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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와 그 여자의 이야기 [7]

표류교실 |2004.08.28 02:55
조회 483 |추천 0

[7]

서현의 된장찌개 맛은 단연 일품이었다. 지우는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나는 이렇게 음식 잘 못하는데. 어느새 잠이 들어버린 가인은 안방 침대위에 눕혀져있었다.

 

“미국에서 오래사셨네요.”

 

지우의 이야기를 듣던 진아가 말했다.

“뭐, 네. 그렇죠.”

“한국말을 참 잘 하시네요. 대개 그렇게 어릴때 가면 잊어버린다고들 하던데.”

 

서현이 말했다.

질투를 할래야 할수 없는 여자였다. 그리고 사실 지우는 질투라는것을 모르고 살아왔었다. 자아도취에 빠져있어서 그랬던것은 아니다. 다만 성격이 그렇게 타고났을뿐. 스스로를 만족하고 살수있는 방법을 일찍 터득한 것이기도 하다.

 

“어렸을때 한국인 학교도 꾸준히 다녔었고, 또 저희 할아버지께서 한국말 못하는건 전혀 용서할수 없다고 하셔서요. 학교에서 말고는 항상 한국말 해야했어요.”

“아주 적합하고 옳은 교육이죠. 당연히 모국어는 할수있어야죠, 기본적으로.”

 

재석이 지우의 할아버지의 말에 동감한다는듯 말했다.

 

“그럼 미국사람 사겨본적도 있어요?”

 

궁금하다는듯 진아가 물었다.

 

“야!”

“뭐 어때. 괜찮죠, 이런 질문?”

 

서현이 옆에서 진아의 허리를 쿡 찌르며 말려왔지만 진아는 아랑곳하지않았다.

 

“괜찮아요.”

 

정말 아무렇지않았다. 꼭 이럴때보면 성격이 우유부단한것같다. 솔직히 진아가 한 질문은 굉장히 사적인것인데도 그렇게 무례하게 들리지도 않았다.

 

“그런적 있어요.”

“우와.”

 

좋았겠다는듯 진아는 감탄을 했다. 대화내용에 별 관심이 없어보이던 준하마저도 지우를 쳐다봤다.

 

“어때요? 아무래도 한국사람이랑 사귀는거하고는 좀 틀리죠?”

“아무래도 조금은요. 사귀고 보니까 한국사람이랑 사귀는게 더 재밌더라구요. 문화차이가 느껴졌다고 해야하나. 전 항상 제가 미국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그 순간에 확 꺠달았죠. 아..난 한국사람이구나. 할아버지말씀이 틀린게 없구나.”

“그럼 준하씨하고 만난지는 얼마나 됐어요?”

“한..한달쯤된거같네요.”

 

그동안 계속 조용하던 준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상했다. 지우가 외국남자를 사귀어본적이 있다는 말을 했을때 가슴이 쿵하고 보이지않는 바닥으로 내려쳐지는 기분이었다. 단 한번도 저 여자가 다른 남자의 여자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  하지만 역시나 아름다운 여자였고, 그런 여자한테 단 한번도 사랑이 없었다면 말도 안되는 얘기였다.

 

“그럼 사귀는거예요?”

“아니예요, 그런거. 친구예요. 그렇죠, 준하씨?”

“어? 어.”

 

준하는 덜익은 감을 잘못먹은 것처럼 입안이 떱떨음해지는 것 같았다.

 

 

 

에어콘을 트는 대신 차에 있는 4개의 창문을 모두 열었다. 이것은 지우가 부탁한거였다. 오늘 이 여자는 무지하게 덥고싶은가 보다. 점심에는 칼국수를 먹더니 저녁에는 에어콘을 틀지않겠단다.

 

“당신이랑 나 사귀는거 아니었어?”

“네?”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이건? 지우는 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가 운전하고있는 준하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예전에 내 친구들 앞에서는 나랑 사귄다고 하더니.”

“그땐 거짓말이었구요. 당신이랑 나랑 안사귀는거 맞잖아요.”

“그때 거짓말 한거였다고?”

“그래요. 당신 친구들의 성격으로 봐서 안사귄다고 했으면 가만 안있었을걸요? 아주 덤벼들었을텐데. 그렇게 생각안해요?”

 

생각해보니 그렇다. 만약에 지우가 그때 사귀지 않는다고 대답했더라면 그녀석들은 지우와 나의 관계를 파해치기위해 무슨짓이든 했을거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은근히 접근하던 이희철이라는 자식은 계속 그녀를 꼬셔댔겠지. 지우는 내 친구들을 정확히 파악하고있었던거다. 역시 상황파악이 빨랐다.

 

“뭐, 그랬을거야. 아마도.”

 

더이상 무슨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준하는 입을 다물었다. 지우도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않고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색한 침묵을 지워내려 그는 라디오를 틀었다.

 

“...in love with you. Like a river flows surely to the sea, darling so it goes. Somethings are meant to be. Take my hand. Take my whole life too...”

“ ..For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강물이 반드시 바다로 흘러가는 것처럼. 그대여, 사랑도 그래야 하건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답니다.
내 손을 잡으세요. 내 모든 인생도 가져 가세요. 난 당신과 사랑에 빠질 수 밖에는 없으니깐요.)

어느덧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수의 목소리 위로 지우의 따뜻한 목소리가 덮어졌다. 그녀는 마지막 부분을 부르고있었다. 음악이 모두 끝나고 DJ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For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난 당신과 사랑에 빠질 수 밖에는 없으니깐요..난 당신과 사랑에 빠질 수 밖에는 없으니깐요..)

 

그녀는 몸을 등받이에 대고 여전히 고개는 창밖으로 향한채 그 가사만을 읊었다.

 

“서현씨 아름다운 여자던걸요?”

“질투같은거 하는 사람인가보지?”

“질투같은거 모르고 살았는데 서현씨만큼은 질투할만한 대상이네요.”

 

미소없는 딱딱한 얼굴로 지우가 말했다.

 

“준하씨는요.”

“응.”

 

그녀의 부름에 운전도중 잠시 옆을 돌아봤지만 여전히 그녀는 그를 쳐다보지 않은체였다.

 

“사랑하는 사람하고 사랑해주는 사람 중 선택하라면 누구 선택할거예요?”

“어? 글쎄..”

 

대답을 못하고있다. 이 남자가 지금 대답을 못하고 어떻게든 이 상황을 얼버무리려한다. 하지만 지우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무리 대답하라고 부추긴다고 해도 그는 분명 대답을 못할거였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택할거예요. For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난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으니깐요..(당신과)..)

 

you라는 말 대신 잠시 준하를 쳐다봤다.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자 차를 멈춘 준하는 고개를 돌렸을때 지우와 눈이 마주쳤다. 미소없는 딱딱한 얼굴. 웃음기 없는 차가운 눈동자.

지우가..날 사랑하는건 아닐까..

 

 

 

지우의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조차 생각나지않았다.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안에서 묵묵히 엑셀만 밟았던 것 말고는. 원룸아파트에 도착했을때 밤에 가리워진 골목은 그나마 꺼져있는 가로등 덕분에 더 어두워보였다.

 

“갈때는 에어콘 키고 가요. 더우니까. 그럼 다음에 봐요.”

 

또다시 환한 얼굴이었다. 성격이 변덕스러운걸까. 아니면 정말로 자기방어를 위해 저런 예쁜 미소를 쓰는걸까. 차문을 닫은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않고 아파트 안으로 사라졌다.

그래도 그녀와 있을때는 전혀 더운줄 모르고 있었다. 창문을 4개나 열었었지만 그 어느곳에서도 바람을 불어들어오지 않았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사라져버린 지금. 너무나 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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