜만이다.
그가 대문 앞까지 바래다준다는 것을 극구 사양하고 혼자서 걷고 있다. 물론 그가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조심한다고나 할까. 그리고 아직은 식구들에게 그를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와 나 사이에 다른 사람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서로에 대한 감정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식구들이나 친구들이 알게 되면 왠지 불편해질 것 같다.
그냥 그렇다, 지금의 내 생각은.
평소보다 늦은 귀가인 탓도 있겠지만 집으로 가는 길목이 여느 때와 달리 한산한 느낌이다.
그러나 특별히 겁이 나진 않는다.
아마도 내게 그의 냄새가 묻어있는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진하지 않지만 내 손에선 그가 즐겨 쓰는 스킨 냄새가 엷게 남아있다. 그것만으로는 어떤 제품인지 알 수 없지만 그가 함께 걷고 있는 듯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꽤 오랫동안 손을 잡고 걸었다. 특별히 행선지를 정하지 않고 그냥 걸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걸으면 많은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우리는 서로 많은 걸 공유할 수 있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말할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분명히 있었다.
그의 기분이라든가, 생각, 웃음…….
특히 말없이 웃을 때면 나 역시 자연스럽게 미소를 짓게 된다. 마치 웃음도 전염이 되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하게 된다. 그러나 전혀 불쾌하지 않은, 기분 좋은 경험이다. 그는 전염성이 매우 강한 남자다.
지금 내게는 그의 스킨냄새 말고도 많은 냄새가 묻어 있다.
그것은 오늘 그와 함께 한 시간들의 기록이다.
팔을 흔들 때면 옅지만 아로마 향이 난다. 허리춤에서도 나고, 주로 상의에서 느껴지는 냄새들이다.
그와 걷던 중에 아로마 향초를 파는 행상을 만났었다.
우린 그곳에서 멈춰 서서 이런 저런 것들을 물어보고 향초도 사서 서로 나누어 가졌다.
지금 내 핸드백에는 그가 사준 향초가 들어있다. 이름은 들었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중에 그를 만나면 다시 물어봐야지. 어쨌든 피로회복과 숙면에 좋다니까 당분간은 잠이 잘 올 것 같다.
나는 핸드백을 어루만지며 바보처럼 빙그레 웃었다.
소매에는 희미한―깨끗하게 지우려고 했지만 결국 그의 손수건만 희생시킨―얼룩과 함께 맥주냄새가 배어있다.
우리는 꽤 긴 거리를 걸은 후에 그때의 카페에 다시 들러 맥주를 마셨다.
맥주를 마시자고 제의한 사람은 나였고, 그는 흔쾌히 동의했다. 그냥 느낌이지만 인하, 그 사람은 다른 제의를 해도 거절하지 않을 것 같다.
그와 안면이 있는 여 사장은 우리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분위기 있는 재즈음악을 틀어주었고 맛깔스런 안주까지 서비스로 내왔다. 그리고는 지난번과 다름없이 환한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네며 그에게 짧은 안부만을 묻고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서로에게 익숙한 지인들만이 나눌 수 있는 공감대랄까, 두 사람에게선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우리에게 친절하고 작은 배려까지 잊지 않는 그녀였지만, 내 안에서 생겨나는 질투의 감정을 완전하게 배제할 수는 없었다.
순간 내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은 솔직한 감정이었다.
그러다가 그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물론 술을 핑계 삼았지만 왠지 속마음을 들킨 듯한 기분이었다.
시간이 좀더 지나자 카페 안 조명이 좀더 어두워지고 테이블엔 멋진 램프가 대신해서 붉을 밝혔다.
따스한 불빛이 우리를 감쌌고 그는 지난번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나 역시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말들을 했고 우리는 처음 만났던 날보다 훨씬 밝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인하, 그 사람은 4남매 중 둘째 아들이라고 했다.
부모님은 인천에 살고 계시고 그는 동업자 겸 친구와 함께 자취를 한다.
그는 현재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었다.
신춘문예에 몇 번 도전을 했다가 고배를 마시고 지금은 대학원을 다니면서 동거하는 친구와 함께 만화 스토리를 쓴다고 했다.
그림은 물론 동업자인 친구가 그린다. 자신은 그림에 소질이 없다고 했다.
그가 썼던 작품들을 들었지만 만화를 좋아하지 않는 탓에 모두 생소한 것이었다. 그래서 휴일에는 그가 작업했다는 만화들을 읽어볼 생각이다.
그와 나는 공통점도 있었다.
나도 그와 마찬가지로 딸 셋 중에 둘째다. 그가 좋아한다는 가수 로라 휘기는 나 역시 좋아한다. 우리는 둘 다 과일을 좋아하지만 똑같이 수박이랑 포도를 싫어한다. 싫어하는 이유도 같았다.
수박이나 포도는 씨를 골라내는 일이 번거로워서 잘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린 동시에 같은 이유를 말하며 아이들처럼 크게 웃었다. 사소한 부분이지만 그와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이 무척 반가웠고 기뻤다.
얼마 만큼인지 모르지만 그와 나는 처음 만났던 그날보다 훨씬 가까워진 느낌이다.
모르는 사람과의 간격이 좁혀지는 것을 전에는 두려워했었던 나였는데, 이런 변화가 놀라우면서도 즐겁다면 너무 파격적인 걸까. 
담배 냄새가 났다.
인하, 그 사람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 점은 우리 아버지랑 같았다. 지금 맡은 담배 냄새는 카페를 나와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묻은 것이다.
정류장에는 우리 외에도 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가 내뱉은 담배연기 때문에 몸에 밴 것이다. 그 남자는 술에 취했는지 벌건 얼굴을 하며 능청스럽게 히죽거렸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해서 담배연기를 뿜어댔다.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인하, 그 사람이 남자에게 가서는 정중하게 담배를 꺼달라고 부탁했다.
미처 내가 말릴 틈도 없이 그가 나섰다.
전혀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나는 새삼 놀라고 말았다. 그에겐 아직 내가 모르는 모습이 많은 듯하다.
담배를 피우던 그 남자는 얼굴을 더욱 붉히며 못마땅한 얼굴로 나와 그를 번갈아 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위기는 험악하게 돌변했었고 나는 두려운 마음에 그의 소매를 구겨질 정도로 세게 쥐었다.
결국 그 남자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끄고는 때마침 도착한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 남자가 사라지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벤치에 주저앉았고, 그가 내 안색을 살피고는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다.
그가 사과할 일도 아니었는데…….
나도 그에게 사과를 했다. 내가 너무 세게 쥐는 바람에 소매의 옷감이 눈에 띌 정도로 구겨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고 나도 그러면 괜찮은 거니까 사과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내 말에 그가 다시 한 번 먼지 같은 웃음을 지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가 짓는 표정 중에 먼지처럼 웃는 모습이 가장 좋았다. 그가 그렇게 웃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내게 묻어있는 냄새 중에 가장 뚜렷한 흔적을 갖고 있는 것은 커피 냄새다.
조금 전, 버스에서 내리고 그와 헤어지기 전에 마셨던 자판기 커피의 냄새였다.
집까지 바래다준다는 것을 만류하자, 그가 커피 정도는 함께 마실 수 있지 않느냐며 자판기에서 뽑아온 커피다.
그는 자판기 커피는 다방스타일로 마시는 것이 제일 맛있다는 말을 덧붙이며 종이컵을 내게 내밀었다.
나 역시 그의 말에 동감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그와 공통점을 또 하나 발견, 그래서인지 커피 맛이 더 좋게 느껴졌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깨를 나란히 하며 길을 걷는 동안에도, 카페에서 맥주를 마실 때도 많은 대화를 한 것 같은데, 아직도 할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친구들을 만나도 상대적으로 말이 적은 편인 나인데.
그는 나를 다른 사람으로 바뀌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늦도록 그와 대화를 나누다가, 그만 막차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그의 집은 우리 동네에서 꽤 멀었기 때문에 서둘러 보냈어야 했는데, 내 욕심이 그를 붙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테이프를 되감는 것처럼 미안하다는 말과 괜찮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그가 그 사실을 지적하며 웃었을 때, 나 역시 전염되어 따라 웃었다.
몇 분 뒤에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택시를 탔다.
그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손을 흔들었고 나 역시 움직이지 않고 택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동안은 우두커니 서 있다가 어떤 취객의 노랫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향했다.
문득 노란 불빛이 느껴졌다.
고개를 드니 눈에 익은 가로등이 보였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 집 앞을 비쳐주고 있는 나이 먹은 가로등이다.
어느새 집에 도착한 것이다.
대문 앞에는 반바지 차림의 아버지가 나와 계셨다.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1시였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전화 한다는 것이 깜빡했어요. 정말 죄송해요.”
아버지는 이런 일로 화를 내실 분은 아니다. 다만 내가 걱정되어서 나와 계셨을 것이다.
“화 많이 나셨어요?”
내 물음에 아버지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셨다.
나는 안도감을 느끼며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집으로 들어갔다.
막 대문으로 들어서던 아버지가 걸음을 멈추시고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더니 이렇게 물으셨다.
“미애야, 너 요즘 연애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