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어떤 규제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일부 재벌과 한나라당의 집요한 공세에 굴복했다.” 지난 2001년 11월16일 노무현 당시 민주당 상임고문은 개인 자격으로 이런 내용의 ‘정책 논평’을 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당시 여당의 유력한 대통령선거 후보가 정부를 이렇게 강하게 비판했던 것일까?
정부는 바로 그 전날인 15일 출자총액제한제 예외를 대폭 확대하고 대규모기업집단(재벌) 지정 기준을 대폭 완화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대규모기업집단 정책 개선 방안’을 발표했다. 말이 개선이지, 사실상 재벌 개혁 포기 선언이나 다름 없었다.
이에 앞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1999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우리 경제의 최대 문제점인 재벌의 구조개혁 없이는 경제 개혁을 완성할 수 없다”며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재벌을 개혁하고 중산층 중심으로 경제를 바로잡은 대통령이 되겠다”고 밝혔다. 김 대통령은 또 구체적인 재벌 개혁 방안으로 △순환출자와 부당내부거래 억제 △계열 금융회사를 통한 금융지배 방지 △기업 지배구조 개선 등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재벌 개혁 5+3 원칙’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 원칙에 입각해 그해 12월 정부와 전경련은 출자총액제한제를 2001년 4월부터 시행하기로 하고, 합의문까지 만들어 교환했다.
그러나 막상 2001년 4월이 되자, 재벌들은 전경련을 중심으로 “출자총액제한제가 기업 투자를 어렵게 한다”며, 조직적인 저항에 나섰다. 보수 신문들이 거들었다. 당시 사설이나 칼럼, 기사를 보면 부추겼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고 할 정도다. “공정거래위원회 때문에 기업 못하겠다”(<동아일보> 4월25일치 사설), “경제계의 요구와 당국의 구태”(<조선일보> 5월14일치 사설), “출자총액제한제는 정권과 관료들이 기업을 가렴주구하는 데 쓰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중앙일보> 9월14일치 12면 칼럼) 등등. 신문사에 대한 국세청 세무조사와 공정거래위원회의 부당내부거래 조사에 대한 반감이 짙게 깔린 반응이었다.
그러나 전경련과 보수 신문들의 주장이 국민들에게는 상당히 먹혀들었다. 경기 침체와 맞물렸기 때문이다. 99년과 2000년 각각 9.5%와 8.5%의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강한 상승세를 보였던 우리 경제는 2001년 3.8%로 빠르게 하강했다. 결국 정부는 그해 11월 전경련과 보수 신문의 파상 공세와 경기 침체를 견디지 못하고 백기를 들었다.
공교롭게도 신용카드 남발과 부동산 경기 등으로 소비가 경제를 이끌면서 2002년 경제성장률은 7.0%로 다시 높아졌다. 하지만 거품이었고 바로 꺼졌다. 그리고 그 거품 붕괴의 고통을 지금 국민 전체가, 특히 서민층이 가장 많이 받고 있다.
재벌 개혁의 좌초는 문민정부에서도 있었다.
‘신한국’ ‘신경제’ ‘신노사관계’ 등 유난히 ‘신’자를 좋아했던 김영삼 대통령 때는 재벌정책도 ‘신재벌정책’으로 불렸다. 1996년 4·11 총선에서 신한국당이 승리한 뒤, 김 대통령은 5월3일 공정위의 보고를 받으면서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막고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한 공정거래 시책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바로 그 전해인 95년 말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에 재벌 총수들이 줄줄이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정경유착을 뿌리뽑고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진 데 따른 조처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공정위는 소액주주 권한 강화와 감사제도 강화 등을 뼈대로 하는 기업 경영 투명성 방안을 마련했다. 재벌 총수가 전횡을 일삼는 ‘황제 경영’에 칼을 대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신재벌정책의 생명은 김대중 정부의 ‘재벌 개혁 5+3 원칙’보다 생명이 더 짧았다. 이때도 전경련이 “경제부터 살려야 한다”며 총대를 멨고, ‘경제 위기론’이 동원됐다. “소액주주 권한 강화 조처를 외국 기업이 활용할 경우 국내 기업의 경영 비밀이 외국 기업에 넘어갈 수 있다”는 황당한 주장까지 나왔다.
결국 그해 8월 신재벌정책을 추진했던 경제팀이 전격 경질됐다. 전경련은 이 개각에 대해 “수출 부진 등 최근 우리 경제의 어려움을 정면으로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며 반겼다. 당시도 경기가 하강기에 들어갔던 때다. 94년과 95년 각각 8.3%와 8.9% 성장했던 경제가 96년에 7.0%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경련의 주장처럼 경제는 살아나지 않았고, 1년 뒤 우리나라는 재벌의 문어발식 경영과 과도한 차입 경영이 한 원인이 됐다는 외환위기를 맞았다.
2004년 5월15일 헌법재판소의 탄핵안 기각 뒤 노무현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에서 “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자기에게 불리한 정책을 유리한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위기를 확대해서 주장하고 국민 불안을 조장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직무정지 기간 동안 또다시 고개를 든 경제 위기론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취임 때 밝힌 ‘시장 개혁 3개년 로드맵’을 밀고 나가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상황은 재벌 개혁이 참여정부에서도 좌초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 때와 상황이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재벌 정책 흔들기의 중심에 전경련과 보수 신문들이 있고, 경기가 나쁜 것도 사실이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여당 안에서조차 벌써부터 ‘백기’를 들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지금의 경기 침체 책임이 방만하고 무책임한 경영으로 신용불량자를 양산하고 금융시장을 혼란에 빠뜨린 재벌 계열 카드사에 상당 부분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길은 두 갈래”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김기원 방송대 교수(경제학)는 “개혁을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한다면 경기가 일시적으로 살아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모르핀을 계속 투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당장 지금은 고통스럽더라도 개혁의 원칙을 지키면서 하나하나 실천하는 것만이 지속 가능한 성장으로 가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안재승 기자 jsahn@hani.co.kr
<한겨례신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