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고 갓 들어간 회사였습니다. 은행에 가서 번호표 받는 것조차 잘 몰랐던 제가 경리업무를 맡게 되었으니 하루하루 예고편 없는 대형사고로 주위사람들을 경악케 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답니다. 당시 회계관리팀의 대장님이신 과장님과 저의 수호천사 역을 해주었던 큰언니가 없었다면 저는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회사를 뛰쳐나왔을 지도 몰랐을 일입니다. 그렇게 잇따른 대형사고에 저와 주위사람들의 반응이 무디어질 때 쯤이었습니다. 아마 회사입사한지 6개월여가 지난 여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 업무특성상 말일은 거래업체들의 월말결제로 인하여 눈코뜰새 없이 바쁘고 또한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돈이 입출금되는 시기라 더 긴장을 해야 할 시기였답니다. 그즈음에 걸려오는 전화 또한 결제를 독촉하는 거래처 전화인지라 의례히 " 오늘 내로 송금해 드립니다. " 라며 수화기를 들곤 하였답니다.
그때 걸려온 한통의 전화.
" 여보세요? ㅇㅇ회사 관리팀 김 ㅇㅇ 입니다. "
" 어.. 여기 인쇄사입니다. " 나이 지긋한 50 대 남자의 목소리였습니다.
" 아 네, ㅇㅇ 인쇄사세요. 아직 결재 안나서 오후에나 송금해드릴게요. "
저는 의례히 월말에 걸려오는 확인 전화이려니 생각하고 그렇게 말씀드렸답니다.
그런데 그쪽에서 대뜸하는 말이,
" 아 다른게 아니고 오늘은 결제계좌를 바꿔줘야겠어. 우리도 다른업체 결제를 해주어야
하는데 통장이체할 시간이 없네. "
그리고 덧붙여서 하는 말,
" 우리 미스김 여름휴가 보내줘야 되는데... 하하하 "
순간 섬뜩했습니다. 뒤에 덧붙여진 느끼한 멘트만 아니였다면 눈꼽만치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저는 외부사람의 목소리도 아직 익히지 못하였고 빈번히 일어나는 경리 업무 사고에 대한 지침도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선 의심이 되어 우리 고정 거래 인쇄사에 전화를 걸어 사장님과 직접 통화를 하였고 이차저차 사정을 간파하신 인쇄사 사장님께서는 자기네 회사명을 이용한 사기 수법이 아닐까 우려하시며 경찰에 신고를 하시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받아적은 계좌번호를 불러드리고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또 한번의 대형사고를 현명하게 처리했음을 과장님과 저의 수호천사 큰언니에게 횡성수설 자랑을 하였답니다. 너무나 당연한 업무처리임에도 제딴에는 회사의 손실을 막아내었다는 풋내기의 착각에서 말입니다.
그렇게 또 하나의 에피소드를 장식하며 여름을 마감할 즈음 경찰서에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ㅇㅇ경찰서입니다. 신고가 들어왔는데 증인으로 나오셔서 간단한 진술 부탁드립니다."
헉, 경찰서라니오? 제가 살아온 인생동안 경찰서 근처에 간 것이라곤 동네 놀이터에서 주은 빨간 삐라를 연필로 바꿔오기 위해 잠시 들렸던 것이 전부인데 말입니다. 전 수화기를 놓자마자 저의 수호천사 큰언니에게 달려가 경찰서 가기 싫으니 어쩌냐고 대성통곡을 하였답니다. 우리의 자상한 큰언니 왈 " ㅇㅇ 씨, 회사 땡땡이 치고 바람도 쎄고 좋지 뭐, 그리고 언제 이런 경험 하겠어? 재밌잖아? " 합니다.
하긴, 이런 경험 언제 하겠습니까? 그리고 허가받은 근무시간 이탈은 저에게도 구미가 당기는 소스였답니다. 그렇게 해서 찾은 경찰서는 조그만한 파출소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형사1계, 2계 등등의 (당시 기억의 자료가 빈약합니다.) 부서가 나눠져 있는 그리고 사복을 입은 형사 아저씨들이 왔다갔다하는 곳이었습니다. 아무튼 물어물어 찾아간 곳에서 만난 잘생긴 형사아저씨를 마주보고 진술은 시작되었습니다.
" 당시 전화를 받은 날짜와 시간? "
" 당시 전화상의 목소리는 남자였나? 나이대는? "
" 당시 전화상의 대화내용은? "
..... 이렇듯 진행된 진술과정은 30분 정도 진술서에 서명도 하고 지장도 찍고 이것저것
다하고 나더니 경리계로 데려가서는 교통비라고 흰봉투에 몇 천원 넣어서 주지 뭡니까?
으흐흐... 생각지도 못한 부수입에 그간 경찰서 방문에 대한 두려움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한결 느긋해진 걸음걸이로 경찰소를 나왔답니다.
그 이후로 그 사기꾼이 잡혔는지에 대한 후일담은 듣지 못했습니다.
단지 저에게는 풋내기 직장시절 즐거운 그리고 가슴 오그라드는 에피소드 중 하나로 기억된답니다.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자 그 직장을 그만 두었지만 저의 많은 추억이 담겨있는 첫 직장이 많이 그리워집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