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시기적절한 남자(37)
나는 엄마가 우리의 대화를 듣지 않기를 바랬지만 작은 원룸에서 나와 현수의 대화는 너무도 선명하게 엄마의 귀에 들렸음에 분명하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현수의 고양이, 레종2를 받아주느냐 마느냐였다.
현수의 입장을 생각하면 고양이를 받아줘야 하지만 엄마의 눈치를 보자니 그냥 덥썩받는 것도 문제가 있을 듯했다.
현수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엄마가 오기 전에 왔다면 고양이 정도는 얼마든지 핑계를 댈 수 있었다. 엄마가 만약 나와 현수, 그리고 레종과 있었던 일을 안다면 내가 레종2를 받아주는 것을 이해하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내가 레종2를 받아준다면 엄마는 당연히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집주인이라고요?"
이 상황에서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엄마였다.
"아..네."
"지금은 어디 사세요?"
엄마는 정중하게 물었다.
그 사이 레종2는 현수의 품에서 떨어져 나와 집 안 어디론가 사라졌다. 전의 레종처럼 말이다.
"제가 직장 때문에 이 집을 샀는데요. 이젠 직장이 다시 멀어져서 부모님과 살 던 집에서 다니고 있어요. 그래서 세를 놓게 된 거고요. 그 때 고양이를 키웠었는데 다시 키우고 싶어서요..."
오호, 현수! 나름대로 현명한 대답을 해주었다. 눈치 없이 그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이실직고하지는 않았다.
시기적절한 타이밍을 맞추는 것은 인간으로서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 사태에 대응하는 것은 역시 인간의 현명함이 작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혹시 현수가 주책없이 그 동안의 일에 대해 말하지는 않을까 속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면 미리 상의를 했어야지요. 아무리 집주인이라고 해도 무례한 거 아니에요?"
상황을 모르는 엄마의 지적은 논리적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우연히 인터넷을 보다 보니까 제가 전에 키우던 고양이와 똑같은 고양이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어서..."
"세상이 많이 바뀌었네요. 우리 때 고양이는 쥐나 잡아먹으라고 키웠는데..."
엄마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엄마가 고양이를 애완동물로 키우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네...제가 민아씨 어머니한테 뭐라고 드릴 말씀은 없지만, 너무 제입장만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민아씨가 1년 계약이고 그 후에는 제가 다시 들어올 생각이라 임시로 맡긴다고 하는 것으로 이해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현수는 그만큼 레종2에 절실했던 것일까 생각보다 침착하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었다.
"고집 센 건 너랑 닮았다...."
엄마의 말 한마디가 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종료시키는 것은 나한테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요. 그럼 제가 이 고양이를 키우는 대신 월세를 깎아주세요."
나는 전과 비슷한 상황을 연출했다. 나는 전의 레종을 생각해서도 레종2를 받아줄 용의가 충분히 있었다. 나도 레종이 생각나서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같이 있는 엄마를 의식해서는 어느 정도 연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현수와의 동거가 끝난 후에 월세를 제대로 내고 있는 터라 그 말은 현수에게 진심으로 들릴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난 얼마나 치사한 인간이 되는 것인가?
하지만 지금으로선 이 방법이 가장 무난해 보였다.
"얼마나 깍아드릴까요?"
현수는 정말로 협상을 하는 건지 아니면 내 작전을 눈치채고 협조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나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30만원이요."
난 전과 같은 가격을 불렀다. 그리고 덧붙였다.
"고양이 사료비도 있을테고요. 저의 노력도 들어가고요."
"네..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레종을 두고 가지요."
그 말을 남기고 현수는 어머니에게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사라졌다.
"너 엄마한테 시장에서 콩나물 깎는 거 보고 뭐라고 하더니 고양이를 갖고 월세를 깎다니...역시 혼자 살다보니 생활력이 강해졌나보다..."
엄마의 말로 미루어보아 내 계획은 성공적인 것 같았다.
나는 내일 회사에 가서 현수에게 아까 그것은 모두 연극이었다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내가 침대에서 자라고 아무리 말해도 라꾸라꾸 침대에서 자겠다고 고집을 피워 어쩔 수 없이 그러라고 했다. 엄마는 이 집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손님처럼 행동했다. 그런 엄마를 보고 있노라니 나는 엄마와 아빠가 마련한 집에서 너무도 당당하게 살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혼자 살고보니 사람이 사는 공간을 위해 얼마나 많은 비용과 노력이 들어가는지 깨닫게 되며 그 동안 아무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안락한 집을 마련해준 엄마 아빠가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아침이 되자, 엄마의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민아야. 출근해야지..."
엄마는 역시 엄마답게 아침을 준비해놓고 나를 깨웠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엄마의 깨우는 목소리인가...학교 다닐 때부터 직장 다닐 때까지 엄마는 늘 아침을 준비해놓고 날 깨워주었다. 혼자 살게 되면서 아침마다 날 깨워주던 엄마의 목소리가 그리울 때가 많았다.
엄마의 그 아침 준비가 당연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아침마다 혼자 눈뜨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엄마가 얼마나 많은 노력으로 매일 아침 규칙적인 시간에 아침을 준비했는지 알게 되었다.
차마 엄마 앞에서 아침을 먹지 않는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꾸역꾸역 밥을 입속에 넣고는 서둘러 출근 준비를 했다.
그리고 원룸의 열쇠는 엄마에게 건네주었다.
"엄마가 나보다 집에 일찍 들어올 같으니까 이 열쇠 쓰고 집 앞의 비밀번호는 5454야. 잊어버리지마."
나는 황급하게 엄마에게 한마디 남기고는 회사로 갔다.
나는 현수에게 상황 설명을 하려고 하는데 출근을 안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점심 시간 가까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자 나는 중국팀장에게 물었다.
"현수씨 오늘 출근 안해요?"
"아냐. 출근 했다가 비자 찾느라고 중국 대사관 갔어. 다음 주 학생들 데리고 출국 준비해야 하잖아."
그러고보니 중국팀장이 혼자가 아니라 현수와 같이 중국에 갈 수 있다고 기뻐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네. 전 또 팀장님 등쌀에 포기했는지 알았죠."
중국 팀장은 아랫 사람을 힘들게 일시키기로 유명했다.
"이런, 내가 지금 얼마나 조심하고 있는데 그런 소리를...안 그래도 방금 점심 시간에 맞춰서 못올 거 같으니 먼저 식사하라고 전화왔어. 이렇게 친절한 남자한테 내가 그럴리가 있겠어?"
중국 팀장은 현수가 아주 마음에 드는 듯했다.
혹시 나는 중국 팀장이 이성적 관심이 있는게 아닌가, 순간 생각했지만 어제 현수와 같이 영화를 보러왔던 여자가 생각나서 현수가 이미 여자 친구가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현수가 돌아오자 상황 설명을 하려고 메신저로 말을 건넸다.
'중국대사관은 잘 다녀왔어요?'
'네.'
'실은 어제 레종2때문에 좀 곤란했어요. 어머니가 가출을 했거든요.'
'하하. 내가 민아씨와 닮은 게 아니라 어머니가 민아씨를 닮았네요. 가출이라...'
'네, 상황이 그렇게 됐어요.'
'그런데 여자 친구 생겼어요?'
'아. 그 여자분이요?'
'네. 잘 어울리던데...'
'레종2 주인이에요. 제가 감사의 뜻으로 영화라도 보여주려고 했던 거죠.'
여자 친구가 아니라는 말에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또 현수는 혹시 레종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 그렇군요. 그리고 어제 월세 얘기는 어머니가 계셔서...'
'네. 알아요. 민아씨도 레종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아요.'
'네. 전 또 너무 야박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아니에요. 뭐 저도 월세를 안받아도 레종을 받아주면 황송하죠.'
그 순간 정훈에게 걸려오는 바람에 나는 현수와 대화를 중단했다.
"민아야, 미안하다. 연락 못해서...오늘 만나서 얘기할래?"
집에 가서 해결하고 온다던 정훈은 말 그대로 해결한 걸까?
나는 회사고 해서 그냥 짧은 대답으로 전화를 끝냈다.
그리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 약속이 생겨서 늦을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