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마계건국기 1부-6편 : 버서커

Alone |2004.08.04 13:49
조회 184 |추천 0

 



왕궁의 문장을 꺼내보이자 경비병이 루씨를 한번 훑어보더니 문을 열어주었다.
흔적을 쫓아 여기까지 힘들 게 찾아온 루씨가 반가운 마음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성문 안으로 들어서는데 일단의 병사들이 그를 에워쌌다.
동카스의 명에 따라 왕궁 기사단을 단 한명도 살려서 돌려 보내지 않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싸울 마음이 없는 루씨는 가볍게 틈을 보아 이들을 빠져나왔다.
무턱대고 달려드는 병사들을 보고 성안에서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한 루씨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가 눈앞이 아찔해졌다.

인간이 아닌 그의 눈은 아주 멀리까지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저 멀리 탑루쪽 성벽 끝에 아이리스님이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자정을 넘어 연회장의 혈투는 벌써 반시각 가까이 진행되었다.

동카스는 힘이 부침을 느꼈다.
벌써 육십여합을 겨뤘으나 상대는 지치기는커녕 점점 더 힘이 넘친다. 알 수 없는 검은 기류가 그롬웰의 주위에서 오오라처럼 피어올랐다.
동카스의 마법의 망치는 지난 세월 폴크스겐의 대륙 통일 전쟁에서 수많은 야만의 무리들을 물리쳤던 엄청난 무기였음이 틀림없으나 오늘은 왠지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동카스 등은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분명히 수적인 우세는 훨씬 앞서있었으나 그롬웰의 왕궁 기사단의 전투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병사와 기사의 무리가 서로 엎치락 뒤치락 하는 가운데 병사 한명이 기사의 옆구리에 검을 박아넣었다.

'우욱~!'

고개를 숙인 채 비명을 지르던 기사는 병사들이 이내 달려들려 하자 갑자기 고개를 바짝 쳐들더니 마치 사나운 야수처럼 으르렁댄다.
그가 곧 옆구리에 박힌 검에 손을 가져가더니 '쑤~욱~!' 뽑아냈다.

그가 알아 들을 수 없는 소리로 기합을 넣자 온몸의 뼈가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내며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감히 그의 눈을 보니 온통 시뻘겋게 피로 가득찬 형국이다.
병사들이 대경실색하여 한발자욱씩 뒤로 물러났다.

"버...버서커다~!"

나이가 지긋한 어느 병사가 당황하여 절규하듯 소리쳤다.

기사가 양손에 검을 들고 한번 휘두르니 주위의 병사 수십명이 나가 떨어졌다.


버서커 주문은 과거 대륙 통일 전쟁에서 딱 한 번 쓰인 적이 있었다. 이 마법에 걸린 병사들은 망아 상태의 야성의 광폭한 힘을 가진 광전사가 되어 공포심을 잃고 오로지 살육만을 생각하는 잔인함의 화신이 된다.
이들 버서커들은 통일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그 결과가 너무도 참혹하여 정복왕 폴크스겐의 명령에 따라 해당 마법은 봉인되고 버서커화된 병사들도 모두 비밀리에 죽임을 당했다.
이 병사는 그것을 기억해낸 것이다.

이 소리를 들은 동카스도 연회장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가 판단하기에도 상황은 충분히 그러한 듯 했다.
왕궁 기사단원들은 모두 보통 사람의 두 배 가까이 몸이 부풀어 오르고 눈동자가 새빨간 상태였다. 전형적인 버서커 상태이다.
누군가가 금지된 마법을 이들에게 실행한 것이 틀림없었다.
동카스는 그것이 누구인지 의구심이 불타 올랐으나 상황은 그런 생각을 가질 만한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이미 병사들은 싸울 의지를 잃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감히 버서커들을 상대로 어떻게 싸울지 감이 오지 않는 것이다.
동카스가 소리쳤다.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신성한 성령의 보살핌이 우리를 지켜주리니~!"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아스가르드 왕국이 건립되고 폴크스겐은 국가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표방하는 기독교를 국교로 삼아 널리 전파하도록 하였다. 이후 폴크스겐의 의도대로 국민의 대다수가 기독교로 개신하고 충성스런 아스가르드 왕국의 백성들로 거듭나게 되었다.
낭랑하게 읊조리는 동카스의 기도 소리에 병사들은 다시금 용기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롬웰도 왕궁 기사단원으로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하지만 이때 기도 소리로 인한 고통은 그의 머릿속을 후벼 파내는 듯 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어제 낮, 그롬웰은 베란두르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거의 생사가 불투명한 상태였다. 그런데 홀연히 숲속에서 나타난 늙은 수도승에 극진한 간호 덕분에 이렇게까지 기력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수도승의 이름은 도마라 하였는데 그롬웰에게 성수를 이용한 치료로 원기를 되찾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기사단원들에게도 기꺼이 손수 만든 음식과 술을 만들어 대접해주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몰랐으나 이제 그롬웰의 왕궁 기사들은 자신들의 몸이 그때 이미 뭔가 변화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었다.
예전에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짜릿함과 흥분이 온 몸을 간지르고 있다.
그들은 오늘 여기서 이렇게 전투를 벌이면서 그것이 단 하나 '피에 대한 갈망'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도마라는 작자가 무엇을 하는 늙은이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평범한 수도승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동카스와 수십합을 겨루면서 점점 그롬웰은 온몸이 형언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로 달아올랐다. 그의 정신은 이미 성안을 떠나 공중을 활활 날고 있는 듯 했다. 세상 모든 것이 조그맣게 보인다.
이런 난쟁이 정도는 정말 한 주먹거리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한 주먹거리도 안되는 녀석이 기도문을 쫑알쫑알 대는 탓에 그는 머릿속이 아파 죽겠는 것이다.

사나운 맹수가 먹잇감의 목덜미를 물어 채듯 그롬웰의 검이 동카스의 망치를 덮쳐 들어가자 엄청난 기세에 땅딸막한 동카스는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검과 망치가 뒤얽힌채 쓰러진 두 사람이 서로의 눈을 노려보았다.
눈동자도 없이 온 안구가 시뻘건 피로 가득찬 그롬웰의 두 눈은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어 동카스는 간담이 서늘해졌지만 짧은 다리로 그의 명치를 걷어차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입 닥쳐~!"

고함을 내지르며 그롬웰은 한손을 검에서 떼어 동카스의 면상을 주먹으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입술이 터지고 동카스의 망치를 잡은 손에 힘이 점점 빠진다. 당연히 기도 소리는 잦아 들었다.

"...아..아버지시여~!"

정신이 혼미해지는  가운데 동카스는 힘들 게 기도문을 외고 있었다. 자신의 부하들에게 용기를 붇돋아주기 위해서였다.
그롬웰이 검이 망치를 압박하며 점점 동카스의 목젖으로 베어들어간다.

아이리스가 나지막히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도문 소리를 듣고 있다가 갑자기 한마디 내뱉았다.

"아..아버지.."

피와 살점이 튀는 아수라장에서 이때까지 내내 망연자실한 초점 없는 눈으로 바닥만 쳐다보던 아이리스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눈빛을 반짝이며 갑자기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공격에 맞서며 아이리스를 잡고 있던 기사 녀석도 워낙 창졸간의 일이라 그녀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동카스의 목을 베려던 그롬웰이 이를 보고는 벌떡 일어나 바닥에 쓰러져 있던 동카스를 발로 뻥 차 버리고는 아이리스를 따라 연회장 밖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리스는 탑루쪽으로 달렸다. 아까 저녁때 동카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휘엉청 밝은 달을 감상하던 곳이다.
탑루에 다다르자 아이리스는 성벽위로 올라섰다.

주마등처럼 과거의 일들이 눈앞으로 지나가다 한 곳에 머무른다.
지하보도를 통해 성 밖으로 피신하던 중 아이리스 일행은 무시무시한 기사를 만난다. 아무래도 왕궁 기사들 중 한명인 듯 싶다.
그 무시무시한 기사는 동카스의 부하들을 차례차례 난도질했다.
머리와 몸통과 팔다리가 여기저기 굴렀다.
바닥에 고인 붉은 피들이 머릿속에 선명하다.
아버지 레오르도가 검을 뽑는다.
피를 뒤집어쓴 기사와 몇합 겨루지만 상대가 되지 않는다. 기사의 검이 레오르도를 관통하고 저쪽으로 던져졌다.
아이리스는 정신을 잃었다.

"꺄악~!"

참혹한 광경에 아이리스는 잠깐 비명을 내질렀다. 눈에 뺨에 코에 눈물이 뒤범벅이 되었다. 한손을 들어 스윽 눈물 범벅을 닦아내며 아이리스가 혼잣말을 한다.

'모든 게 나 때문이었어. 그래 내가 죽으면 돼. 모두 다 해결되는 거야~!'

깍아지른 듯한 성벽 아래를 한번 쳐다보자 현기증이 일어났다. 아이리스는 고개를 들어 다시 밝은 달을 한번 쳐다보고는 눈을 감고 되뇌었다.

'아버지, 어머니, 제가 가요'

그리고는 곧장 앞으로 몸을 뉘었다.


순간 그롬웰의 우악스런 손이 아이리스의 갸냘픈 뒷목을 잡아챘다. 아이리스의 머리칼이 그롬웰의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왔다.
성벽 아래로 떨어지려던 아이리스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리자 그롬웰이 손목을 찬찬히 안쪽으로 돌려 아이리스의 옆얼굴이 보이자 그롬웰이 잠시 그녀를 뚫어지라 쳐다보다가 입을 뗀다.

"죽고 싶은 게냐?"

아이리스는 대답 대신 눈물만 주렁주렁 흘리고 있었다.

그롬웰의 머리속에 혼란이 가득찼다. 필시 그의 원래 목적은 아름다운 처녀들을 모아 수도 바이자르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베란두르에서의 여러 일을 겪은 후 괴이한 수도승과의 만남은 그를 이전의 그가 아니게 했다.
왕국의 기사라는 정체성에 앞서 보다 원초적인 피의 갈망이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리스의 눈물을 보면서 보통 남자라면 측은함과 보호 본능으로 그녀를 감싸 주었으련만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살육에 대한 쾌감과 그것을 추구함에 대한 두려움으로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이렇듯 아리땁고 처량한, 지금 눈물이 그렁그렁한 이 아가씨를 저 깊디 깊은 까마득한 성벽 아래 골짜기로 던져버린다면 아마도 더욱 즐거우리라~! '

이런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베란두르에서의 일은 모두 이 계집 때문이 아닌가 말이다.
잠시후 그롬웰이 다시금 재수없는 미소를 씨~익!하고 짓더니만 아이리스에게 말했다.

"...죽고 싶다면 ....죽어라~!"

이 순간 이제 그는 더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그롬웰이 손을 놓자 아이리스가 성벽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아이리스의 눈 위에 밝은 달과 함께 성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며 잇몸을 드러내놓고 활짝 미소 짓고 있는 그롬웰의 얼굴이 비추었다.
밤이라서 그런지 그의 하얀 이빨이 더욱 드러났다. 그의 새빨간 눈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했다.

그녀의 눈물이 허공에 흩뿌려진다.


(계속)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