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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독특한 분위기의 실내가 나타났다.
밝게 켜 진 샹들리에, 화려한 옷들이 걸린 헹거들,
그리고 한 쪽 편에 마련된 널찍한 소파.
상현이 종업원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하자 가게 2층 계단에서 누군가 황급히 내려왔다.
“어서오세요. 좀 늦으셨네요. 연락은 받았습니다, 조비서님.”
“제가 미리 알려드린 대로 해주셔야 합니다. 차질 없이. 아시겠습니까, 유선생님?”
“염려 마세요. 미스 리, 손님 안내해 드려.”
2층에서 내려온 여자는 과장되게 부풀린 머리와
커다란 인조보석반지, 화려하게 장식된 옷 등으로 미뤄볼 때
결코 보통사람의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은 아니었다.
하연은 미스 리라고 불리운 여자를 잠시 기다리게 한 뒤에
상현에게 또박또박 물었다.
“이 곳은 어디고, 또 제가 왜 이곳에 와야 하는 건가요?
그것도 절대 말해 줄 수 없는 비밀인가요?
적어도 여기가 어딘지는 알아야 하는데요.”
“…안녕하세요, 첨 뵙겠어요. 난 유리안이라고 해요. 흔히 유선생님이라고 부르죠.”
“스타일리스트 리안 선생님 스튜디오입니다. 이제 됐습니까?”
하연의 왼쪽에 선 리안은 자신의 오렌지색 명함을 내밀고 있었고,
오른쪽에 선 상현은 하연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뚜벅뚜벅 걸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연은 오른쪽을 향해 서 있었는데 말이다.
기가 막혀서!
이젠 마구잡이로 행동해도 된다는 지시라도 있었나보다.
그런데 스타일리스트라니? 그게 뭐지?
“…나에게 명함을 이토록 오래 들게 만든 사람은 하연씨가 처음이네요.”
“아, 예. 죄, 죄송합니다. 저 근데…이 곳에서 제가 뭘 해야 할지….”
“하연씨는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요.
나머진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근데 몸이 좀 빈약하네요?
소식(小食)이 건강에 좋지만 몸매를 위해서는 적당히 먹어줘야 되요.”
엉거주춤 명함을 받고 선 하연을 빙 둘러가며 찬찬히 살펴본 리안은
손가락을 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그러자 하연 곁에 서 있던 미스 리라고 불린 여자와
위층에서 내려온 다른 한 명의 여자가 리안 선생님 곁에 가서 섰다.
도무지 뭐가 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서둘러!”
“…이 쪽으로 오세요. 예, 이쪽으로.”
리안 선생님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어시스턴트(assistant)라는 직책이 쓰여진 명찰을 달고 있는 두 명의 여자들은
하연의 양쪽 팔을 한 쪽씩 붙잡고는 실내에 마련된 방으로 이끌었다.
엄청나게 큰 거울과 뒤로 완전히 젖혀서 누울 수도 있는 의자,
그리고 푹신하게 깔린 카펫.
낯선 곳으로 끌려 온 하연은
어리둥절한 정신을 수습할 틈조차 없이 의자에 앉혀졌다.
뒤 따라 들어온 리안은 사정없이 단정하게 묶인 하연의 머리카락을 풀어 버렸다.
“이, 이게 뭐 하는 거에요?”
“…당연하잖아요. 이게 내 일인데.
편안하게 마음먹고 가만히 있어요. 내가 예쁘게 변신시켜 줄 테니까.”
긴 손톱이 볼을 스치는 느낌이 묘했다.
리안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기묘한 인테리어의 영향으로 하연은 얌전히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다.
그런 하연을 달래듯 리안은 가볍게 하연의 볼을 톡톡 쓰다듬었다.
이윽고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느낌.
굵은 빗으로 슬슬 빗어 내리는 느낌.
손으로 한꺼번에 쥐었다가 가볍게 한 번 말아서 확 풀어버리는 듯한 느낌.
이상하게 하연은 너무나 편안하고 기분 좋은 느낌에 스르르 잠이 들어 버렸다.
어느 새 잠들어서 고른 숨을 내쉬고 있는 하연을 바라보며
리안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래야지, 아가씨. 예뻐지려면 말도 잘 들어야지.
기분 좋은 꿈을 꾸면서 조금만 기다려요.”
마치 주문처럼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정말로 하연은 행복하고 달게 잤다.
온 몸에 빳빳하게 흐르던 긴장도 사라진 채 죽은 듯이 자는 동안
리안과 어시스턴트들의 손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하연의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는
눈썹이나 피부결만 조금 정리하고 다듬으면 될 정도로 타고난 피부였다.
얼마나 잤을까?
“…하연씨, 이제 됐어요. 잠에서 깨어나야 옷을 입겠죠?”
“아…! 제가…잠이 들었었나요?”
“거울을 보세요, 하연씨. 어때요? 마음에 드나요?”
하연은 거울을 향해 무심코 시선을 돌렸다가 자기도 모르게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거울 속에 있는 모습은 분명 낯설긴 했지만 하연 자신이었다.
항상 질끈 묶여 있거나 어깨 뒤에 가지런히 풀어져 있던 하연의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옆 시뇽이 들어간 쪽머리로 바뀌어 있었다.
쪽진 끄트머리에는 화려한 비녀가 꽂혀 있었으며
맨 얼굴이거나 간단한 메이크업을 즐겨하던 하연의 얼굴은
은은한 살구빛 메이크업이 완벽하게 된 상태였다.
그리고 반짝이는 미세한 펄가루가 살짝 눈주위에 뿌려져 있어서
깜빡거릴 때마다 불빛을 반사했다.
도무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어하던 하연은
손톱에 눈길이 갔다.
살구빛의 메이크업에 맞추어 손톱에도 비슷한 계통의 네일 에나멜이 칠해져 있었다.
“힘든 일을 해서 그런 지, 손에 굳은살이 많더군요. 풀어주느라 혼났어요.
손끝도 거칠어져 있고.”
리안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하연의 손은 보들보들하게 변해 있었다.
“정말이지 이건…도대체가…! 리안 아니 유선생님! 도대체 어떻게 하신 거죠?”
“…아직 안 끝났어요. 이리 와요. 완벽한 헤어, 완벽한 메이크업.
그리고 완벽한 의상까지 있어야 끝이 난 거니까.”
하연은 또 다시 어시스턴트들의 손에 이끌려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걸어가는 동안 하연은 가지런히 정리 된 발톱을 보며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생각했을 정도로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구름을 밟는 기분이 아니라 딱딱한 바닥을 밟고 있었기에
꿈을 꾸는 것은 아니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어시스턴트들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서 하연이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겼다.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 옷을 벗는 다는 것이 부끄러워서
어디론가 숨고 싶었지만 하연은 가까스로 참았다.
속옷까지 완벽하게 벗겨낸 뒤 다시 준비 된 속옷을 입혀주기 시작했다.
잔잔한 구슬과 화려한 레이스로 장식된 얄푸름한 속옷이 살결을 기분 좋게 간질였다.
마지막으로 하늘거리는 드레스가 입혀졌다.
“비켜봐. 단추는 내가 채울게.”
“예, 선생님.”
리안은 하얀 실크 장갑을 낀 채 금색 단추걸이를 이용해
하연의 등 뒤에 길게 늘어선 단추들을 하나씩 채우기 시작했다.
마치 동화책 속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
맞다, 바로 맞췄다.
그 기분이었다.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황홀함.
갈고리처럼 생긴 고리가 손잡이에 연결되어 있는 단추걸이는
소설 속에서만 봤을 뿐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이 옷에 달린 단추는 정확히 서른한 개에요.
채우는 데 시간이 좀 걸릴뿐더러 옷감이 얇아서 잘못하면 단추가 뜯어지죠.
저 아이들이 이런 건 서툴러서 내가 직접 하는 거에요.
어때요, 마음에 드나요?”
허리에서부터 단추가 하나씩 채워질수록
몸에 꼭 맞게 드레스가 조여 오는 것이 느껴졌다.
하연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숨쉬는 것조차
조심스럽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덜미 위에 구불거리며 내려온 애교머리를 살짝 젖히면서
마지막 단추를 채웠을 때, 하연의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가슴이 시원하게 파인 디자인은 하연씨의 하얀 피부를 돋보이겠지만
빈약한 몸매는 적당히 드러내 주는 게 더 나아요.
굉장하지 않나요?”
“…네. 정말이지…굉장하군요….”
머릿속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살구빛의 드레스는 하연의 동그란 어깨를 살짝 덮으며
몸매를 그대로 살려주는 디자인이었다.
소매 끝에 달린 작은 구슬로 이루어진 술들이 차라락 거리며 소리를 냈다.
단추 채우기가 끝나자 어시스턴트들이 구두를 신겨 주었는데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보던 하연은
카메라가 있었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겨우 했을 뿐이었다.
“어쩜 이렇게 꼭 맞을 수가 있죠? 너무…정말 너무 아름다워요….”
“…드레스가요, 아님 하연씨의 모습?”
“두, 둘 다요. 정말 전 태어나서…처음으로…이런 옷을 입어 봤어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요. 자, 이걸 들고 이젠 나가셔도 되요.”
하연의 손에 작은 파우치백을 들려 준 리안은 먼저 밖으로 나가 전화를 했다.
정확히 1분 뒤, 상현이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섰다.
리안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머금으며 상현에게 말했다.
“…조비서님, 지금 유리문 사이에 끼어 계시다는 거 아시나요?”
“예, 예에? 아, 예. 저, 그, 그게…저….”
“도움이 필요할 땐 언제든 찾아오세요. 이곳의 문은 항상 열려 있으니까요.
그럼 전 이만.”
볼썽사나울 만큼!
버벅 거리고 말았다!
게다가 어시스턴트들이 킥킥대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을 정도로
유리문 사이에 끼어 있던 것도 몰랐다니!
상현은 괜시리 유리문에 신경질을 벅벅 부리며 하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예쁘다는 말로 모독할 수는 없었다.
그만큼 하연은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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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에요, 이번에는 또 어딜 가는 건가요? 거기서 반나절 보낸 것도 모자란가요?”
“말했잖습니까. 오늘 하루는 저와 함께 지내셔야 한다고.”
“이번에도 데려다 놓고 나서 실토하실 셈인가요?
그 전에 미리 알려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상현은 손을 들어 백미러를 살짝 조종했다.
어떤 방향을 잡는다 해도 뒷좌석에 타고 있는 하연의 모습은 고스란히 거울에 보였다.
이렇게까지 운전에 집중이 안 되어 보긴 또 처음이었다.
뒷차를 볼라치면 하연의 모습으로 자연히 시선이 이동하게 되서
자꾸만 급브레이크를 밟게 되는 것이었다. 젠장할.
“…어차피 가시면 알게 될 걸 왜 그렇게 보채십니까?”
“어차피 가면 알게 될 건데 왜 미리 말을 안 해주는 거죠?”
“…진하연씨. 아름다운 옷을 입은 여자는 따지지 않는 겁니다.
그냥 조용히 좀 계실 수 없습니까?”
알쏭달쏭한 상현의 대꾸에 할 말이 없어진 하연은
상현이 자꾸만 급정지를 하는 게 꼭 자기가 방해한 탓으로 생각 되서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왜 자꾸만 이렇게 불안한걸까.
떨쳐지지 않는 불안감.
도무지 무슨 일이 생길지 종잡을 수 없는 상황에 하연은 초조했다.
게다가 얇고 부드러운 옷감은 하연을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저 숨만 쉬며 앉아있는 동안 목적지에 도착했다.
“…내리십시오.”
“여긴…무슨 식당이나…레스토랑 같은데요…. 여기서도 볼 일이 있는 건가요?”
하연은 입을 꾹 다물어 버린 상현을 뾰로통하게 쳐다보다가 하는 수 없이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레스토랑 내부는 적당히 넓었다.
아직 식사시간 전이라서 그런지
내부에 손님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게 이상했지만.
문득 하연의 귀를 잡아끄는 소리.
이 소리. 이 선율.
민혁이 자주 듣던 첼로의 선율이었다.
음악만 듣고도 온 몸의 세포들이 반응하는 하연.
상현은 이미 하연이 왜 그렇게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놀란 표정을 지었는지 알고 있었다.
짐짓 시치미를 떼고 꽃으로 장식된 테이블로 하연을 데리고 가서는 그곳에 앉혔다.
“…상현씨가 한 끼 대접…!”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전 이만.”
상현은 그냥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잠시 후, 테이블로 다가온 아저씨 한 분이 지배인이라면서
직접 유리잔에 물을 따라주고 갔다.
완벽하게 되어 있는 테이블 세팅, 흐르는 음악,
테이블 위에 장식된 꽃과 잘 차려입은 하연.
이 모든 것이 한 군데로 맞물리며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맞아떨어져도 너무나 잘 맞아떨어지는 듯한 느낌.
빈틈없이 이루어진 일정.
하연은 살짝 떨리는 손에 힘을 주며 물을 마셨다.
한 모금.
진정해, 하연아. 그냥 누군가를 만날 필요가 있는 거겠지.
두 모금.
아니야, 그럴 리가.
세 모금.
아무리 물을 마셔봐도 진정이 되질 않았다.
누굴까? 내가 만날 사람은?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차림으로 근사한 곳에 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막연함이 점점 형체를 갖추어 나갔다.
처음에는 뿌연 안개 속을 해매는 것 같이 희미하던 형상이
조금씩 모습을 갖추어 가다가
마침내 그 사람이 하연의 머릿속에 그려졌을 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군.
정확히 여덟 시간 하고도 이십 사 분 만에 다시 만나는 군.”
하연의 손은 이제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에 억지로 힘을 줘 봤지만
떨림은 더욱 심해질 뿐 가라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직도 하연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뒤 돌아 볼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 사람이 와 있다. 지금 이 곳에.
내 뒤에. 하연은 스스로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
“…돌아보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어. 아름답군.”
하연은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입을 딱 벌린 채 아무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팔딱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굳어버렸을 뿐이었다. 이럴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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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님들을...
기다리게 만들고, 기대하게 만들고, 감질나게 만들고, 미치게 만들고, 기절하게 만든...
미강이 왔습니다. ^^
한 주 시작은 잘 하셨나요? 하루하루 많은 분들의 흔적과 소중한 추천과
알 수 없는 분들이 읽어주신다는 기대감으로 방학을 보내고 있답니다.
아시죠? 여러 님들 덕분에 행복하다는 거요...
감사드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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