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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그 후... <제 10 회> - 어느 하루

박준욱 |2004.08.20 12:12
조회 444 |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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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

졸업을 한지 겨우 한 달 남짓한 지금... 난 다행히 전공을 살려 어느 대형 로펌(law firm)에

 

서 사무직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작년 겨울에 윤 교수님께서 제안하시는 바람에 별 기대 없이 지원 접수했는데 덜컥 합격해

 

버렸다.

 

친구들은 일찍이 취직이 되어 부럽다니 대단하다니 나를 치켜세우지만, 말이 대형 로펌의

 

사무직원이지 아직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기에 하는 일이라곤 각종 서류들을 발급하러 각종

 

관공서에 들락거리거나 정리하는 등 아주 잡다한 일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아침 9시까지 출근시간이라 하지만, 최소한 같이 근무하고 있는 변호사들이나 사무장

 

들보다는 먼저 출근해야 되므로 8시 반까지는 회사에 도착해야 했다.

 

그러니 집에서 준비하고 회사에 도착하는 시간을 넉넉히 2시간 정도로 감안한다면, 새벽 6

 

시 반까지는 일어나야 하는데 유독 아침잠이 많은 내겐 하루하루가 곤욕의 나날이었다.

 

오죽했으면 대학 재학시절 수강신청을 할 때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1교시 수업은 신청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여태 힘겹게 지켜오던 기상시간도 오늘 아침에는 전 날의 회식 때문인지 평소보다

 

15분 정도 늦게 일어났다.

 

역시나 자꾸만 감겨대는 눈을 비벼대며 멍한 정신으로나마 서둘러 회사에 갈 차림을 하고

 

아침 식사는 토스트 2조각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런 나쁜 생활습관 때문이랄까 요즘 들어 화장실에서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 같다.

 

늦게 일어난 나머지 젖은 머리카락도 말릴 세 없이 눅눅해진 상태로 비좁은 지하철... 아니,

 

지옥철에 올랐다.

 

회사 근처의 지하철역에 도착할 때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채이고 끼이긴 했지만,

 

젖어있던 머리카락은 어느새 말라있었다.

 

더구나 긴 생 머리이다 보니 거추장스럽게 빗질도 필요 없이 회사에 들어서자 몇몇 사무직

 

원이 먼저 도착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 옆자리에서 근무하는 유진 언니도 이제 막 도착한 듯 내게 아침 인사를 건네곤 어디론가

 

걸음 했다.

 

나 역시 유진 언니의 인사에 답할 세도 없이  얼른 핸드백은 책상에 던지듯 두고는 일찍이

 

배달 온 신문들을 가지런히 모아 변호사들의 개인 사무실마다 가져다 놓았다.

 

그러다 9시쯤에 변호사들을 비롯한 사무장들이 하나둘씩 출근함으로써 본격적인 업무에 들

 

어갔다.

 

난 내일 오전에 최 변호사의 재판이 있어 늦어도 오늘 오후 중으로는 재판에 사용될 원고를

 

정리하고 교정하는 작업을 마쳐야 하므로 숨 돌릴 틈도 없이 컴퓨터 모니터에 온 신경을 집

 

중할 수밖에 없었다.

 

장시간 키보드를 두드렸더니 손목의 통증이 느껴질 무렵 유진 언니가 두꺼운 서류뭉치를 던

 

지듯 건네주었다.

 

 

 

"이게 뭐야?"

 

"김 변호사님한테 갖다 드려."

 

"언니, 지금 내가 바쁜 게 보이지 않아?"

 

"바쁜 거 알지. 하지만 이 언니가 너랑 김 변호사 님이랑 잘 되게 하기 위해 이렇게 신경

 

써주는데... 나의 호의를 거절할 셈이야?"

 

"뭘 잘되게 해줘? 제발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아 줘."

 

 

 

그 두꺼운 서류뭉치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계속 모니터만 주시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의자를 내 옆으로 바짝 붙이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왜 이렇게 둔하니? 김 변호사님이 너한테 관심이 있다는 것은 우리 회사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단 말이야."

 

"자꾸 쓸데없는 소리하지마. 어서 이거나 김 변호사님한테 가져다 줘. 기다리시겠어."

 

 

 

그 서류 뭉치를 다시 그녀에게 건넸다.

 

그런데 그녀는 그 서류 뭉치를 받기는커녕 아랫배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는 느닷없이 자리에

 

일어나며 말했다.

 

 

 

"갑자기 배에서 신호가 오네. 내가 며칠째 화장실을 못 갔거든. 그럼 부탁할게!"

 

 

 

그녀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줄행랑이라도 치듯 재빨리 회사 복도 쪽으로 걸음 했다.

 

난 그녀의 짓궂음에 고개를 절래 저으며 약간 흐트러진 서류뭉치들을 가지런히 정리할 찰나

 

에 그녀는 어느새 다시 돌아와서는 내 귓가에 속삭였다.

 

 

 

"빨리 갖다드려. 네 말대로 기다리시겠어."

 

 

 

난 순간 발끈하며 눈이라도 흘길까 했지만 그녀의 모습은 어느새 회사 복도에 들어서고 있

 

었다.

 

결국 내가 직접 두꺼운 서류뭉치들을 날라야 하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난 두 손 가득 서류뭉치를 껴안듯 들고는 조심스레 김 변호사의 개인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는 다시 낑낑대며 문을 열고 들어서자 김 변호사는 이리저리 부산하게 여러 서류에게 시선

 

을 옮기다 나의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이런...!"

 

 

 

김 변호사는 얼른 자리에 일어나 내게 다가오더니 나의 두 손 가득히 쌓여 있는 서류 뭉치

 

들을 받아들이곤 책상에 올려다 놓았다.

 

 

 

"최 변호사님 일로 바쁘실 것 같아 일부러 유진씨한테 부탁했는데..."

 

 

 

사실대로 그녀가 막무가내로 김 변호사님과 좋은 인연으로 연결시켜 준다며 내게 이 무거운

 

서류 뭉치들을 맡겼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갑자기 바쁜 일이 있어서..."

 

 

 

김 변호사는 별다른 추궁이나 물음도 없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튼 수고했어요."

 

"그럼..."

 

 

 

난 고개를 숙이며 짧은 인사를 하곤 등을 돌려 그곳에서 나오려는 찰나였다.

 

 

 

"혹시 뮤지컬 좋아해요?"

 

 

 

갑작스런 그의 물음에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네...?!"

 

 

 

그는 나의 반문은 알아듣지 못했는지 계속 말을 이었다.

 

 

 

"[Mouse]란 뮤지컬 티켓이 2장 있는데 같이 가지 않을 래요? 시간은 다음주 수요일 저녁 7

 

시 반인데..."

 

 

 

Mouse...?

 

지난 날, 헤어진 그와 보고 싶은 마음만은 굴뚝같았지만 워낙 유명한 뮤지컬 때문인지 상당

 

한 티켓 요금 때문에 애써 단념해야 했던 씁쓸한 기억이 있다.

 

솔직히 김 변호사의 제안은 그토록 보고 싶었던 뮤지컬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긴 하지

 

만, 직장 상사와 단둘이 관람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당연히 대답도 모호할 수밖에.

 

 

 

"글쎄요..."

 

 

 

김 변호사는 책상에 살짝 기대듯 앉아 말했다.

 

 

 

"이번에도 거절하면 세 번째예요. 그건 나에 대한 모욕이고요."

 

 

 

모욕?!

 

그런 뜻은 전혀 없기에 행여나 오해라도 살까 황급히 그의 말을 부정했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다만... 아니, 친구 분이랑 같이 가시면 되잖아요?"

 

 

 

그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보기보다 많이 둔한 것 같네요. 왜 그렇게 내 마음을 몰라요? 아니면 모른 척 하는 건가

 

요? 솔직히 말해서 아주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어요. 물론 사적인 감정으로 말이에요."

 

 

 

내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니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리 좋은 기분도 아니었다.

 

그보다 이런 그의 솔직한 심정을 들은 이상 그의 제안은 더욱 거부감이 더했다.

 

물론 김 변호사가 수련한 외모에 능력, 성품으로 보아 어느 여자라도 반할 정도의 매력적인

 

남자란 건 알겠지만, 내겐 그저 직장상사일뿐더러 겨우 지난 사랑에서 벗어나고... 이제 가슴

 

속 깊숙이 지난 사랑을 거의 묻어가고 있는 시기에 굳이 다른 누군가와 다시 '사랑'이란 감

 

정을 나눈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하는 것이 옳은 듯 했다.

 

그래서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이제 거절할 찰나에 그가 먼저 선수를 쳤다.

 

 

 

"다음주 수요일에 업무 끝나고 바로 여기에서 같이 가요. 그렇게 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됐어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그는 내 말은 딱 끊어버린 채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다.

 

 

 

"지금까지 2번의 거절은 한 남자로서의 제안이었지만, 이번엔 직장 상사로서의 명령이에요.

 

그럼 됐죠?"

 

 

 

그의 완강함에 더 이상 이겨낼 재간은 없었다.

 

결국 그의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을 듯 했다.

 

하긴, 그가 내게 사랑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기껏 뮤지컬을 관람하는 것인데... 더구나 내

 

가 얼마나 보고 싶어했던 뮤지컬이었는가?

 

그렇게 좀 전의 나의 생각은 망각한 채 지금의 내 선택에 대해서 합리할 뿐이었다.

 

난 그에게 다시 목례를 하곤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오자 언제 왔는지 유진 언니는 태연히 자

 

기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그녀는 인기척이라도 느꼈는지 내게 다가왔다.

 

 

 

"가져다 드렸어?"

 

"어쩔 수 없이 가져다 드려야지, 어떻게 하겠어?"

 

"그래도 나 때문에 김 변호사님 얼굴 한 번 더 봤잖아. 어때? 고맙지?"

 

 

 

그녀의 말에 순간 언성이 높아질 뻔했지만, 그냥 눈만 흘기는 것만으로 나의 감정을 달랬다.

 

 

 

"언니, 다시는 오늘 같은 쓸데없는 짓은 하지마."

 

 

 

난 핸드백을 열어 다이어리를 끄집어내어 [Month Plan]란(欄)을 펼쳤다.

 

그리고 다음주 수요일 공란에 '뮤지컬 관람 pm.7:30'이라고 적어두었다.

 

여전히 옆에 다가와 있던 언니는 슬쩍 내 다이어리를 보더니 물었다.

 

 

 

"뮤지컬 관람? 웬 뮤지컬 관람이야? 혹시 김 변호사님과 같이 관람하는 거야?"

 

 

 

순간 높아지는 그녀의 언성에 난 화들짝 놀래며 손으로 그녀의 입을 가렸다.

 

 

 

"좀 조용히 해. 다 듣겠어."

 

 

 

하지만 그녀는 내 말을 듣기는커녕 괜스레 실실거렸다.

 

 

 

"이거 잘하면 조만간 사내커플 한 쌍이 탄생하겠어."

 

 

 

난 그녀의 추측에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일은 전혀 없을 거야. 그리고 다른 직원들한테 김 변호사님과 뮤지컬을 관람한다고

 

소문내지 말았으면 해. 괜한 오해사기 싫어."

 

 

 

그녀는 나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래, 알았어. 그런데 다른 직원들 대부분은 너랑 김 변호사 님의 관계를 거의 알고 있는

 

눈친데, 뭐. 몇몇 여자 직원들은 널 부러워하거나 시기까지 하는 것 같은 걸. 솔직히 말이야

 

바른 말이지. 김 변호사님이 어디가 빠지겠어? 얼굴 잘 생겼겠다, 능력 좋겠다. 성격 좋겠다.

 

완전 백마 탄 왕자지."

 

"관심 없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절대 다른 직원들한테는 말하지 마!"

 

"알았어. 근데, 그렇게 김 변호사 님한테 관심조차 없다면서 뮤지컬 관람은 왜 같이 하니?"

 

"명령이래..."

 

"뭐?"

 

"아냐..."

 

 

 

괜스레 이런저런 사정을 말했다간 얘기가 더 길어질 것 같아 그녀의 말에 대충 얼버무렸다.

 

다시 업무에 충실하기 위해 다이어리를 덮을 찰나에 오늘 날짜 일정 공란에 '합격자 발표'란

 

글과 함께 빨간 별표까지 그려져 있었다.

 

 

 

합격자 발표...?

 

 

 

그러고 보니 오늘은 헤어진 그가 몇 개월 전에 응시했던 공군 사관후보생에 지원하기 위한

 

시험의 합격자 발표일이었다.

 

지난 겨울, 헤어진 그와 같이 다이어리를 구입하고 맨 먼저 오늘인 합격자 발표일을 체크해

 

두었던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헤어진 그와 지금까지는 사랑하고 있을 것만 같았는데...

 

역시 우리의... 아니, 헤어진 그와 나의 바람일 뿐이었다.

 

그보다 시험결과가 어떠할지 궁금했다.

 

원래 나의 기도나 격려 따위가 없어도 뭐든지 잘해낸 그였기에 그리 비관적인 결과는 생각

 

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쯤 합격의 기쁨을 가족과 친구들과 나누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동진에서 보았던 어여쁜 그녀와도 말이다.

 

이런, 이젠 헤어진 그에 관한 모든 것이라면 가슴 깊숙이 묻었으리라 생각했는데...

 

물론 헤어진 그에 대한 그리움도... 미련도 아니었지만, 아직까지도 헤어진 그에 대한 모든

 

것을 가슴속 깊숙이 묻기에는 역부족인 듯 했다.

 

그런데 새로운 상대와 새로운 사랑이라...

 

역시 그건 아니다.

 

 

 

 

 

[He...]

대한민국 남자로 태어났다면 특별한 사정(事情), 혹은 몸에 특별한 이상이 없다면 병역의 의

 

무를 해야 한다.

 

내 또래의 친구들은 대부분 대학교 2학년 때 휴학을 하고 군에 입소(入所)해서 지금쯤이면

 

이미 전역(轉役)을 했거나 얼마 남지 않았을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난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이왕 병역의 의무를 해야 한다면 비록 힘들고 많은 어려움

 

과 책임감이 뒤따르겠지만, 사관후보생으로 지원해 학사장교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지난 1년간 열심히 준비해서 작년 12월 중순에 시험에 응시했고 오늘은

 

그 시험의 합격자 명단을 발표하는 날이라 떨리는 마음으로 확인하기 위해 전화했다.

 

그 결과는...

 

 

 

"죄송합니다. 귀하의 성함은 본 합격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처음 메뉴로..."

 

 

 

낭랑한 여성 안내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어쩌면 이 같은 결과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너무나 사랑했던 그녀와의 이별의 아픔은 아직 내가 쉽게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도 억지로나마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책들을 뚫어지게 쳐다봤지만, 지난 사랑의 추억

 

들만이 나의 머릿속을 맴돌 뿐이었다.

 

물론 그런 것들은 시험에 불합격한 내 자신에 대한 자기 합리화밖에 되지 않으며 내게 굳건

 

한 의지만 있었다면 충분히 합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부모님도 내심 합격을 기대하신 터라 쉽사리 '불합격'이란 결과를 말씀드리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나의 침울한 표정에 시험 결과를 감지라도 하셨는지 시험 결과에 대해선 별로 언급

 

하지 않은 채 그저 상투적인 위로만을 해주셨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부모님의 그런 위로에도 어떠한 말조차 건네기가 쉽지 않았다.

 

그저 책상에 망연히 앉아있다 해가 져 방안이 어둑할 무렵에선 가슴이 답답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나와 창문을 활짝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꽃샘추위 때문인지 날카로운 세찬 바람이 불어닥쳤다.

 

하지만 날씨의 을씨년스러움만 만끽할 뿐, 가슴속의 답답함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면 좀 나을까...?

 

 

 

외투를 들고 방에서 나와 현관에서 신발을 주섬주섬 신자 마침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시던

 

어머니가 물으셨다.

 

 

 

"어디 가니? 저녁 먹어야지."

 

"잠깐 나갔다 올게요. 그리고 밥맛없으니깐 저녁 안 먹을 거예요.

 

"밤늦게 배고프면 어떡하려고? 조금이라도..."

 

 

 

어머니가 말씀을 하시고 있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집에서 나와 버렸다.

 

그리고 막 아파트 현관을 나서자 베란다에서 느꼈던 봄바람보다 더 매섭게 불어닥치며 마치

 

내 살을 파고들 듯 스쳐지나갔다.

 

그래도 꿋꿋이 걸음해서 아파트 단지까지 나오자 등뒤에서 낯익은 여자 목소리가 들여왔다.

 

자연스레 고개를 돌아가니 다름 아닌 정연이었다.

 

 

 

"갑자기 웬일이야?"

 

"그냥..."

 

"그냥이라니? 여기엔 언제 왔어?"

 

"방금..."

 

 

 

하지만 그녀의 말이 거짓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꽃샘추위에 불그스레한 얼굴빛과 미세하게나마 몸을 떨고 있어 처연해 보이기까지 한 그녀

 

의 모습에 족히 몇 시간인 것 같았다.

 

 

 

"우선 따뜻한 차라도 마시면서 얘기하자."

 

 

 

급한 대로 집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조그마한 카페로 가야할 듯 했다.

 

한시라도 몸을 녹이기 위해 애써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카페에 들어서선 둘 다 코코아를 주문했다.

 

아직도 추위가 가시지 않았는지 그녀의 불그스레한 얼굴은 여전했다.

 

얼마 후 우리가 주문한 코코아가 나왔고 그녀는 얼른 두 손으로 코코아가 든 머그컵을 감싸

 

며 조금이라도 빨리 손을... 몸을 녹이려는 듯 했다.

 

난 티스푼으로 괜스레 코코아를 빙그레 저으며 말했다.

 

 

 

"왔으면 바로 전화라도 하지, 왜 그렇게 미련하게 기다리고 있어?"

 

"나도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오늘은 웬지 너희 집 앞에 가니깐 막상 망설여지더라."

 

"갑자기 왜?"

 

"나... 알고 있어. 오늘이 네 합격자 발표날이란 거... 결과는 어떻게 됐니?"

 

 

 

그녀의 직설적인 물음에 차마 '불합격'이라고 떠들고 싶지 않았다.

 

그저 머뭇거리며 괜스레 머리만 긁적거렸다.

 

다행히 그녀는 나의 이런 행동들로 합격여부를 알았는지 꽤 조심스런 말투였다.

 

 

 

"다음엔 붙겠지, 뭐. 네가 공부를 안 해서라기보다 사실 마음적으로 많이 힘들었잖아."

 

"그렇게 말해준다고 그다지 위안을 되지 않아. 그냥 내가 공부를 그만큼 안 했으니깐 결과

 

가 그 모양, 그 꼴이지."

 

 

 

난 입김을 불며 코코아를 조금 들이키곤 다시 말했다.

 

 

 

"넌 어때? 유학 준비 잘 되어가니?"

 

"그저 그렇지, 뭐."

 

"다음주 목요일이지?"

 

"응?! 아, 응...! 마중 나와 줄 거야?"

 

"그럼, 당연히 가야지. 다른 친구들도 같이 가기로 했어."

 

 

 

이번엔 그녀가 코코아를 조금 들이키곤 말했다.

 

 

 

"벌써 3개월이나 지났는데 정말 이렇게 끝나버릴 거니?"

 

 

 

갑작스런 그녀의 물음에 자연스레 반문했다.

 

 

 

"뭐?"

 

"그 여자 애랑 말이야..."

 

"갑자기 그 얘기는 왜 하니? 네 말대로 벌써 3개월 전에 끝났어."

 

"날 속일 생각은 하지마. 내가 보기엔 아직도 그 애한테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

 

은걸."

 

 

 

맞는 말이었다.

 

결국 그녀의 말에 동조할 수밖에...

 

 

 

"그럴 수도..."

 

"아니, 그렇겠지!"

 

 

 

그녀는 확언해버렸다.

 

 

 

"그래, 네 말대로 그렇다고 하자. 근데 그렇다고 한들 지금에서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이미

 

우린... 아니, 그 애랑 나는 헤어진 사이야."

 

"헤어지더라도 최소한 오해를 풀어야 되지 않니? 혹시 모르잖아. 오해가 풀어져서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한 그 애와 다시 사랑할 수도..."

 

"됐어. 그럴 일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해서 그 애를 다시 사랑하고 싶진 않아."

 

"그럴 자신이 없는 거겠지. 그렇게 해서라도 다시 사랑해야 하는 게 아니니? 정말 그 애를

 

사랑했다면...! 사랑한다면...!"

 

"네 말도 맞아. 그런데 네 말대로 그 애와 다시 사랑할 자신이 없어. 내가 아무리 그 애를

 

위해서 그랬다지만 내가 했던 모진 행동들을 내 자신이 용서할 수 없고, 아무리 내가 그 애

 

를 사랑한다고 한들 다시금 나의 보잘 것 없는 사랑 따윈 주고 싶지 않아. 설사 내가 그 애

 

를 찾아가 모든 오해에 대해 해명한다 한들 그 애에겐 그 사실이... 그 진실, 내 진심조차 푸

 

념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거야. 차라리 나의 진심을 그 애가 언젠가는, 먼 훗날이라도 알아줄

 

것이라 생각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그렇게 비하하지마. 세상에 보잘 것 없는 사랑이란 건 없어. 그건 너의 쓸데없는 자책감일

 

뿐이야. 그리고 막연히 그 애가 네 마음을 알아주기만을 기다린다고 영화나 드라마처럼 기

 

막힌 우연이나 기적으로 그 애가 네 진심을 알 리가 없잖니?"

 

"하지만...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 그 애는 나와 우연히라도 마주 치길 원치 않을 거야. 그

 

저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잊어가고 싶어."

 

 

 

그 말을 끝으로 우린 잠시 서로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냥 망연히 마주 앉아 식어 가는 코코아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그녀는 짧은 한 숨을 내쉬며 다시 말했다.

 

 

 

"영화와 드라마가 꼭 허구성만 있는 게 아냐. 오히려 현실을 반영한다는 말이 더 옳지. 그러

 

니 혹시 모르잖아?"

 

"뭐가?"

 

"드라마나 영화처럼 기막힌 우연이나 기적으로 하여금 다시 네가 그 애와 사랑한다고 확신

 

할 순 없지만, 너에 대한 오해는 확실히 풀릴 수도 있잖아."

 

"그런 기적이 일어난다면 가능하겠지..."

 

"그래, 사랑의 기적! 그 사랑의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잖아?"

 

"갑자기 무슨 소리야? 기적이라니? 그런 게 말처럼 쉽게 일어나니?"

 

"글세? 어쩌면..."

 

 

도통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를 영문이었다.

 

아마 날 위로라도 하려는 모양인 듯 했다.

 

물론 그다지 위안이나 힘은 되지 않았지만, 그 마음만으로 고마울 따름이었다.

 

 

 

근데 사랑의 기적이라...

 

기적...? 그것도 사랑의 기적...?

 

 

 

당치도 않은 소리에 나도 모르게 피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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