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일단 돌아오자 정신없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실습 때문에 한달간 빠졌던 수업에 내야 할 대체 레포트이며, 기말고사 준비, 각종 과제물과 시험준비로 바쁜 날들이 계속되었다.
“우리 도서관에서 지금 시론 자료 복사하고 있거든.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
미라네를 기다리며 하연은 까페테리아 의자에 앉아 밖을 구경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인데도 오전을 얼마나 정신없이 보냈는지 기운이 쫙 빠졌다.
저기서 남자들 한 무리가 걸어오는데 그 주변에는 소리를 지르거나 사진을 찍어대는 여자들이 한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남자들 중에서도 제일 키가 크고 가장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다름아님 태윤이었다!!!!
같은 학교라더니 4년동안 한번도 못보았는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하긴 그 전엔 보았다 하더라도 그냥 유명한 아이구나 하고 지나쳤겠지.
태윤은 어렸을 때도 좀 눈에 띄기는 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멋진 남자가 되어있는 태윤은 낯설면서도 친구라는 것이 뿌듯함을 느끼게 하였다.
저번 갑작스러운 통화 이후로 처음이니 무지 오랜만이었다. 왠지 얼굴이 자세히 보고싶어져서 기웃대는 하연의 얼굴 위로 익숙하지만 기분나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오랜만이다. 너 내가 학교에서 보면 가만히 안둔다고 얘기했지?”
“...............송민재...........”
하필이면 이렇게 혼자 얘들을 기다리고 있을 때 이 녀석을 만나다니. 민재는 하연의 팔을 꽉 움켜잡고 질질 끌다시피 해서 2층 까페테리아에서 주차장 쪽으로 내려왔다.
하연은 버둥거리면서 민재의 팔을 떼어내려 노력했다.
“이거 놔! 나는 더 이상 너랑 할 얘기.....”
하연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주저앉아 민재를 보는 하연의 뺨이 금세 새빨갛게 부어오르고 입술에서 피가 약간 흘러내렸다.
“너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냐? 너 좋을대로 하고 무사할 줄 알았어? 빨리 타!!”
휘청대며 민재의 팔에 이끌려 일어서던 하연은 누군가 더 강한 힘으로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을 느꼈다.
탄탄한 가슴과 강인한 팔, 그리고 향기가 누구인줄 쉽게 알게 만들었다. 한쪽 팔로 하연을 꽉 끌어안은 태윤은 다리로 민재의 배를 정확히 차버렸다.
“컥! 야 이 새끼 네가 뭔..”
민재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구경꾼 속에서 나타난 미라와 수정이가 하연을 부축하며 뒤로 물러서자 태윤은 민재를 사정없이 두들겨패기 시작했다.
민재는 일방적으로 차이고 맞고 바닥에 쓰러지기를 되풀이했다. 결국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자 입고 있던 상의를 벗으며 태윤이 거칠게 그 옆에 침을 뱉았다.
“앞으로 한번 더 얘 옆에 얼쩡대는게 보이면 그때는 두발로 못걷게 만들어주겠어. 알아들어?”
거의 의식이 가물가물하는 듯이 보이는 민재에게 다시 주먹을 날리려는 태윤의 팔을 하연이 붙들었다.
“그만해!!”
거칠게 숨을 내몰아쉬던 태윤은 그런 하연을 돌아보더니 팔을 꼭 쥐고 성큼성큼 구경꾼을 갈라놓으며 걸어갔다.
“아!아야~”
자신의 차에 하연을 태운 태윤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이따끔씩 운전대를 내리치며 어디론가 향했다.
잠시후 얼음팩과 연고를 사온 태윤은 하연의 부풀어오른 뺨을 식혀주었다. 입술과 안쪽 뺨이 찢어졌는지 심하게 따끔거리며 아팠다. 연고를 바르고 얼음팩을 대고 있자 눈 아래까지 부풀었던 뺨이 조금 식는 것 같았다.
하연은 눈을 감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 일어나서 꿈인지 생시인지 아직도 멍했다. 민재의 출연과 그에게 뺨을 맞았다는 충격과 어린 시절처럼 자신을 구해주기 위해 나타난 왕자님 같은 태윤.
눈을 감은 하연 위로 태윤의 기척이 느껴졌다. 하연은 온몸의 신경이 그쪽으로 쏠리는 듯했다. 태윤의 팔은 의자를 뒤로 젖혀주고 얼음팩을 자신의 손으로 넘겨받아 조심스레 대어주었다.
"......그런 남자를 사귀냐?"
"............................"
부끄럽기도 하고 서럽기도 해서 하연은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랑 똑같아. 사람을 쉽게 믿고 마음을 쉽게 주지. 바보는 아닌 것 같은데 완전히 멍청이야."
"윤태윤!! 너 말이면 다.........."
발끈하며 일어나려던 하연은 깜짝 놀라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귓가를 간질이며 낮은 태윤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정말 놀랐잖아. 네가 쓰러지는데 진짜 놀랐단 말이야.”
하연은 이렇게 얼음팩을 하고 있는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붉어진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까.
그리고 덩달아 민재한테 한대 맞은 것이 잘된 일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이렇게 태윤과 함께 있을 수 있으니까. 좁은 차 안을 떠도는 태윤의 향기. 가까이서 느껴지는 체온. 하연은 자꾸만 가슴 한 구석이 간질간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하연!! 너 괜찮아?”
다음날 미라가 하연이 내팽겨두고 간 책과 핸드폰을 건내며 걱정스레 말했다.
“하여튼 그거 송민재 인간쓰레기 같은게 네가 때릴 데가 어디있다고 이렇게 쎄게 때리니. 너 괜찮은거야?”
“응 괜찮아.”
"괜찮긴. 아직도 뺨이 많이 부었다, 야~"
아닌게 아니라 붓기가 덜 빠져서 눈 아래까지 부어 하연은 몹시 부끄러웠다. 시험준비만 아니라면 며칠 더 쉬고 싶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야~ 조용히 해. 딴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
"내가 얘기해서 쳐다보는건 줄 아냐?"
"응?"
"어제 너 그렇게 가고 난리났었어. 윤태윤 팬들을 비롯해 온 학교가 너 때매 수근수근 난리가 났었다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누구길래 윤태윤이 자기 여자라고 화를 내고 사람까지 팼냐고 난리가 났었어. 덕택에 우리까지 얼굴 좀 팔았지. 모르긴 해도 송민재는 이제 학교다니기 좀 힘들껄."
"....................."
"근데 너 진짜 윤태윤이랑 무슨 관계야? 우리 실습 나갔을 떄 윤태민도 윤태윤 동생이라며? 그 형제랑 어떻게 아는 사이야?"
하연은 간단하게 이제껏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태윤, 태민, 곤주와 관련한 어린시절과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된 이야기를 들은 미라와 수정, 현재는 고개를 끄덕끄덕였다.
"그러면 아마도 Y대 퀸이 류곤주라는 걔인가보네. 근데 둘이 사귀는 거 아냐? 윤태윤은 그럼 곤주랑 사귀면서 너한테 마음이 있는거야?"
"사귀는 것 같은데 확실히는 잘 모르겠어. 그리고 태윤이가 나한테 마음있니 그런말 하지마. 그냥 친구야. 어렸을 떄 알던 친구."
"하지만 어제 그 분위기는 단순한 친구가 맞은데 대한 화풀이가 아니었다구. 내가 보기에 윤태윤이 뭔지는 몰라도 너에게 맘이 좀 있는 것 같던데.."
하연은 문득 어제 차 안에서 태윤의 속삭임이 기억나 얼굴이 달아올랐다. 수정이는 짖궂게 웃으며 말했다.
"요고요고 뭔가 있긴 있구만. 윤태윤에 윤태민이라. 기집애 복이 터졌구만. 언니들이 열심히 응원해 줄테니 잘 되면 윤태윤 주변의 꽃돌이들 두마리만 물어주기다. 알았지?"
"물어주긴 뭘 물어줘!!!! 글구 잘되고 말고 할 것도 없다니까 이러네, 얘들이!!!"
정말 어제 일이 소문이 크게 나긴 난 모양이었다. 도서관에 앉았던 하연은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이 오가고 수근대서 결국은 일찍 집으로 향해야만 했다. 사람들의 시선과 수근대는 소리.
내 마음은, 내 머리는 아직 어린시절과 지금은 제대로 연결도 못시키고 있는데, 태윤이와 태민이의 행동과 말, 그리고 주변 사람들 때문에 더욱 혼란스럽기만 했다.
지하철 입구를 빠져나와 아파트 입구로 언덕을 오르고 있는 하연의 뒤를 자동차 불빛이 비추었다. 하연은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옆으로 비켜섰지만 차는 하연의 옆에 스스르 멈춰섰다.
"잠깐 시간 좀 내줘요."
태윤과 같은 빨간 스포츠카를 탄 곤주가 하연에게 말을 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