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비밀의 성(城)을 향해 가는 길 [16]-전쟁선포※

미강 |2004.08.12 09:05
조회 3,094 |추천 0

 

 

 

 

16. 전쟁선포


 

 

 

 얼떨결에 집어 든 반지지만 이건 좀 심했다.

 

 

이렇게까지 큰 건 바라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가장 작은 걸 고르려던 마음과는 정 반대로 손에 잡혀 버렸던 것이다.

 

 

살며 살아가며, 소중한 사랑만 모아서 만드는 다이아몬드도 상관없는데.

 

 

손가락에 끼면 한 마디는 능히 가릴 것 같은 크기에

 

하연은 한숨만 삼키고 있었더랬다.

 

 

 

“…음식은 먹으라고 있는 거지, 앞에 놔두라고 있는 게 아니야!”

 

 

“저…민혁씨….”

 

 

“…내 건 내가 알아서 하니까 신경 쓰지 마!”

 

 

 

연하고 부드러운 생선살을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며, 민혁이 말했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앞에 놔두고도

 

하연은 목구멍으로 잘 넘길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러는 게 아닌데.

 

사랑하는 남자의 손가락에 끼워줄 실가락지 하나 조차도 해줄 수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건데.

 

 

시무룩해진 하연의 기분을 민혁이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풍성하고 탐스러운 거품이 푹, 꺼지는 듯한 느낌을 전달받으며

 

민혁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뭐가 그렇게 생각할 게 많아?”

 

 

“…이민혁씨, 내 말 좀 들어봐요.”

 

 

“듣기 싫어!”

 

 

“…그래도 들어줘요. 저기, 난 말이에요…당신한테 어울리지 않아요….”

 

 

 

아차, 이 말부터 꺼내는 게 아닌데.

 

 

하연은 아예 자기 말을 듣지 않으려 하는 민혁 때문에

 

너무 앞서서 말해버리고 말았다.

 

 

금세 찬바람이 휙, 하고 불어 닥치며 냅킨으로 입을 닦고

 

식사를 완전히 중단한 민혁을 건너다보며 하연은 더듬거렸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하나.

 

 

 

 

“…당신은 흥진그룹을 대표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난…어렸을 때부터 엄마 없이 자랐고,

 

또 지금은 아버지도 안 계신…일가친척 하나 없는 고아나 마찬가지라구요….”

 

 

“격이 맞지 않다?”

 

 

“…그리고 동거…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 봤는데요,

 

꼭 사랑하는 남녀가 아니더라도…한 집에 거주하면

 

동거관계가 성립되는 거라고…생각해요.”

 

 

“그래서?”

 

 

“…이 반지, 주려고 했던 마음만…민혁씨 마음만 가질게요. 그렇게 하고 싶어요….”

 

 

“자격은 내가 정해! 손가락에 반지만 끼고 있으라는데 그것도 힘든가?”

 

 

 

하연의 마음속에 한 마디, 한 마디를 꼭꼭 눌러 담으려는 듯한 민혁의 말투에

 

안 된다고, 아니라고 생각했던 하연의 마음이 흔들렸다.

 

 

 

좋아하는 마음과 사랑한다는 진실 하나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려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이기적인 것이었다.

 

 

적어도 하연의 생각은 그랬다.

 

 

 

내 마음 알 수 있나요?

 

내가 아무리 바보 같지만, 그래도 이거 하나는 알 수 있어요.

 

당신은 나에게 과분한 사람이라는 거.

 

보잘 것 없고 하찮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

 

그냥 내가 멋대로 당신을 마음에 담아버린 거니까.

 

 

 

처음부터 보답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어요.

 

 

 

민혁은 갑자기 하연의 얼굴을 깊이 들여다보다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하연의 팔을 움켜쥐었다.

 

 

순식간에 팔을 움켜쥔 채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민혁을 올려다보며

 

하연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더듬어 봤지만

 

특별히 실수한 건 없는 듯 했다.

 

 

 

왜 이러는 걸까.

 

 

나지막이 민혁의 입을 통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 생각! 지워! 다시는 내 앞에서 그런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숨겨봐야 소용없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다 보여.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라고.”

 

 

 

민혁은 화를 내고 있었다.

 

 

하연을 향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해서.

 

 

 

잽싸게 날개를 퍼덕여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는 하연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런 경계심 없이 찾아 왔다가

 

정작 손을 벌려 맞아들일 준비를 하니까 도망치려 한다!

 

 

 

눈을 가리고 귀를 가리며 살아가는 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불안감.

 

하연의 눈동자를 스치는 생각이 읽히자마자 민혁은 앞 뒤 잴 것도 없이

 

하연의 팔을 붙잡았던 것이었다.

 

 

 

 

“…난 따뜻한 정이나 사랑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어.

 

어렸을 땐 베풀어 주는 사람이 없었고

 

베풀어 주는 사람이 다가왔을 땐

 

정작 그게 뭔지조차 모른 채로 끝나 버렸지.

 

생각해 보니까 괜찮을 것 같아.

 

내가 베풀어보는 것도.”

 

 

 

 

정에 굶주려 있구나, 이 사람.

 

 

한 번도 이렇게 약한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낸 적이 없던 민혁 이었다.

 

 

빠르게 타올랐다가 금방 식어버리는

 

그런 일순간의 감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쩐지 오랫동안 지속될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을 민혁에게서 전달 받았다.

 

 

 

어느 새, 이 사람의 눈동자를 바라보기만 해도

 

온 몸이 나른해질 것 같은 편안함을 느끼게 되어 버렸다.

 

 

난 당신한테 해줄 게 아무것도 없는데.

 

당신한테 받기만 하라는 건가요?

 

 

민혁은 다시 한 번 다짐을 받듯 하연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 진하연이라는 여자가 나에게 필요하다고.”

 

 

 

민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꼭 쥐고 있던 주먹을 살며시 폈다.

 

길고 하얀 손가락이 곧게 뻗어 있었다.

 

 

민혁은 천천히 하연이 고른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마치 마법처럼 손가락을 서서히 조여 오며

 

마침내 묵직한 무게감을 받았을 때

 

하연은 손가락에서 반짝이고 있는 다이아몬드를 보았다.

 

 

가느다란 실가락지조차 끼워본 적 없는 손가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연의 하얀 손과 매우 잘 어울렸다.

 

 

언제나 이렇게 되고 만다.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야지 생각하다가도 이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기만 하면

 

집중하고 있던 정신들이 온데간데없이 흩어져 버린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그가 곁에서 웃고 있었다.

 

 

 

그릴 듯 말 듯한 입술 곡선은 다른 사람이라면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테지만

 

하연은 마음으로 느꼈다.

 

 

그가 웃고 있다는 걸.

 

 

 

 

“난 이런 식으로밖에 확신을 주지 못해.

 

다른 방법은 모르니까.”

 

 

 

민혁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 먹는 일에 열중했다.

 

하연은 잠깐 반지를 내려다보다가 짧게 한숨을 쉬고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지,

 

정을 어떻게 베풀어야하는 지조차 모르는 사람.

 

 

방법을 모르면서도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는 남자의 사랑을 과연 받을 자격이 있는 걸까.

 

 

 

☆★☆


 

 

 하연은 앞만 바라보며 앉아 있는 민혁을 한 번 쳐다본 뒤

 

차에서 내렸다.

 

 

그 때까지도 민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이젠 아예 눈까지 감고 있었다.

 

하연은 뒷좌석 문을 닫으려다가 민혁에게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요. 내가 당신 곁에 있어서 도움 될 일이 하나도 없잖아요.

 

난 집이 편해요.”

 

 

“…그렇게 해. 뭐라고 한 적 없어!”

 

 

“또 거짓말. 지금 화내고 있잖아요.”

 

 

“화낸 적 없어. 다만 혼자 두기 싫어서.”

 

 

 

혼자 두기 싫어서라는 민혁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연은 아…!하는 신음을 흘렸다.

 

 

그건 다시 말해 함께 있고 싶어서라는 뜻과 통하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었다.

 

그건 애초부터 혼자였기에

 

아예 외로움에 젖어들 여지조차 없었다는 것에 더 가까웠다.

 

 

그런데 지금은…잠시 동안 혼자 있어야 하는 외로움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서는 것이었다.

 

 

짧은 시간들인데 그의 부재감이 너무나 컸다.

 

 

도착지가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지만

 

벌써 멈춰서기엔 늦어 버렸다.

 

 

하연은 진심을 오롯이 담아 민혁을 향해 웃어 주었다.

 

 

그제야 민혁도 고개를 돌려 하연을 바라보았다.

 

 

 

붙잡아서 묶어 놓고 싶은 웃음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훈훈함이 퍼트린 향기를 느끼고 있을 때 하연이 잔잔하게 말했다.

 

 

 

“…있다가 봐요. 조금만 있다가.”

 

 

 

민혁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차가 출발하기 시작했을 때,

 

운전을 하던 상현이 빙그레 웃었다.

 

 

이젠 서로 가까워지는 단계는 넘어섰다.

 

 

눈빛을 마주치고 웃음을 교류하며 마음까지 오가는 사이.

 

 

다음 단계는 공교하게 결합하는 최종단계만 남은 셈인데.

 

 

사실 그 단계야말로 가장 어려움이 큰 것이다.

 

어쩐다. 제 3 자가 더 이상 끼어들어서 자극할 수도 없고.

 

하긴, 물길은 이미 제대로 자리가 잡혔다.

 

물길이 더 세어지기만 기다리는 수밖에.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지?”

 

 

“…필요한 생각입니다.”

 

 

“더 이상은 필요 없어! 이젠 내가 해.”

 

 

“정말…괜찮으시겠습니까?”

 

 

 

상현은 백미러로 민혁을 보았다.

 

 

미미하게 뿜어져 나오는 자신감을 보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자신감을 내비친 일에 있어서는 절대로 실패를 모르는 분.

 

손가락으로 선글라스를 고쳐 쓰면서 상현은 공손히 말했다.

 

 

 

“여자와 사업은 다릅니다.

 

벌써 알고 계시겠지만 제 과한 충성심으로 인한 참견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보고서 있나?

 

성공률과 실패율을 정리하고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갖고 와 봐.

 

그럼 내가 그 충고를 받아들이지.”

 

 

 

하!

 

기가 막힌 나머지 입을 딱 벌렸지만 상현은 결코 민혁의 농담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기분이 좋거나 혹은 나쁘거나.

 

딱 두 가지 아니면 무감각뿐이었는데.

 

민혁이 농담을 했다는 사실 자체에 놀란 것이었다.

 

 

덕분에 상현은 급정거를 했고

 

가까스로 앞 차를 들이박을 뻔 한 위기를 넘겼다.

 

 

어찌나 놀랐는지 잠깐 동안 농담의 사전적 의미를

 

머릿속으로 되새겨 보는 상현이었다.

 

 

감정적 여유가 생기지 않으면 결코 친해질 수 없는 것이 농담인데.

 

 

가끔씩 던져 보았던 농담들마저

 

쩡, 하고 얼어붙을 만큼 냉랭한 표정으로 넘겨 버리던 예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을 한 셈이었다.

 

 

 

“…다시 한 번만 이 따위로 운전하면 나와의 인연은 끝나는 거야!”

 

 

 

곧바로 날카로운 힐책이 날아들었지만

 

상현은 늘 그렇듯 죄송하다며 짧게 잘못을 인정했다.

 

 

손가락으로 문손잡이를 톡톡 치며 생각에 잠겨 있던 민혁은

 

신호가 걸려 잠깐 차가 멈춘 틈을 타 상현에게 물었다.

 

 

 

“…내가 지시한 건 어떻게 됐지?”

 

 

“일단 정보는 확보된 상태지만 아직

 

제가 확인을 해보지 않아 보고를 미루고 있었습니다.”

 

 

“찾아낸 정보들은 모두 몇 개지?”

 

 

“일곱 개 찾아냈습니다.

 

그 중에서 심증이 가는 건 딱 두 건 뿐입니다.”

 

 

“나머지는?”

 

 

“뜬소문 같았습니다.”

 

 

“심증이 가는 정보라는 건 뭐지?”

 

 

“…이미…사망했다는 것과 복지 시설에서 생활한다는 것. 두 가지입니다.”

 

 

“…두 번째 경우.”

 

 

“예? 무슨…말씀이신지…?”

 

 

“이미 사망했다는 건 가설일 뿐이야.

 

복지 시설에서 보호중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죽었을 거라는 결론이지.

 

복지 시설 위치는?”

 

 

“…총 세 군데입니다.”

 

 

“꾸물거리지 마! 빠른 시일 내에 마무리 지어.

 

확실해 지면 내가 직접 나설 거야.”

 

 

“예. 알겠습니다.”

 

 

 

상현은 다시 한 번 이민혁이라는 사람이 빈틈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주 오래 전, 상현은 그런 민혁을 향해 도전장을 내밀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고 반발심은 완전히 연소되어 버렸다.

 

 

열패감 뒤에 찾아온 건 일종의 존경심이었다.

 

 

 

뚜벅뚜벅 걸어가는 민혁 앞에 누군가 멈춰 섰다.

 

앞을 가로 막은 사람을 쳐다 본 상현은

 

아예 선글라스를 확 벗어 버렸다.

 

 

대체 이곳에는 왜!

 

 

 

“조금 일찍 나타나셨군.”

 

 

“이런…건방진!”

 

 

 

민혁의 앞을 막아선 여자가 손을 쳐들었다.

 

 

날카로운 손톱을 보자마자 상현은 민혁의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상현보다 민혁이 좀 더 빨랐다.

 

 

치켜든 여자의 손목을 잡아 챈 뒤 등 뒤로 비틀어버렸다.

 

 

여자가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이를 악 무는 소리가 뿌드득 하며

 

상현에게까지 들렸다.

 

 

로비에 있던 직원 몇 명이 수군거리며 지나가는 게 보였다.

 

 

그러나 민혁을 향해 살짝 인사만 할 뿐,

 

그저 그런 정신 나간 여자 한 명이 회사로 들어온 것으로 생각하고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온통 새빨간 차림에 구불거리는 머리카락, 짙은 선글라스는 천박하기까지 했다.

 

 

불꽃이 튈 것 같은 눈을 하고서 노려보던 여자는

 

반대쪽 손까지 치켜들었지만 이미 그 손은 상현에게 접수당한 뒤였다.

 

 

 

“이…!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놈!”

 

“…한 번만 내 앞에서 함부로 손 놀리면 그 땐 손목을 잘라 버리고 말겠어!

 

이 여자 묶어서 내 방으로 데리고 와!”

 

 

 

잡고 있던 손을 그대로 확 뿌리쳤기 때문에 여자는 일순간 휘청 하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상현이 붙잡고 있던 여자의 손목이 빠져나갈 만큼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그러면서도 여자는 악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넘어지면서 입술을 깨물었는지 일어나던 여자의 입술에서

 

붉은 피가 주루룩 흘러 내렸다.

 

 

그 모습에 상현은 등줄기가 오싹해질 만큼의 한기를 느꼈다.

 

 

이미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민혁의 모습을 바라보며

 

상현은 벗어던졌던 선글라스를 다시 끼었다.

 

 

 

“끌고 갈까요, 아님 그냥 가시겠습니까?”

 

 

 

손으로 입술에 흘러내린 피를 쓰윽 닦던 여자는 눈 깜빡할 사이도 없이

 

그대로 손을 날려 버렸다.

 

 

찢어질 듯한 소리가 로비를 메웠고

 

상현의 고개가 반대쪽으로 돌아가 있은 뒤였다.

 

 

그 소리에 놀란 경비가 달려와 여자를 끌어내려 했지만

 

상현은 손을 들어 경비를 제지했다.

 

 

손가락으로 살짝 흐트러진 선글라스를 바로잡아 준 뒤,

 

다시금 뻣뻣한 자세로 돌아갔다.

 

 

젠장할! 입 안이라도 터졌나보지!

 

비릿한 피냄새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상현! 니놈까지 한 패가 돼서 나를 물먹여?”

 

 

“아무것도 모르던 절 끌어들인 건 당신이었습니다. 가시죠!”

 

 

 

마치 죄수를 끌고 가듯,

 

두 팔을 등 뒤로 단단히 붙들어 매고서 여자를 끌고 가는 상현의 얼굴은 담담했다.

 

 

 

다행히 여자는 더 이상의 발악을 포기하기라도 한 듯 엘리베이터 있는 곳까지

 

순순히 그대로 끌려갔다.

 

 

핏빛 증오가 번진 여자의 눈빛만큼은

 

곁에 다가오는 누구라 할지라도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이 매서웠다.

 

 

스르륵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언제 꺼내들었는지는 몰라도 작은 맥가이버 칼로

 

상현의 손등을 인정사정없이 긁어 버렸다.

 

 

상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손수건을 꺼내 베인 손을 묶었다.

 

금세 붉은 피가 스르륵 배어들었다.

 

 

 

“맛이 어때? 아주 짜릿하지 않아?”

 

 

“…변함없군요. 처음부터 끝까지 피를 부르는 모습이.”

 

 

 

광기(狂氣)와 분노(忿怒)!

 

 

상현은 손수건의 매듭을 한 손으로 능숙하게 묶으며

 

여자의 얼굴을 뒤덮고 있는 기운들을 읽어 냈다.

 

 

그녀는 한 쪽 눈썹이 올라간 모습까지 변함없었다.

 

 

땡, 하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땐

 

언제 그랬냐는 듯 상현과 여자 두 사람 모두 아무렇지도 않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앞장서려던 상현을 앞질러 걸어가던 여자를 보고 여비서가 앞을 막아섰다.

 

 

 

“…지금은 기획이사님께서…!”

 

 

“비켜! 감히 누구 앞을 막아 서!”

 

 

 

졸지에 뺨을 한 대 얻어맞은 여비서는 찢어질 듯한 외마디비명을 질렀지만

 

살짝 붙잡아 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상현 때문에

 

눈물이 맺힌 눈으로 여자를 노려보기만 했다.

 

 

이미 회사 내에서는 조상현이라는 인물이

 

신임회장의 오른팔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암묵적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게다가 비서실을 총괄하는 어엿한 직책도 있는 몸이었으니까.

 

 

상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여자의 앞을 막아섰다.

 

 

 

 

“…제가 먼저 들어갑니다. 뒤를 따라 오십시오.”

 

 

여자의 눈썹이 파르르르 떨리며 독설을 내뱉으려는 찰나

 

회장실 문이 열리며 기획 이사가 나왔다.

 

 

여자는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 입은 기획 이사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의아해하며 기획 이사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자

 

싸늘하게 얼음 조각을 씹어 뱉듯 여자가 말했다.

 

 

 

“전부 다 물갈이를 했어! 비열하고 야비한 놈!”

 

 

“…당연하지! 그대로 놔둘 이유는 없으니까.

 

앞으로 이 여자 나갈 때까지 자네 빼놓고 아무도 문 앞에 세워놓지 마!

 

전화도 차단이야!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아무 염려 마십시오.”

 

 

 

민혁은 상현을 향해 지시를 내린 뒤, 마치 여자를 에스코트하듯 과장된 몸짓으로

 

그녀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러나 민혁의 눈빛만큼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문이 닫힌 뒤, 상현은 보초를 서듯 부동자세를 하고서 문 앞을 막아섰다.

 

 

드디어 시작된 건가.

 

끝을 알 수 없는 전쟁이.


 

 

 

☆★☆

 

 

 

 여자는 손에 들고 있던 핸드백을 소파에 내팽개치자마자 민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암호랑이처럼

 

열 개의 손톱을 치켜세운 채 달려든 여자는

 

민혁의 간단한 손짓 한 번으로 나뒹굴었다.

 

 

 

“냉정을 찾아. 어울리지 않게 흥분하는 건 금물이지. 안 그래?”

 

 

 

민혁의 입술은 곡선을 그리며 올라가 있었지만

 

마치 차가운 밀납 인형의 모습처럼 가공된 웃음이었다.

 

 

어쩔 수 없는 분노와 당혹감으로 여자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기 시작했다.

 

 

달라졌다! 분명, 예전에 알던 이민혁이 아니었다!

 

 

여자의 민감한 본능이 위험경보를 울리고 있었다.

 

섣불리 덤비다가는 오히려 당하고 만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여자는 온 몸의 솜털이 빳빳하게 곤두설 만큼 긴장했다.

 

 

어눌하고 바보같이 시키는 대로 하던 허수아비 이민혁은 이제 없었다.

 

아니, 어쩌면 8년 전 그 날 죽어 버린 지도 모른다!

 

 

여자는 부들부들 떨며 다시 일어나 자세를 곧추세웠다.

 

 

척추가 빳빳하게 일어서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며

 

여자는 자신감으로 충만해졌다.

 

그래봤자 손바닥 안!

 

 

 

“…헉!”

 

 

어느 새, 민혁의 손이 여자의 목덜미를 쥐고 있었다.

 

느슨하게 쥐었던 민혁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지만

 

목숨을 앗아갈 만큼의 완력은 아니었다.

 

 

섬뜩하게 흘러들어오는 차가운 냉기를 느끼며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은 표정 없는 민혁의 눈길과 마주쳤다.

 

 

 

“정신 똑바로 차려!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거나 잔머리를 굴릴 시간조차 없을 테니!

 

조금만 힘이 더 들어가면 목뼈를 그대로 비틀어 버릴 수도 있어.

 

어때? 한 번 즐겨 보겠어?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여자는 하마터면 흡, 하는 신음 끝에 입김이 서리는 듯한 착각을 할 뻔 했다.

 

 

순식간에 얼어붙은 차가운 기운에 여자는 속으로 후회를 삼켰다.

 

 

너무 빨랐나.

 

여자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처럼 타오르던 여자의 불꽃이 민혁 앞에서 주춤거렸다.

 

불길마저 집어 삼킬 듯한 냉기!

 

 

특유의 본능으로 지금의 상황이 철저하게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로소 여자는 온 몸에 힘을 뺐다.

 

 

 

“…자! 해 봐! 할 수 있으면!”

 

 

절대로 비굴하게 항복하지는 않는다!

 

민혁은 여자의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고는 다시금 정신을 집중했다.

 

 

이 여자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거침없고 무서울 게 없는 여자!

 

잠깐 동안의 두려움 따위는 얼마든지 묻어 버릴 수 있는 여자!

 

 

다시금 의미 없는 미소를 지으며 민혁은 여자의 목에서 손을 뗐다.

 

 

발악하지 않는 건 죽일 필요조차 없으니까!

 

칼자루는 아직 내 손에 있다!

 

 

 

 

“도망 다니는 게 지루해졌나? 그렇다면 유감이군.”

 

 

“…많이 컸구나. 언제나 겁먹은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려대면서

 

살기 위해 발버둥치던 네놈이!

 

넌 언제나 눈엣가시 같았어!”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그 따위 말을 하면 당장 저 창문 밖으로 던져 버리겠어!”

 

 

“그 전에 네놈의 살가죽을 벗겨서 활활 타는 불길 속에 던져 버려야겠군.”

 

 

 

민혁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진열장에 넣어둔 양주병을 꺼냈다.

 

깨끗한 크리스탈 잔 두 개를 집어든 뒤 정성스레 술을 따랐다.

 

 

또다시 민혁의 등을 바라보고 있던 여자는 놀라움에 마른침을 집어 삼켰다.

 

 

감정까지 자유자재로 조정해버리는 인간 아닌 인간을 눈앞에 보고 있다니!

 

 

 

지금이라도 천 갈래 만 갈래도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원수 같은 놈!

 

 

모든 것을 알게 된 뒤엔 이미 손에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민혁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이미 모든 것이 늦어 버렸던 것이다!

 

살아 있었다니!

 

게다가 복수심을 이기지 못해 길길이 뛸 거라 생각했던 그녀는

 

이런 민혁의 반응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만난 것을 축하해야겠지.”

 

 

“…축하? 좋아! 그 술에 독약을 풀어 넣었다 해도 단숨에 마셔 주겠어!”

 

 

“난 누구처럼 비열한 짓은 하지 않아! 정면승부! 그게 내 특기지.”

 

 

“언제 어느 때 뒤통수를 후려칠지 몰라!

 

너무 쉽게 끝나면 너무 재미없잖아? 안 그래?”

 

 

 

만약 방 안에 다른 사람이라도 앉아 있었다면

 

그들이 주고받는 독설에 귀를 틀어막고 나갔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의 얼굴에 똑같이 떠올라 있는 미미한 미소가

 

더욱 더 소름끼치도록 섬뜩했다.

 

 

이제 전쟁은 시작 되었다!

 

 

민혁과 여자는 가볍게 잔을 챙, 하고 부딪히며 건배를 했다.

 

 

쓰디쓴 술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것을 느끼며

 

살결이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분노를 갈았다.

 

 

 

“…너무 빨리 끝나면 재미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이원영!”

 

 

“내 이름을 걸고 저주를 내리고 싶겠군.

 

그보다 누님이라는 호칭이 더 어울리지 않겠어?”

 

 

 

요염함이 자르르 흐르는 웃음을 지으며 여자는

 

잔에 남은 술을 한 번에 다 마셔 버렸다.

 

 

민혁은 지긋이 주먹을 쥐며 부르르 떨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남은 술을 한 번에 마신 민혁의 얼굴은 태연했다.

 

 

이원영.

 

그의 입에서 나온 여자의 이름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이민혁의 누나이자 흥진그룹 전 회장인 고(故) 한태서의 부인이였던 그녀!

 

 

이제 그녀는 다시 민혁을 향해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

 

목요일 아침입니다. ^^

 

벌써부터 밝은 햇살이 뜨겁게 비춰들어오네요.

 

 

또 다른 비밀의 한 조각이 드러났습니다.

 

여러 님들께서 마녀같은 여자라 칭해주셨던 그녀가 오늘 본격적으로 등장했답니다. ㅎ

 

뭐 이런 질 나쁜 여자를 등장시켰어? 이러믄서 저 미워하시믄 안 되요~ *^^*

 

 

더운 하루! 지치고 힘든 가운데 제 글이 소중한 휴식으로 다가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 그리고 제게 일촌 신청 해주신 님들~ 그리고 일촌 신청 해주실 님들~

 

네이트 게시판에서 쓰시는 닉넴도 함께 알려주세요~*^^*

 

미강이 머리 나빠요~ㅎㅎ

 

그럼 이만 물러갑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며칠 글을 올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ㅠ_ㅠ 대신 오늘 길게 올린 글로 용서를....^^)

 

************************************************************************************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