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가 넘어간다
밀린 연재글을 쓰기 위해 일부러 낮잠을 잤다
밤새 글을 쓰겠노라 다짐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글은 못 쓰고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다
연재에 대한 글을 쓰기엔 몸도 마음 상태도 미처 준비 되지 않았다
차라리 낮잠을 안 잤다면 지금쯤 깊은 잠에 빠져 있을텐데...
그렇다면 이따위 잡글은 쓰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1>
많은 여자를 만났다
천 명의 여자라고 말을 하지만 아마 더 될 것이라 생각된다
대부분 약 삼 년 정도 되는 기간 안에 만났던 사람들이다
그 시절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무언가 뻥 뚫려 있는 느낌이다
실제 있었던 일인가 싶을만큼 믿어지지도 않는다
심각한 공황기를 거쳐 방황이었음을 인식하게 되는
그러나 방황이 미처 끝나지 않은 그 시절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많은 사랑 이야기를 썼다
내가 겪었던 수 많은 일들이 포함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한번도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주진 않았다
당사자가 그 글을 읽었어도 그것이 본인이었는지 확인이 안 될 정도로...
최소한의 배려였다
글 쓰는 사람의 연인이었다는 이유로 글의 소재가 되는 경우를 피하기 위해
스쳐 지나가는 만남이었다고 해도 결코 프라이버시는 존중되어야 하기에
오늘 지금...
처음으로 한 사람을 구체적으로 형상화 해 보려고 한다...
<2>
스물 다섯, 대학에 입학했다
막 제대한 당시의 나는 성(性)적으로 엄격한 보수주의자였다
군대에서 군악대를 나온 나는 군 생활 하는 동안 동료들의 숱한 여성편력들을 봤다
(음악하는 놈들이라 여자도 많았고, 부대에 면회오면 무조건 외박이었다)
목사 아들도 많았는데 그들도 예외 없었고, 나는 제대 하면서 유일한 숫총각이었다
남녀 관계에 대한 이런저런 불신감을 갖고 있던 나는 한 여자를 어렵사니 만났다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첼로를 전공하는 스무 살의 아이었다
같이 수업 들을 일도 없을 뿐더러, 뭔가 마주칠 일 조차도 없었던 아이었는데
나만 보면 유독 공손하게 인사를 하였던 인연으로 데이트 약속까지 하게 되었었다
첫 데이트를 하면서 물었었다
"넌 왜 그렇게 내게 공손히 인사를 했었느냐?"
"저희 과 선배님인 줄 알았어요"
"설마... 내가 관현악을 전공했을 거라 생각했던 거냐? 왜 그렇게 생각했냐?"
"인상이 무서워서요... 밴드부 출신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러면... 이 데이트도 내가 무서워서 나온 거냐?"
그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서워서 데이트를 나오다니...
그러나 돌이켜 보니까 충분히 그럴만도 한 분위기였었다
# 데이트 신청하던 당시 상황
- 껄렁껄렁 음대를 걸어가던 나
- 여자 화장실에서 뭔가 후다닥 뛰어 나가다가 멈춰서는 소리가 들리고
- 당황하면서, 그러나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는 녀석
"안녕하세요"
"오냐"
- 인사하고 괜히 눈 마주치니까 우뚝 자리에 서서 멈춘 녀석
- 뭔가 어색한 분위기에서 덕담 한 마디 해야할 것 같은 책임감이 든 나
"그래. 오늘은 혼자 있구나"
"네..."
"맨날 같이 다니던 친구들은 어디 갔냐?"
"연습실에 있어요"
"그래... (분위기상 뭔가 한 마디 해야 되는...) 위험하니까 혼자 다니지 마라"
"네..."
- 라고 말을 했지만 음대 안에서 대낮에 위험한 일은 전혀 없는 것일텐데
- 뭔가 크고 중요한 깨우침을 받았다는 듯 긍정적인 눈으로 날 보는 녀석
"그래... 오늘은 연습하고 뭐 하냐?"
"아무것도 없는데요"
"그래... 음... 그러면 영화 보러 가자"
"네"
뭔가 이상하고 부자연스러운 상황에서 우린 이렇게 첫 데이트를 하게 되었었다
<3>
당시 나는 스물 다섯이었고 녀석은 스무 살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섯 살 차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지금은 서른 두 살이면서도 스물 한 두 살 아무렇지도 않게 만나지만)
당시엔 학교적으로도 상당히 큰 도적놈으로 애들 사이에서 불리웠었다
가뜩하나 인상도 안 좋고 덩치도 좋은 내가
작고 아담하고 착하기로 소문난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터라서
그 애 친구들은 물론 잘 모르는 사람도 우리 모습을 보면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그러나 겉으로 봐서는 진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처음 아기 같다고 생각했던 녀석은 실제로는 세 딸의 장녀로써
어려서부터 어른스러움에 대해 많은 교육을 받았기에 상당히 애 늙은이 같았고
나는 장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하는 수준이 아이들이라서 무척 유치했었다
또, 그녀는 특유의 경상도 사람처럼 아주 무뚝뚝해서 애교가 하나도 없었고
난 생긴 것하고는 틀리게 감성이 아주 풍부한 사람이었다
# 상황
- 과 친구 둘이 걸어가다가 벤치에 앉아 있는 우리 둘을 본다
- 내가 흥분해서 씩씩거리는 모습 눈에 들어오고
- 그 아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 눈에 들어온다
- 내가 그 아이의 목을 잡고 조르는 모습 들어오고
- 그 아이는 눈을 찔끔 감고 몸부림을 친다
- 내가 고함을 지르면서 마구 분통을 터트린다
- 그네들은 이 상황을 보면서 이렇게 탄식한다
"아주 애를 잡네 잡어"
"저렇게 나약한 애한테 윽박지르고 괴롭히고..."
"처음부터 저럴 줄 알았지. 정말 불쌍해 죽겠어..."
이런 상황이 한 두 번이 아니라는 듯 혀를 쯧쯧 차고 가지만
실제는 많이 틀리다
# 실제 상황
나 : 뽀뽀 해 줘!
그 : 미쳤어! 벌건 대낮에 왜 이래
나 : 키스도 아니고 뽀뽀인데 왜 그래. 한 번만 해 줘라
그 : 안 돼. 애들 봐
나 : 아유 진짜 완전히 속았다니까. 무드도 완전 없고 애교도 없고 진짜 못 살어!
그 : 억울해도 할 수 없어. 원래 이렇게 생겨 먹은 걸 어쩌라구
나 : (이 때부터 그 아이들이 본다. 난 화가 나서 씩씩거리고) 뽀뽀 안 해주면 덮쳐 버린다!
그 : 미쳤어! (고개를 숙이면서) 남들 들어. 조용히 좀 해
나 : 들으라면 들으라지! (몸으로 파고 들면서) 덮친다! 뽀뽀하고 가슴 만진다!
그 : (눈 찔끔 감고 몸부림치며 날 밀어내고는) 아유 왜 짐승처럼 그래!
나 : (분통 터트리며) 아유 진짜루! 한 번만 하자니깐!
<4>
사실...
이 밤에 센치해진 이유로 슬프고도 가슴 아팠던 그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는데
막상 쓰다 보니 즐거웠던 시절에 대한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즐거운 시절이 떠오르다 보니 슬픈 기억으로 바로 넘어가기도 쉽지 않다...
분명히... 슬픈 이야기인데...
그 슬픔으로 인해 나의 방황이 시작되었는데...
슬픈 추억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는 줄 알지만...
이왕 떠오른 즐거움에 대한 추억에 대해 하나만 더 얘기해도 될런지..
<5>
수업 듣는 시간 빼고 거의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와 함께 보냈다
당시 기숙사에 있던 나는 자취를 하던 녀석의 집으로 매일 출근을 했다
집 청소는 물론 설거지, 빨래 등을 못 해서 안달이었고
녀석이 들고 다니던 첼로도 항상 내 몫이 되었었다
(첼로케이스보다 작은 녀석이 첼로를 끌고 다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녀석은 생리통이 무척 심했다
시작되는 첫 날엔 허리가 끊어지는 듯 일어서지도 못했다
근데도 악착같이 진통제를 먹지 않았다
그날도 느닷없이 생리가 시작되었던 날인가 보다
녀석이 침대에서 일어나지를 못 하고 진땀만 흘리고 있었다
"왜 그래? 어디 아픈데?"
"아냐... 아픈 데 없어..."
솔직히, 난 녀석이 생리통 때문에 거의 죽어 가는 걸 잘 알고 있다
근데, 녀석은 나에게 절대 그런 쪽에 대해선 말도 하지 않는다
이 엄청난 고집쟁이는 부끄럼도 수줍음도 엄청나게 많기 때문이다
난 자신의 치부를 보여주지 못하는 녀석에게 꽤나 서움함이 있었었다
"너 정말 사람 서운하게 만든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 줘야 할 거 아니냐"
"......"
"내가 너 왜 아픈지 모를 거 같냐?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지 나한테도 숨기냐"
"숨기고 싶어... 오빠한테는 숨기고 싶다구..."
"왜 나한테 숨기고 싶은데! 말 하라고! 이래서 아프다고! 저래서 아프다고!"
"오빠는 몰라..."
"웃기지 마... 너야말로 내 맘 모른다... 너가 내 맘 알면 이래선 안 된다..."
그 때 당시...
그 아이는 침대에서 육체적 고통에 신음하며 힘들어 했고
난 의자에 앉아서 정신적 고통에 힘들어 했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을까...
"오빠..."
"왜"
"내 부탁 하나만 들어 줘..."
"뭔데"
녀석은 내 눈도 쳐다보지 못하면서 부끄럽다는 듯 조용히 말을 이었다
"슈퍼에 가서... 생리대 좀 사다 줘..."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너무나 기뻐서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녀석은 내게 자신의 가장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었고
한 발 더 나아가 내게 부탁까지 하였던 것이었다
다른 여자 같았으면 이런 것이 치부가 되지 않았을지 모르겠지만
이제까지 보아 오던 그 아이로써는 정말 파격적인 모습이었음이 분명했다
물론, 나는 그 심부름에 실패를 하고 말았다
생리대라는 게 아무나 사는 게 아니었다
그냥 슈퍼 가서 생리대 주세요 한 다음에 들고 오면 되는 줄 알았는데
뭔가 복잡한 것 (오버 나이트인가 하는 그런 용어들) 이 많아서
난 그녀에게 다시 물어보려고 자취집으로 빈손으로 돌아갔고
그녀는 내가 슈퍼에 간 사이에 벌써 '일처리'를 끝내고 있었다
그녀는 집에 생리대가 있었음에도 날 배려하기 위해 생리대 심부름을 시킨 거였다
(생리대 심부름이 배려라는 게 믿을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날 이후
난 그 아이의 속옷도 한 번 정도인가 빨래할 수 있던 기회가 주어졌던 거 같고
더 이상 서로에게 성의 구분으로 인한 부끄러움은 없어지게 되었던 거 같다
<6>
그러나...
지금은 그녀와 더 이상 연락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에겐 나와의 만남이 아주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뭣도 모르고 무작정 집착만 하였던 어설픈 그 시절...
지금이라면 정말 후회없이 멋지게 사랑할 수 있었을텐데...
슬프고 힘든 시절에 대한 고해성사로 채우려고 한 이 지면을...
오히려 아름다운 추억으로 채운 것이 차라리 다행인것인지 모르겠으나...
벌써 시각은 다섯 시 반이 지났고 동은 터올랐다...
이 밤에 처음으로 내 방황의 시작이었던 추억을 타인 앞에 끄집어 내려 했으나...
결국 꺼내지 못하고 다시 마음 속으로 가지고 들어간다
내가 쏟아내는, 쏟아낼 엄청난 이야기들...
독자들이 읽고 있는 이 수많은 사연들의 시작인...
그 원죄이자 시발점인 사연을 또 다시 언제 말하고 싶어질 때가 올 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평생 다시 그녀를 보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를 설사 만난다 해도 더 이상 해 줄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다고 해도...
난 앞으로 쓰는 글에서 내 지난날의 아픔과 방황과 추억들을
사랑을 테마로 살아 갈 모든 이들에게 좋은 것으로 환원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신에게 받은 숙명이었음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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