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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nd] #21 화성에서 온 왕자님

wagi |2004.08.05 12:15
조회 1,251 |추천 0

 

21. 세진을 팔아넘기다


“수혈이 급합니다.”

 

“하지만 유진님께 수혈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유전자를 지닌 지도자 일가뿐입니다.

화성인의 피는 유전자타입까지 세분되어 있으니까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지도자 일가는 모두 군부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큰일이군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지구에 있는 화성인들 모두 혈액 검사를 해 봅시다.

어느 정도 일치하면 조금 위험부담이 있더라도 쓰는 수밖에요.”

 

소근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윤은 벌떡 일어났다.

 

“유진아!”

 

“아, 깨어났군요.”

 

“유진이는요?”

 

“지금은 안정해야 합니다. 아가씨도 그다지 상태가 좋지 않아요.

약해진 몸에는 벌의 독이라도 꽤 위험한 겁니다.

그 링거 다 맞을 때까지는 움직이지 말아요.

음, 자고 나니 안색은 훨씬 낫군요.”

 

“유진이 어디 있냐고요!”

 

“다 맞고 나면 가르쳐 드리죠.”

 

“지금 보게 해 줘요. 내 눈으로 봐야해. 제발이요...”

 

윤의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본 관장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윤의 링거를 들고 나가 맞은 편의 문을 열어주었다.

 

“여깁니다.”

 

윤은 정신없이 유진에게로 달려갔다.

관장은 한숨을 쉬더니 링거를 침대 옆에 걸어주고 나가버렸다.

 

“유진아...”

 

머리를 붕대로 둘둘 말아놓은 유진은 밀납으로 만든 인형같았다.

핏기라고는 하나도 없이 창백하기만 한 유진의 모습에 윤은 충격을 받았다.

 

“정신차려... 유진아... 내 말 듣고 있어? 이렇게는 안 돼.

나 아직 못한 말도 많고 너한테 들어야 할 것도 많아.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이런 거 너랑은 안 어울려. 그러니까 제발 눈 좀 떠 봐... 응?”

 

끝내 윤은 유진의 손을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근 하루를 소리도 없이 그저 눈물만을 줄줄 흘리는 윤의 모습에

MIB의 직원들은 볼 때마다 혀를 찼다.

미동도 없이 눈물만 흘리다가도 유진과 떼어놓으려고만 하면 무섭게 날뛰었다.

누워있는 유진보다도 윤이 먼저 넘어갈 것 같아 사람들은 조바심을 냈다.

 

 

**



“혈액 감정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래?”

 

지난은 급히 보고서를 받아들었다.

 

“일치하는 자가 있다고? 그게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유진님과 같이 지구로 보내진 세진이라는 자가

지도자 일가와 일치하는 유전자 타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뭐야? 그런 일이... 그런데 어째서 그의 소임은 보좌관인가?”

 

“그걸 알 수가 없습니다.”

 

“데려왔나?”

 

“지금 수혈실에 있을 겁니다.”

 

“좀 알아보고 넘어가야 할 문제군.”

 

 


*******************************

 

 


끔찍한 두통을 느끼며 눈을 뜬 유진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돌아누우려 했지만 머리가 움직이지를 않았다. 그뿐 아니라 손도 무언가에 잡혀 있었다.

 

“윤아?”

 

유진의 손을 꼭 붙들고 침대아래에 기대자는 것은 분명히 윤이다.

얼굴은 온통 눈물자국이고 형편없이 야위어 광대뼈가 도드라졌다.

 

“이게 무슨... 아!”

 

그래, 그때 윤을 잡아 올린 대신 유진의 몸이 떨어져 내렸었다.

그래도 윤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던가.

 

“윤아...”

 

꿈틀, 윤의 머리가 움직이더니 눈을 뜨자마자 침대 위를 올려다보다.

그러다 눈이 마주친 순간 윤의 얼굴에 또 눈물이 길을 만들었다.

 

“유진아... 깨어났구나... 유진아...”

 

“왜 울고 그래. 바보같이...”

 

품안에 안겨 오는 윤의 몸은 그새 많이 상해 있었다.

유진은 시큰하게 시린 콧날을 감추며 윤의 몸을 더욱 깊게 끌어안았다.

 

“얼굴이 이게 뭐야... 완전히 반쪽이네. 몸도 많이 축났어. 뼈 부딪힌다.”

 

“치, 그러는 너는. 남말 할 거 없어...

하긴... 피를 그렇게나 쏱았는데... 흑... 그 피를 쏟고... 그렇게 많이...”

 

“울지 마. 이제 괜찮아. 쉿, 괜찮다니까.”

 

윤은 유진을 안으며 안도했다.

잃어버리는 줄 알았다. 다시는 유진이 눈을 뜨지 않을 줄 알았다.

얼마나 무섭고 슬펐던가.

그제서야 윤은 자신의 마음 밑바닥에 있는 얼굴을 찾아낸 것이다.

세진이 말한 대로였다.

 

“이대로 안 깨는 줄 알았어. 다시는 눈을 못 뜰까봐... 내가 얼마나...”

 

“눈 떴어. 지금 너 보고 있잖아. 이제 다 지난 일이야. 울지 마. 왜 계속 울어?”

 

똑똑. 노크소리에 윤이 급히 일어나 눈물을 닦았다.

 

“아아, 일어나셨군요.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관장... 그럼 여기는...”

 

“네, 허둥지둥 이리로 모셔왔더군요. 아가씨는 또 울고 있네요.

이러다가 몸 속에 수분이 다 빠져나갈지도 몰라요.”

 

“나, 좀 씻고 올께.”

 

윤이 급히 병실을 나갔다.

퉁퉁 부은 데다 눈물자국으로 얼룩진 얼굴을 보이기가 민망했던 것이다.

윤이 나가자 관장이 싱긋 웃었다.

 

“좋은 아가씨예요. 여자 보는 눈이 있던데요.”

 

“좋다는 말로는 부족하지. 내게는 최고니까.”

 

“자, 그런 점에서 일단 다행이라고 해둘까요.”

 

“무슨 뜻이오?”

 

“전멸한 줄 알았던 화성의 지도자 일가, 지도자 유전자 보유자가 나타났습니다.”

 

“그게 무슨? 분명히 모두 죽었다고 들었는데?”

 

“그리고 놀랍게도 그 장본인은 세진님이랍니다.”

 

“뭐라고? 세진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네, 그래서 화성에서도 난리가 났지요.

알아본 결과 어찌 된 건가 하면

세진님이 전대 지도자 대에 마지막으로 발탁된 후보였던 겁니다.

문제는 지도자께서 즉위하는 날 태어났다는 거지요.

전대로 넣느냐 후대로 넣느냐 의견이 분분하다가

사태가 복잡해질 것을 우려한 원로회에서는 그냥 지구행으로 결정,

우주비행이 가능한 3살이 되자마자 지구로 파견해 버렸다더군요.”

 

“그런 일이... 세진은 알고 있었다는 건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유진님에게 수혈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발로 찾아왔으니까요.”

 

“형이 아니라 삼촌이었던 건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서열로 보자면 세진님이 우선이라고 판단한 원로회,

그러니까 임시통치기구에서는 세진님을 화성으로 귀환시키기로 합니다.

뭐, 유진님을 포기한 거죠, 사실상.

그런데 이 세진님마저 지구에서 살겠다는 답신을 보내고 행방불명입니다.

화성의 사절은 이제 세진님을 찾아다니고 있죠.”

 

“생각도 못한 방향으로 일이 풀려가는군.”

 

 


*************************

 

 


“세진을 찾았나?”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의 대답에 유진이 조금 웃었다.

 

“그럴 테지. 세진이라면 흔적 따위 남기지 않을 거야.”

 

“메쉬 장로께서 유진님께 여쭤보라고 하시더군요.”

 

“내가 세진을 팔 것 같은가?”

 

“전언이 있습니다. 두 분 중 누구라도 상관없으니까, 라고...”

 

“그 늙은이!”

 

유진은 이를 갈았다. 아직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이 불리한 것은 자명한 사실.

메쉬는 유진에게 세진을 찾으라고 말한 거나 다름없었다.

 

“사실은 날 포기한 주제에, 교활하기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화성을 버리면서까지 지구를 택하는 데에 이유라도 있습니까?

유진님도 세진님도 어째서 지구에서 살고 싶다 하시는지요?”

 

“글쎄... 어쩌면 나나 세진이나 화성보다는 지구를 모성으로 생각하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두 분의 모성은 분명히 화성입니다.”

 

“생각해봐. 나는 8살 때, 세진은 무려 3살 때야.

나에게 남은 화성의 기억은 한 웅큼도 안 돼. 세진에게는 아예 화성의 기억이 없지.

그런데 화성을 모성으로 생각할 턱이 있나.

내 모든 추억과 생활은 지구였고 세진 또한 그렇겠지.

애초에 지구에 내다 버리고 필요해지니까 찾는 화성이 이기적인 거야.”

 

“그래도 지도자의 혈족은 이제 두 분 뿐입니다. 화성에는 지도자가 꼭 필요합니다.”

 

“그것도 웃기는 말이지. 지도자야 또 태어나게 마련 아닌가.

당대가 아니면 다음 대에는 태어나겠지.

그때까지 원로원이 섭정이라도 하면 될 것을.”

 

“그 말씀은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화성은 엄격하게 권력을 분리하고 있습니다.

원로원이 정치에 간섭하기 시작하면 기본적인 질서가 무너집니다.”

 

“하지만 지금 원로원은 통치하고 있잖아.

이름하고 사람 조금만 바꾼다고 본질이 달라지진 않아.”

 

“지도자께서 책봉되는 날 원로원은 통치기구에서 완전히 손을 떼야 합니다.”

 

“결론은 기어이 나 아니면 세진이 화성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군.”

 

“물론입니다.”

 

유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군. 세진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역시 혼자몸이 가는 편이 낫겠지. 세진한테는 죽을 때까지 비밀이야.”

 

“명령 받들겠습니다.”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손목시계를 푼 유진은 그것을 어리둥절한 지난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뭡니까?”

 

“세진의 위치추적장치. 에이피가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으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

 


유진에게서 세진의 추적장치를 받은 화성인들은 신이 나서 세진을 찾으러 나갔다.

유진은 조금 마음이 무거운 것을 애써 달래며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거기 가면 왕이잖아.”

 

“무슨 소리야?”

 

“아니야, 아무 것도.”

 

“의사선생님이 그러시는데 너 이제 집에 가도 된대.

그렇게 많이 다쳤었는데 신기하게 빨리 낫는다. 다행이야.”

 

‘화성의 의학은 지구보다 몇 백년은 빠르다니까.’

 

“집에 가면 나랑 데이트할 거지?”

 

“데, 데, 데이트라니...”

 

“왜 이래, 나 다 들었어. 나한테 일어나기만 하면 뭐든 다 해준다고 그랬잖아.”

 

“헉, 너 귀신이냐? 그걸 어떻게...”

 

“진짜였네. 자, 결정한 거야.”

 

“뭐야! 너 찍은 거지? 그렇지? 무효야!”

 

“그런 게 어딨어. 너 나한테 사랑한다고도 했잖아.

벌써 다 들켰는데 뭐 빼고 그러시나.”

 

“웃기지 마! 좋아한다고는 했어도 사랑한다고는... 헉!”

 

“그렇다니까.”

 

시원스런 유진의 웃음소리에 이어 들려온 것은 비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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