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 우리는 모이기만 하면 하연이에게만 관심이 집중되네요. 하연이 너는 어렸을 때랑 똑같구나. 여리여리하게 생겼는데 이상하게 야물딱진데가 있어서 고집이 세었었지.”
아! 잊고 있었다. 몸이 약하고 늘 울보였던 곤주를 늘 데리고 다녔지만, 곤주의 어머니는 하연을 참 싫어했었다.
세 가족이 모이면 늘 약간 돌리는 분위기의 곤주집이었다는 것을 하연은 기억해냈다. 눈빛도 어투도 하연을 향한 가시가 숨어있었다.
“우리 하연이는 늘 애같죠 뭐. 곤주는 무지 예뻐졌네. Y여대 다닌다며 여대라 그런지 분위기가 확 다르구나.”
“여대라 그런게 아니라 내 딸이지만 곤주가 확연히 예쁘지않우. 그 유명한 Y대 퀸이야.”
딸 이야기가 나오자 곤주 어머니는 얼굴에 화색이 돌며 자랑을 해댔다. 곧 아저씨들은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사업 이야기를 시작하셨고, 아주머니들은 화려한 곤주 어머니의 음색을 듣고 계셨다.
말없이 먹다가 이따금 하연을 노려보는 태윤에게는 곤주가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선생님. 아니 누나. 진짜 거짓말 같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
“으응.”
태민의 말에 하연은 음식을 씹느라 볼을 우물대며 대답을 했다. 학생이자 기억 속의 귀여웠던 동생 민이.
그 엄청난 차이에 하연은 아직 적응을 못한 상태였다. 일단 그 깍듯하던 태민의 모습에서 귀염둥이 민이로 변신한다는 것이 좀...
“누난 나 다시 만난 거 반갑지 않아?”
기억 속의 어린시절 꼬맹이 민이처럼 이내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태민의 말에 하연은 마음이 흔들렸다.
“아니. 나도 반가운데 너 8살 때 보고 우리 못봤잖아. 솔직히 그 민이가 너라고 생각하니까 너무 어색해.”
하연은 포크를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럼 앞으로 우리 더 자주 예전처럼 만나고 보고 그래. 밥도 같이 먹고 영화도 같이 보고. 그러면 빨리 어색함이 가실 꺼야. 아~ 학교에서는 지금처럼 공손하게 할게.”
정말 8살 민이처럼 열심히 말을 하는 그의 모습이 조금은 안타까워서 하연이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야~ 신난다. 누나를 다시 만나다니 정말 꿈같아.”
하연의 웃음에 호들갑을 떨며 태민이는 하연이를 꼭 끌어안았다. 이 모습을 아이들이 보면 뭐라고 할까?
그 쪼그맣던 민이가 이렇게 나를 품에 쏙 안을 정도로 커지다니 세월은 참 놀라운 것이로구나. 그런 생각을 하던 하연은 태윤의 매서운 눈초리에 깜짝 놀라 얼어붙었다.
곤주가 무언가를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그는 냅킨을 찢어져라 잡고 하연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 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갑자기 또 태윤이가 일어선다. 잠시 어른들의 이야기가 끊어지고 이내 아저씨는 웃으며 태윤에게 말했다.
“그래, 눈치없이 젊은 사람들을 묶어놨구나. 정기사 불러서 같이 가거라. 술을 한잔 더 하든지 집에서 놀든지.”
“어머 그래그래. 하연이는 어머니도 오늘 우리집에 묵기로 하셨으니 꼭 얘네랑 같이 들어와. 아줌마가 선물도 사놓았어.”
곤주어머니와 태윤의 시선이 확 와서 꽂히는 걸 보고 움찔하며 하연은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도 약간 곤란한 표정으로 당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태윤이 아줌마의 손을 가리켰다.
“그래, 누나 우리집에 가서 놀자. 내일 일요일이니까 자고 가면 되잖아.”
“허허. 그새 친해진거냐? 이따가 집에서 보자꾸나.”
결국 네 사람은 나란히 태윤의 집 -정원이며 실내며 완전히 저택이었다- 에 와서 DVD를 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기분이 나쁜 것인지 태윤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바에서 가져온 양주를 홀짝이고 있었으며, 그 옆을 곤주가 꼿꼿한 자세로 지키고 있었다.
1주일 내내 긴장했던 데다 오늘 예기치 않았던 만남으로 인해 피곤했던 하연은 이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이윽고 하연의 고개가 푹 꺾이자 태민이 일어서며 말했다.
“곤주누나는 있다 집에 갈꺼지? 손님방에 하연이 누나 눕히고 올게.”
태민이 축 늘어진 하연을 안고 2층으로 올라가자 태윤은 잡고 있던 술잔을 쾅하고 내려놓았다.
“뭐가 그렇게 기분이 나쁜데?”
“....................”
“기다렸던 공주님이 아니라서? 나 기분 무지 나빠. 오빠가 왜 이제와서 하연이한테 휘둘려야해?”
“...........시끄럽다. 더 이상 말하지 마. 집에 가라.”
백을 확 집어들며 곤주는 일어서서 말을 했다.
“마음에 오래 두었던 사람인 건 알겠는데 지금 모습 진짜 유치한 거 알아? 오빠 애인은 나 류곤주라고.”
“움~ 푹신해서 기분좋다.”
너무 푹신해서 깃털에 파묻힌 듯한 기분을 느끼며 하연은 이리저리 뒤척였다. 약간 차가운 공기와 환한 햇살로 보아 아침인 듯 했다. 남의 집이라 처음에 찜찜했던 것을 생각하니 이렇게 푹 잠든 자신이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
“일어났어?”
문을 열고 들어서는 태민이는 흰색 니트에 약간 헐렁한 흰 바지를 입고 쟁반에 빵과 쥬스를 들고 나타났다. 어! 이거 완전히 영화잖아. 레이스 커튼 침대에서 일어나 꽃돌이의 아침시중을 받다니.
“나 언제 잠들었어? 네가 옮긴거야?”
“영화보다 금방 잠들어서 데려왔지. 내가 자는 거 한참 봤는데 꼼짝도 안하더라. 되게 피곤했나봐.”
하연은 쟁반에서 따끈따끈한 크로와상을 집어들며 한입 물어뜯었다. 그 동안 태민은 침대에 팔을 받치고 하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 누나 얼굴 닳겠다.”
“좋아서... 그리고 누나 그 잠옷 되게 잘 어울려. 내가 골랐다. 히~”
깜짝 놀라 내려다보니 어느새 하연의 몸에는 하늘하늘대는 공주님 잠옷이 걸쳐져있었다.
“뭐? 잠옷? 악! 뭐야? 언제 갈아입은 거야?”
“잠옷은 내가 안갈아입혔어. 아줌마가 오셔서 입히신거야.”
“뭐야~ 깜짝놀랐잖아.”
투닥대며 간단히 아침을 먹고 하연과 태민은 오락을 하기 시작했다. 아저씨와 아줌마는 부모님과 함께 근처로 골프를 치러 가셨다고 했다.
“이야~ 뭐야뭐야 이거 왜 이렇게 안돼!!!”
“누나가 바보라서 그런거야. 이렇게 하면 되잖아.”
옥신각신하며 게임을 하는 하연과 태민은 태윤이 문턱에서 그들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태윤은 어젯밤 늦도록 혼자 술을 마시다 잠이 들었다.
새소리 같기도 한 하연의 목소리에 그는 깨어 복도를 걸어나왔다. 문을 열려져있었고 흰색 레이스 잠옷을 입은 하연이 태민과 함께 정신없이 오락을 하고 있었다.
승부욕이 강한 고집스러운 입매, 동그란 커다란 눈. 아버지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서도 잊을 수가 없었던 얼굴이었다.
태윤의 첫사랑. 약하면서도 강하고 강하면서도 한없이 지켜주고 싶었던 그녀가 10여년을 훌쩍 뛰어넘어 자신에 집에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어? 윤이.. 아니 태윤이 일어났네. 거기서 뭐해?”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물어오는 하연은 게임을 하다 잠옷의 한쪽 어깨가 다 흘러내려있었다. 태윤은 말없이 성큼성큼 걸어가 입고 있던 검회색 빛의 자신의 잠옷 상의를 걸쳐주었다.
“칠칠맞기는 여전해요.”
하연의 몸에 걸쳐진 태윤의 잠옷은 그의 온기가 아직 남아있었고 그의 강한 향수내음이 함께 남아있었다. 하연은 아침인데도 약간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말 수 없는 까무잡잡한 소년, 늘 자신의 뒤에 서있던 어린시절 윤이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주말이라 논다고 1편밖에 못썼어요. 내일이나 모레 1편 더 들고 올께요. 즐거운 주말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