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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적절한 남자(29)

리드미온 |2004.08.09 01:31
조회 4,647 |추천 0

집에 돌아와서 문을 열었을 때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역시 불을 켜고 나갔나 싶어서 다음부턴 잘 챙겨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화장실 문이 열리더니 현수가 나왔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앗, 죄송해요. 내일 면접보려고 보니 제가 보던 중국어 사전을 두고 갔더라고요. 비밀 번호 바꾸셨는지 알았는데 그대로라서..."

"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들어왔네요. 방금 화장실만 쓰고 가려던 참이었어요."

"네..."

"민아씨?"

"네?"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보여요?"

당연한 일이다. 지금 기운이 있다면 그건 로보트이거나 신일 것이다.

"맥주 한 잔 하실래요?"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물었다. 현수가 돌아가도 나 혼자 맥주를 마실 예정이었다. 현수 정도면 이럴 때 술친구 정도는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다른 때라면 민석에게 전화를 해서 하소연을 했겠지만 왠지 요샌 민석은 멀게만 느껴졌다.

"그래요."

현수는 그렇게 대답을 하고 냉장고문을 열었다.

"이런, 맥주가 없어요. 제가 편의점에 다녀올게요."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웠다. 현수가 없었다면 혼자서 언덕 아래 편의점까지 내려 갔다 와야했다.

어쩌면 혼자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 하는, 내가 동경하던 독립 생활의 또 다른 이면일지도 몰랐다.

현수를 기다리는 동안 샤워를 하고 빨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일상 생활을 해야 하니까...세탁기 옆에 놓인 레종 사료 그릇이 보였다. 레종의 유품인 셈이었다.

현수도 나도 그걸 버릴 생각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나도 정훈과 냉정하게 헤어졌지만 정훈과의 추억을 한꺼번에 버리고 오진 못했다. 언제까지 정훈의 기억을 안고 살아야 하나...며칠 전 미사리에서 보냈던 밤도 아직은 좋은 추억이기만 했다. 사랑을 한 순간에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찾아가서 그 방법을 배우고 싶었다.

현수는 맥주와 안주 거리를 사들고 돌아왔다.

"저녁은 먹었어요?"

현수가 묻는 말에 아까 일마레에서 스파게티를 몇 젓가락 뜨다 말았다는 생각이 났다.

"네. 조금요."

"먹기 싫을 땐 안먹는 것도 좋아요. 저 그럴 때가 있었었요. 애인하고 헤어지고 밥맛이 통 없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밥먹었냐, 밥은 먹어라...그런 소리 굉장히 많이 들었죠. 근데 나도 너처럼 입맛이 통 없었다 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없더라고요. 밥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한번도 실연을 해본 사람같지 않아서 괜히 위화감만 느껴지더라고요. 심리적으로 위가 거부하는 건데 그걸 무시하고 위만 채워주면 병이 낫나요?"

현수는 맥주를 나에게 내밀며 말했다.

"먹고 싶은 만큼 드세요. 집이잖아요. 취하면 그냥 자면 돼요. 저도 때 되면 집에 돌아갈게요."

현수에게 받은 맥주를 한모금 마셨다. 역시 이럴 때 밥을 먹는 것보단 맥주를 마시는 일이 좀 위안이 되는 듯했다.

"실연이라는 게 점점 견디기 힘든 것 같아요. 삼년 전의 실연도 지독하다 생각했는데 다신 누군가와 헤어져도 이만큼 아프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전보다 더 아픈 것 같아요."

나이들수록 자신의 솔직한 이야기를 할 기회는 줄어든다. 그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옷을 입고 어울리는 일을 하고 어울리는 얘기를 한다. 그곳에 자기만의 이야기는 할 틈이 없었다. 자신만의 이야기는 계속 계속 가슴 속에 묻어 둘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 만큼은 솔직하게 내 얘기를 하고 싶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어렸을 땐 이별이 두려워 사랑하지 못한다, 이런 말 이해 못했거든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 말하고 그 후는 나중에 생각하는 거라고 생각했죠. 근데 전 요새 이별이 두려워요. 어떤 사람을 만나도 나중에 이별하지 않을까 미리 걱정하게 되죠. 그래서 부모님 때문에 선을 보러 나가도 그냥 그 시간만 채우고 나왔죠."

정훈을 다시 만났을 때 난 이별은 생각하지 못했다. 다시 온 사랑이니 이번에는 영원한 인연이 있으리라 막연히 생각했었다.

"전에 첫사랑이 돌아왔다고 했죠? 정말 부러웠어요. 그리고 그 남자가 용기 있다 생각했죠. 난 그렇게 하고 싶어도 용기가 없어요. 그 여자가 결혼했을 수도 있고 또 다시 만나면 날 그 때처럼 사랑해줄까 자신도 없고요."

어쩌면 정훈은 부인과 제대로 된 사랑을 하지 못해 용기를 얻었을 수도 있다. 자신이 생각한 결혼 생활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 나를 떠올렸을지 모르고 또 나라면 자신의 현재와 다르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 사람 결혼했대요."

"그랬군요."

"차라리 말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부인이 전화했더라고요."

"최악이군요."

"네..."

"그래도 말이죠...제가 주제 넘은 얘기지만 두 분이 정말 사랑하다면 상의해서 뭔가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요?"

현수는 민석과 비슷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사랑한다면 절대로 어떤 상황이든 포기해선 안된다고 말하는 걸까...

"모르겠어요. 그냥 저보단 그 부인이 불쌍했어요. 임신도 했다고 하더라고요. 내 이기심을 찾자고 한 여자를 힘들게 하는 건 옳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정훈에게 말한대로 정훈이 부인과 확실히 정리하고 나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놨다면 다를 수도 있었다. 정훈의 부인에게서 전화를 한 통 받은 것이 나에게는 너무 큰 영향을 미친 것 같기도 했다.

"정말로 중요한 건 민아씨와 상대방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분이 상의해서 결정을 내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결혼은 중요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결혼 상대도 중요한 거고요. 민아씨가 정말로 그 남자를 평생의 동반자로 생각한다면 남의 상황은 좀 무시해도 되지 않을까요? 어차피 그 부부가 같이 산다고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그 분한테 기회를 줘보는 건 어떨까요?"

난 현수의 얘기가 의외라고 생각했다. 유부남이라면 무조건 만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얘기였다. 나는 나름대로 옳은 결정을 했다고 생각했다. 유부남을 가정에 돌려보냈다고나름대로 잘했다고 생각했었다.

"이미 결혼한 사람이고 부인이 그 남자를 원해요. 나만 사라지면 세상이 모두 조용할 것 같았어요."

"생각보다 이기적이지 못하네요.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에요. 생각해보세요. 그 부인이 민아씨에게 양보할 수도 있는 거라고요. 꼭 민아씨만 양보해야할 입장이 아니라고요."

현수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왜 나는 나만 양보해야한다고 생각한 걸까?

정말로 정훈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세요. 일생 동안 정말로 자신과 맞는 좋은 사람을 몇 명이나 만날 수 있을끼요? 소울메이트라고 하죠. 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 사람은 한 명이고 만날 수도 있고 못만날 수도 있다고요. 그런데 정말 이 사람이다 생각한다면 놓치면 안돼죠."

현수는 방금 내가 정훈에게 냉정하게 얘기한 결론을 다시 뒤집어 엎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난 정훈을 놓친 것이란 말인가?

아니다. 사랑이 끝난 사람에게 얼른 잊어라 라고 말하는 것보다 아직 사랑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위로가 되는 말이다.

현수는 날 위로하고 있을 뿐이다.

무슨 얘기를 하고 얼마나 더 맥주를 마셨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는 출근 시간이 다 된 시간이었고 현수는 집으로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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