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과가 생각보다 좋아서 다음 주말쯤에는 퇴원해도 되실 것 같은데요."
회진을 돌던 담당의사의 말에 하연의 가족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정말이세요? 진짜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감사하긴요, 가족들의 지극한 간호와 환자의 의지 때문이죠. 재활치료는 꾸준히 받으셔야 합니다."
하연의 가족들은 서로의 손을 붙잡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벌써 입원한지 1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회사의 사정은 계속 좋지 않았고, 하연은 2학기 등록을 포기했으며, 어머니도 지쳐가고 있던 중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소식에 이들은 너무나 즐거워했다.
"그럼 엄마 다녀올께. 아버지 잘 돌봐드리고 있다가 태윤이 오면 같이 나가서 밥이라도 먹으렴."
"제가 알아서 할께요. 조심해서 천천히 다녀오세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배웅하는 하연의 모습에 하연의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언제부터인가 딸의 얼굴에 늘 머물러 있던 웃음이 사라져있었다.
무엇 때문에 고민하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이 부모에게는 큰 고통이었다.
점심을 먹고 무료한 오후는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에 하연은 태윤이일 것이라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
"오랜만이구나. 못볼 것을 봤다는 얼굴은 치우고 안으로 들어가게나 좀 해주렴."
하연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하얗게 질려서 자신을 벽쪽으로 밀고 병실 안으로 들어오는 곤주 모녀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런이런... 생각보다 상태가 좋아보이시는군요. 애 아버지가 알면 슬퍼하겠어요. 남의 것을 탐내는 사람은 좀더 모진 꼴을 당해야 하는데..."
곤주의 어머니는 호기롭게 들고 온 과일 바구니를 테이블에 놓으며 하연의 아버지에게도 말을 건냈다. 뜻밖의 방문에 하연의 아버지도 질린 듯이 곤주의 어머니를 볼 뿐 선뜻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당장 나가주세요. 아버지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셨는데..."
하연은 입술을 꽉 깨물며 침대 쪽으로 달려와 곤주의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곤주의 어머니는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말했다.
"누구 때문에? 하... 네 아버지는 그이 것을 탐내서 태윤의 아버지와 손을 잡았고, 너는 곤주의 것을 탐내서 태윤이를 빼앗지 않았니?"
".............................."
또 저 이야기였다. 하연은 정말 가슴을 쥐어뜯고 싶었다. 무엇이든 다 돌려줄테니 제발 더이상 자신들을 괴롭히지 말라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다.
"너나 너의 아버지가 아직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걸 보니 좀더 강력한 선물을 보낼 걸 그랬구나.
사고를 가장한 사망이라던가... 자금압박으로 인한 뇌출혈은 너무 약했던 것 같아."
"어떻게....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파리나 모기 목숨이 아니라 사람의 목숨이라구요. 우리 아빠라구요."
하연은 목구멍에서 터져나오는 것 같은 비명을 질렀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만 돌아가주시오. 이제 그쪽과의 인연은 끝난 것 같고, 다시 얽히거나 보고 싶지 않으니 가서 그렇게 전해주시오. 싸움은 계속 되겠지만 다시는 보고싶지 않다고..."
하연의 등 뒤에서 아버지의 억눌린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친구의 배신과 가족의 아픔. 아버지도 얼마나 아프실까.
하연의 아버지의 말에 곤주의 어머니는 테이블에 담배를 눌러끄며 일어섰다.
"그래요. 오늘은 돌아가죠. 하지만 두 부녀의 실수에 대한 대가는 치뤄야하지 않겠어요? 우리집을 무시하고 자존심 상하게 한 대가는 톡톡히 치뤄야할겁니다."
"그럴일은 없을겁니다."
문가에서 단호하고 힘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태윤이 병실 문 앞에 서 있었다. 태윤은 들고 온 서류봉투와 음식가지들을 내려놓고 곤주의 어머니와 곤주를 병실 밖으로 끌어냈다.
"남의 양심이나 대가를 운운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셔야 할 것 같네요."
곤주의 어머니가 문을 닫으려는 태윤의 뺨을 세차게 올려붙였다.
"네가 감히.... 건방진 것....
곤주 때문에 지금은 참고 있는거다. 너도 남자고 사업을 할 사람이면 현명한 판단이 어떤 것인지 알겠지.
모든 걸 잃고 거지 꼴로 기어들어오기 싫으면 곤주가 아직 널 마음에 두고 있을 때 포기하고 돌아오너라.
회사일이든 빚이든 모든 걸 해결해주지."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그럴 일... 절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참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태윤이 단호하게 말을 마치고 문을 닫는 순간 하연은 흔들리는 곤주의 눈빛을 보았다. 태윤은 문을 닫고 돌아서며 황급히 안쪽으로 걸어들어왔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하연아 너 괜찮아?"
"자네야 말로 괜찮은가?"
아버지의 안색도 좋지 않았지만 태윤은 반지에 긁혀서 뺨에도 가느다란 상처가 나 있었다. 하연은 아버지의 말에 놀라 황급히 수건을 적셔 태윤의 뺨에 대어주었다.
"하연아... 다친 데 없지?"
자신의 뺨에 수건을 대어주는 하연의 손을 태윤이 가만히 자신의 손으로 감싸쥐었다.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손등으로 전해오는 온기에 흠칫 놀라며 손을 빼었다.
"다 끝난거야?"
아버지와 태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밖에 나와있던 하연은 짐을 챙겨 나오는 태윤을 보며 말을 건냈다.
"응. 아저씨 방금 잠드셨으니 좀더 있다가 들어가."
태윤은 하연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까 많이 놀랐지?"
".............................."
하연은 아무말없이 불안정하게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책의 페이지를 이리저리 넘겼다. 태윤은 그런 하연의 손을 꼭 잡았다. 놀란 듯이 태윤을 보며 손을 빼려 하는 하연에게 태윤이 말했다.
"........네가 많이 힘들어 하는 거 알아. 너 때문이 아니야...
다 나 때문이라고 생각해. 네가 이렇게....자꾸만 힘들어하고....
나를 피하려 하는 거... 보기가 너무 괴로워....."
"......................."
자신 못지않게 까칠해진 태윤의 모습에서 그의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태윤도 충분히 고통스럽고 힘들다는 것을 하연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한번만 나에게 기회를 줘. 기다릴께."
태윤은 그 말과 함께 하연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고 일어나 복도를 걸어갔다. 강하고 탄탄하게만 보였던 태윤의 어깨가 축 쳐져 있다고 느끼며 하연은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을 펴보았다.
가을축제에서 공연하는 태윤의 밴드 공연 안내였다. 보컬 태윤의 마지막 공연이라는 안내와 함께 토요일, 7시, 소공연장이라는 간단한 멘트가 담겨있었다.
"아저씨,아줌마~ 저희 왔습니다."
다시 시간이 흘러 일주일이 지나고 토요일이 되었다. 태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오셔서 하연이네 가족은 지긋지긋한 병원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와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나자 미라와 수정, 현재가 들이닥쳤다.
"병원에 계실 때 자주 못찾아뵈서 집으로 찾아왔어요."
"수험생들이 그 정도면 자주 온거지. 어쨋든 고마워."
함께 과일을 먹고 수다를 떨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문득 현재가 말을 꺼냈다.
"아저씨 피곤하실텐데 저희는 이만 가볼께요. 대신 하연이 좀 빌려주세요."
"응? 하연이?"
무슨 말인가 해서 눈을 똥그랗게 뜨고 의아해 하는 하연을 보며 수정이가 말을 이었다.
"오늘 학교 축제거든요. 비록 같이 졸업은 못하겠지만 마지막 축제를 함께 보내고 싶어서요."
그러고 보니 벌써 시간이 6시였다. 하연은 태윤이 준 초대장을 생각하고는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벌써 1달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달라고 한 태윤이었다.
"그리고 하연이 기다릴 사람도 있거든요."
마지막으로 미라가 하연이 받은 것과 같은 초대장을 하연의 부모님께 보여드리며 말을 맺었다.
"하연아, 친구들과 가서 재미있게 놀고 즐거운 추억을 많이 만들고오렴."
초대장으로 보던 아버지가 먼저 말을 건냈다.
"그리고... 가족에 대해서는 걱정 안해도 돼. 언제나 네가 행복하다면 아빠엄마도 행복해.
네가 환하게 웃으며 행복해하는 모습이 우리에게는 가장 기뻐. 자꾸 자신을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은 어머니의 말에 하연을 고개를 숙였다. 한달 동안 아버지가 쓰러지신 후 힘없이 웃지도 않고 있었던 자신을 걱정하셨을 부모님의 마음에 가슴이 아팠다.
"근데 이거 너무 화려한 것 같은데...."
하연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가겠다는 하연을 협박하고 얼르며 친구들은 1시간여 동안 꾸며놓았다.
거울 속의 하연은 엷은 화장을 하고, 분홍색 섀도에 분홍빛 볼터치를 한 화사한 얼굴에, 진분홍의 탑과 가디건, 그리고 하얀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게다가 들고 있는 가방과 구두는 황금빛에 머리까지 고데기로 곱슬곱슬하게 말아 꼭 잘 꾸며놓은 인형같았다.
"이건 오바야. 너네 모습을 보라고..."
옷을 갈아입으려는 하연을 수정과 미라가 질질 끌고나가 현재가 미리 시동을 걸어놓은 차에 태웠다.
"야~ 왜 이렇게 늦었어. 나 목빠질 뻔 했다. 시간 내에 갈 수 있을지 몰라."
"못가면 현재 너 죽어!!!"
수정과 미라의 협박 덕분이었는지 네명은 함성과 열기가 가득 찬 소공연장에 7시 40분쯤 도착하였다. 미라가 무언가를 내밀자 안내하는 사람이 가득 찬 군중을 뚫고 네 명을 가장 앞자리로 안내해주었다.
자리에 앉은 하연은 바로 앞 무대에서 노래하는 태윤을 볼 수 있었다. 선선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땀을 흘리며 노래하는 태윤은 강하고 섹시하고 멋졌다. 그렇지 않아도 주변의 사람들이 태윤의 이름을 외치는 바람에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이윽고 노래가 끝나고 땀을 닦는 태윤의 눈이 하연에게로 향했다. 알듯 모를듯 미소를 지은 태윤은 수건을 내려놓고 무대 뒤로 들어가버렸고 이윽고 무대의 불이 모두 꺼지고 잔잔한 반주가 흘러나왔다.
무대 끝 쪽에서 핀 조명이 어느새 검은색 아르마니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머리를 정리한 태윤을 비추었다. 폭발적인 함성에 태윤은 무대 한 가운데로 걸어나와 입술에 살짝 손가락을 대었고 함성은 이내 잦아들었다.
스탠딩 마이크를 잡은 태윤은 나직한 목소리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보고 싶어요 투정부리던 그대를
보고싶어요 내게 기대 잠든 그대
날, 기다림조차 행복한 미소로만
가득 채워준 그대를
웃어보아요 그대는 그게 예뻐요
내가 말하면 얼굴을 가리곤하죠
날 너무나 기쁘게 했던
그대를 다시 느낄 수 없나요
나에게만 썼던 그 말투
나를 닮은 그대의 습관까지도
두 눈을 감아도
이젠 그대 얼굴 그릴 수 없지만
정말 너무 보고 싶어요.
듣고 싶어요 재잘거리던 목소릴
그땐 귀찮아 고갤 끄덕이곤 했죠
날 보면서 똑같은 얘길
들려주던 그대가 그리워
나에게만 썼던 그 말투
나를 닮은 그대의 습관까지도
두 눈을 감아도
이젠 그대 얼굴 그릴 수 없지만
정말 너무 보고 싶어요.
두 눈을 감아도
이젠 그대 얼굴 그릴 수는 없지만
정말 너무 보고 싶어요
그댈 너무 보고 싶어요
노래와 함께 무대 뒷쪽 편에 불이 들어오며 슬라이드가 한장씩 뜨기 시작했다. 하연은 비명이 터져나올 것만 같아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어린시절 태윤과 함께 찍었던 사진이 차례로 영사기에 뜨기 시작했다. 별장에서, 바닷가에서, 태윤의 집에서, 하연의 집에서.... 어느 곳에 가든 함께 였던 태윤과 하연의 모습이 차례로 비춰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모습이 차례로 뜬 다음, 화면을 온통 채울 만큼 환하게 웃고 있는 하연 자신의 모습이 비춰졌다. 다시금 두 사람의 마음을 확인했던 그 별장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반주가 잔잔하게 흘러나오며 태윤이 마이크를 잡고 말을 시작했다.
"어린시절부터 사랑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른이 되면 헤어질 일도 슬프게 할 일도 없을 것 같아서 빨리 어른이 되어서 평생을 함께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었는데도 그녀가 나를 돌아봐주었는데도 마음 아프게 하고 눈물 흘리게 해버렸습니다. 그녀가 떠날 것 같아서..........나는 너무나 두렵습니다.........
그녀를 또 다치게 할까봐, 저 웃는 얼굴을 지켜주지 못할까봐 떠날까도 생각해보았지만, 그녀가 없는 인생은 제게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태윤은 무대에서 뛰어내려 하연에게로 걸어왔다. 하연 앞에 무릎을 꿇은 태윤이 천천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연아....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너를 포기할 수 없어.
네가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존재해도 나는 너를 사랑할 수 밖에 없어.
네 웃는 얼굴을 평생 옆에서 지켜줄 수 있도록 나를 받아주겠니?"
하연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끄덕이며 태윤의 손을 잡아주었다. 태윤은 하연을 꼭 끌어안은 채 그 자리에서 몇 바퀴를 돌았다.
소공연장을 가득 매운 사람들의 함성과 비명소리를 들으며 두 사람은 쏟아지는 빛 아래서 입을 맞추었다.
하연은... 태윤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서로를 포기하지 않겠노라고 맹세했다.
어제 글 많이 기다리신 분 있죠? 죄송해요. 제가 어제부터 너무 심하게 아파서 지금도 자판이 잘 보이질 않을 정도예요.
오늘도 못올릴 뻔 했는데 너무 죄송해서 써 놓았던 부분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두 사람이 다시 하나가 되는 부분이라 잘 쓰고 싶었는데 죄송해요.
즐겁게 감상하시구요, 여기 나오는 노래는 조규만의 [보고싶어요]라는 노래입니다. 제가 음악도 함께 듣게 해드리고 싶은데 이런거 잘 할 줄을 몰라서요. 음악주소를 알수 있으신 분은 제게 좀 알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시고 오늘도 답글, 추천 많이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