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음..”
핸드폰 알람소리가 잠시 울리다가 이내 꺼졌다. 자신의 건너편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알람을 끄려고 돌아눕던 하연은 따뜻한 촉감에 옆에 누운 사람의 몸에 다리를 걸치고 팔로 꼭 끌어안았다.
이렇게 큰 인형이 내 방에 있었던가. 아직 잠이 덜 깬 하연의 머릿 속을 아릿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하연은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밀어올렸다.
“잘 잤어?”
태윤이 아침햇살을 등지고 하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침인사를 했다. 언제쯤 이런 풍경에 익숙해질까.
하연은 편안함과 동시에 설레임을 느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자신의 입술을 파고드는 태윤의 부드러운 입술과 약간 서늘한 아침공기를 뚫고 들어오는 따스한 손길.
“하연이는 왜 안내려오니? 아파?”
상큼한 샤워코롱 내음을 풍기며 셔츠에 타이까지 맨 태윤이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왔다. 함께 내려오지 않는 하연을 묻는 어머니에게 태윤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음... 좀 나른한가봐요. 있다가 따로 먹겠다네요.”
태윤의 붉어진 얼굴에 어머니는 알겠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으셨고, 아버지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신혼인데 우리 신경쓸 것 없다. 하연이 몸도 약하니까 무리나 시키지말고...”
“네.”
태윤은 이내 창백해지며 자신의 눈을 피하는 태민의 모습에 웃음기를 거두며 자리에 앉았다.
“저... 아버지.. 전에 말씀드렸던 거 허락해주세요.”
태민의 말에 태윤의 아버지는 부지런히 움직이던 수저를 놓았다.
“나나 네 어머니는 왜 네가 굳이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치겠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일본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으니 고등학교는 한국에서 온전하게 마치면 좋지않니.”
태민은 태윤의 약혼을 즈음해서 계속해서 자퇴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다지 열심이진 않았지만 즐거워보였던 학교생활을 돌연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친 후 외국의 대학으로 진학하겠다는 것이었다.
“.......빨리 대학에 가고 싶어요. 집을 떠나서 혼자서 생활해보고 싶기도 하구요. 어짜피 한국에서 대학 안갈꺼면 일찍 준비하는 것도 좋잖아요.”
“하지만 태민아. 그 나이에 맞게 누리고 즐겨야 할 것도 있는거야. 그걸 포기하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태윤의 말에 태민의 서늘한 눈동자가 태윤에게로 향했다. 태민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형... 나한테는 더 이상 그런 거 없어.”
쓸쓸한 동생의 눈동자가 눈물을 머금고 있다고 느낀 것은 태윤 뿐이었을까. 이내 태윤의 아버지도 못마땅한 듯 주름을 그리며 일어나버렸고 남은 어머니만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갑자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막내라서 정도 많고 덩치만 컸지 귀엽고 속 깊은 아이였는데... ”
“....태민이도 생각이 있으니 그런거겠죠. 너무 다그치지 마세요.”
태윤의 습격 덕분에 한시간쯤 더 퍼져있던 하연은 비틀대며 일어나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태윤의 아버지와 태윤, 태민은 모두 회사와 학교로 나가버리고 거실에는 태윤의 어머니만 남아있었다.
“어머니, 아침에 죄송해요.”
하연의 말에 태윤의 어머니는 웃으며 하연을 안고 토닥였다.
“죄송하긴... 태윤이가 너무 괴롭히면 내게 말해. 널 어찌나 좋아하는지 우리는 네가 힘들까봐 걱정이지.”
저도 좋긴 한데요.. 라는 말을 하연은 목 너머로 꿀떡 삼켰다.
“밥먹어야지.”
어린 나이에 들어온 며느리라고 딸보다 더욱 하연을 아껴주시는 어머님이셨다. 하연이 늦은 아침을 먹어도 늘 식사시중을 들어주시고 이야기도 나누니, 고부관계가 아니라 꼭 모녀같았다.
“오늘은 별일없으니 쇼핑이나 갈까? 너 옷장보니까 겨울옷도 별로 없던데 옷도 좀 사고, 가방도 한개 사자. 대학원 다니려면 좀 갖춰야하지 않겠니.”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하연은 겨울계절학기 신청과 대학원시험을 봤다. 바로 임용고시를 보지는 못하지만 이왕 늦어진 것 좀더 공부를 하고 싶다는 바람을 태윤이 적극적으로 밀어주어서 계절학기로 학부졸업을 하고, 내년에는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했다.
회사일 때문에 태윤은 휴학 중인데 자신은 학교에 다닌다는 것이 미안하긴 했지만 당장 아이를 낳을 것도 아니고, 매일 무료하게 집에 있는 것보다는 또래처럼 밖에 다니는 것이 좋다는 태윤의 말에 하연도 결심을 하게 되었다.
“어머 모녀간에 너무 닮으셨다. 사이가 진짜 좋으시네요. 이렇게 같이 쇼핑도 나오고.”
스웨터, 블라우스, 치마, 바지, 코트 쉴새 없이 권하고 골라주시는 어머님 때문에 하연은 벌써 쇼핑백을 몇 개나 들고 들어가 또 다른 매장에서 옷을 입어 보고 있었다. 흐뭇한 듯이 하연의 모습을 보며 옷을 골라주는 태윤의 어머니에게 매장직원이 말을 건냈다.
“모녀 지간으로 보여요? 우리 며느리인데..”
환하게 웃으며 태윤의 어머니가 말했다. 아들만 둘을 키워 그런지 딸을 갖고 싶어했던 태윤의 어머니는 뒤늦게 딸이 생긴 것처럼 하연을 지극정성으로 대했다.
“그래요? 정말 닮으셨는데... 분위기도 그렇고 눈매도 그렇고.. 며느리분도 어려보이시는데 두분 사이 너무 좋으시다. 고부간이라고 아무도 안믿겠어요.”
하연은 엄마에게 좀 미안했지만 그래도 기뻐하시는 어머님을 보니 진짜 기분이 좋았다. 비싼 물건을 사주거나 자신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기분이나 상황을 고려해서 정말 친딸을 대하듯 하시는 시부모님께 감사해서였다.
“그럼 나는 여기서 친구 좀 만나고 갈테니까 너는 먼저 이기사 차 타고 들어가렴.”
쇼핑을 하고 점심까지 먹은 뒤 태윤의 어머니는 하연을 차에 태워 먼저 보냈다. 한참을 차에 앉아있던 하연은 집 쪽으로 차가 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놀라서 물었다.
“집으로 가는 거 아닌가요?”
이기사가 웃으며 하연 쪽으로 뒤돌아보며 말했다.
“사모님이 친정댁에 모셔다드리고 오라시던데요. 오랫동안 못뵈었으니 많이 보고싶으실꺼라고 하시면서요. 외동딸인데 부모님 적적하신 것도 생각해야한다고 하시더라구요.”
하연은 어머님의 마음씀씀이에 감격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드디어 집에 내려서 들어가려는데 트렁크에서 커다란 과일 바구니와 고기, 아버지 어머니의 스웨터가 든 쇼핑백을 꺼내주었다. 놀란 표정의 하연에게 이기사가 말했다.
“이것도 미리 준비해놓으셨더라구요. 오늘 아침에 두분 백화점 가시기 전에 차에 실어놓으라고 하셨던 겁니다. 잘 다녀오세요.”
하연은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인사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엄마 아빠 저 왔어요.”
뜻밖에 하연이 오자 깜짝 놀란 하연의 부모님은 대문 앞까지 나와서 딸을 맞이했다.
“갑자기 왠일이니? 이건 다 뭐고?”
“어머님이 아빠엄마 뵙고 오라고 이기사님께 부탁하셔서 왔어요. 나도 몰랐는데 집으로 가라고 하셔놓고서는 이쪽으로 오고, 선물까지 챙겨놓으신거 있죠. 나 어떡해. 시집 너무 잘 간 것 같어.”
하연의 말에 하연의 아버지도 등을 쓸어주며 말했다.
“그래, 이렇게 마음을 써주니 너무 고맙구나. 여보, 태윤이 엄마한테, 아니 사돈어른한테 얼른 전화드려요.”
아직은 어색한 그 호칭에 세 가족은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보며 웃었다.
“그럼 오늘 저녁 먹고 갈꺼지?”
과일을 먹으며 오랜만에 딸과 이야기를 나누던 하연의 어머니가 물었다. 아버지나 어머니도 막상 너무 일찍 하나뿐인 딸을 보내고 나신 후라 얼굴에 쓸쓸함이
가득 묻어나왔다.
“네, 먹고 갈꺼예요.”
하연의 어머니가 식사준비로 부산을 떠는 동안 하연의 원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보았다. 침대도, 화장대도, 책들도 거의 대부분 그대로였다.
22년 동안 많은 것을 느끼며 성장해왔던 자신의 방. 지금도 내 방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연은 문득 쓸쓸한 생각이 들어 화장대에 가만히 기대어 엎드려보았다.
“얘, 하연아!! 저녁 먹고 간다고 전화해, 기다리실라. 그리고 슈퍼가서 파 한단 좀 사와.”
“네!”
왠지 방에서 엄마의 심부름시키는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결혼식이나 신혼여행은 모두 환상이었고 그저 엄마아빠의 딸인 2달 전의 하연이 같았다.
하연은 편한 트레이닝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슬리퍼를 끌며 슈퍼에 가서 파를 사들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집으로 걸어왔다.
익숙한 풍경과 쌀쌀한 바람에 발가락과 어깨를 움츠리며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먹는 익숙한 기분. 하연은 왠지 즐거워져서 연애할 때 기분을 떠올리며 태윤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응 난데.”
“응, 여보얀거 아는데 왜?”
장난스러운 태윤의 목소리에 하연은 웃으며 말했다.
“어머님이 보내주셔서 나 지금 우리집에 와있거든. 밥먹고 간다구요.”
“그래? 그럼 나는 혼자 먹어?”
“왜 혼자야. 어머님이랑 아버님 계시잖아.”
“여보야랑 안먹으면 안되는데. 오늘도 같이 못먹었잖아.”
투정부리는 태윤의 목소리에 하연은 입꼬리에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터프하고 날카롭던 태윤이 하연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고 애교를 떠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란 생각에..
“그럼 어떡해? 지금 올래? 아직 회사야?”
“오늘 일많아서 빨리 퇴근 못하는데. 아버지가 나는 안보내주신다구. 너만 예뻐하시잖아.”
“말도 안돼!
..........근데 실은 나 오늘 어머님이 옷 사주셔서 이쁜 거 진짜 많이 샀다.”
“그랬어? 좋았겠다. 그럼 이번 토요일엔 나도 옷사줘.”
“내가 돈이 어딨어? 태윤씨가 돈 더 많잖아요. 내가 골라줄테니 태윤씨가 맛난 거 사주기!!”
“그럴까? 그런데 여보야 이렇게 입고 아이스크림 먹으면 감기 걸리지 않나?”
갑자기 따뜻한 기운이 등 뒤로 가까워지며 태윤의 그윽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하연의 귓불에 살짝 입을 맞추며 태윤이 하연을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뭐야... 회사에 있다믄서..”
깜짝 놀란 하연은 파가 든 봉투까지 떨어뜨리고는 태윤에게 안겨있었다. 태윤은 하연을 안은 채로 하연이 떨어뜨린 봉투를 집어들고 걸음을 재촉하며 말했다.
“아까 어머님이 회사에 오셔서 얘기하셨어. 우리 오늘 밥먹고 자고 오라시네.”
“정말?”
아이처럼 좋아하며 고개돌려 태윤을 바라보며 확인하는 하연의 발그래진 뺨과 이내 기분이 좋아져 조잘대는 입술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태윤은 살짝 입을 맞추었다.
“야!!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 어떡해. 소문 다 나겠다.”
“괜찮아. 결혼했으니까 다 괜찮아.”
태윤은 웃으며 하연을 안고 아파트 입구로 들어갔다.
“어머님, 아버님 저 왔습니다.”
“어머!!! 하연이랑 어떻게 같이 들어와?”
“부모님 보고싶어서 일찍 퇴근해서 바로 달려왔습니다.”
넉살좋게 말을 건내며 하연의 어머니에게 태윤은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냈다. 하연의 결혼 후 부부 뿐이라 늘 조용했던 집에 오랜만에 활기가 넘쳤다.
“아버지 목욕 하셔야 하니까 너네 둘은 산책이나 하고 와.”
저녁 식사 후 사이좋게 설거지를 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하연의 어머니가 말했다. 재활치료를 받고 있는 하연의 아버지는 뜨거운 물로 목욕하는 것이 좋다는 권유에 따라 매일 밤마다 목욕을 했지만, 아직 몸이 불편해서 누군가 목욕시중을 들어줘야만 했다.
“아, 어머님. 오늘은 제가 도와드릴께요.”
들고있던 그릇을 내려놓으며 태윤이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아니야. 얼마나 힘이 드는데... 내가 할게. 매번 하던 일이고..”
“저도 아들이잖아요. 저 이런거 잘해요. 오늘은 제가 하게 해주세요.”
태윤은 기어코 고집을 부리더니 하연의 아버지와 함께 욕실로 들어갔다. 하연의 어머니가 마무리를 하고 있는 하연에게 다가와 말했다.
“우리가 사람은 잘 봤어. 젊지만 태윤이 얼마나 기특한지.”
“그치? 어머님, 아버님, 태윤이 모두다 너무 좋아.”
하연의 환한 표정에 어머니도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일찍 보낸 딸이 항상 안타까웠는데 사랑받고 편하게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이야기를 나누고 텔레비전을 보고 한참을 놀다가 저녁인사를 하고 하연과 태윤은 하연의 방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고 뒤돌아서자 늘 자신이나 친구들, 엄마나 아빠가 앉아있던, 그 모습이 자연스러웠던 자리에 태윤이 앉아있었다.
“오늘 고마워. 아빠 엄마도 무지 좋아하셨어.”
하연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태윤에게 다가서서 살짝 안으며 말했다.
“인사보다 이게 더 고마운데..”
그런 하연을 허리를 잡고 침대에 눕힌 태윤은 입을 맞추며 짖궂게 웃었다.
“네 부모님이니까 내 부모님도 되는거야. 네가 우리 아버지, 어머니에게 잘 하듯이 당연하잖아.”
태윤은 이내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하연에게 말했다. 하연은 그런 태윤이 너무 고마워서 말없이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오~ 유부녀 되더니 더욱 멋있어졌는데..”
하연은 오랜만에 온 학교에서 막바지 준비에 열심인 아이들을 만났다. 익숙하면서도 지난 2달 동안 너무 낯설어진 것 같은 풍경.
하지만 몇마디 나누지 않아서 예전과 같은 친구들의 모습에 하연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오늘 네가 한잔 쏘는 거지?”
“그러지뭐. 에잇! 기분이다~”
네명은 언제나 그랬듯이 의기투합하여 왁자지껄 웃으며 먹으며 마시며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냈다. 한참을 이것저것 물어보던 수정이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너 우리가 준 선물 썼니? 어땠어? 응? 응?”
“...쓰...쓰긴 뭘써.”
“어머, 기집애 얼굴 빨개진 거 봐. 왠지 태윤씨는 그것도 잘 할 것 같다, 응응? 어땠어? 얘기해봐.”
“뭐야 정말!!”
“남들은 시집가면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적나라하게 다 얘기해 준다던데 너는 왜 빼고 그래? 왠 내숭? 안그래? 현재, 미라 너희들도 궁금하지?”
수정의 계속되는 추궁과 얼굴이 붉어진 채 골뱅이 무침 속에서 골뱅이를 찾는 듯 열심히 헛젓가락질만 해대는 하연의 모습을 보고 있던 미라가 수저를 내려놓으며 점잖게 말했다.
“그만해라. 하연이 곤란하게스리. 쟤는 처음인데 좋고 나쁘고 어떻게 알겠어? 어땟는지 기분만 얘기해봐. 응응?”
말리는 듯 하더니 미라까지 가세해서 괴롭히는 바람에 하연은 그날 저녁 내내 시달려야했다.
“잘가~ 담주에 보자.”
친구들과 지하철 역에서 헤어져 하연은 집으로 향했다. 이제는 노선을 혼돈하지 않고 탈 정도의 적응이 되었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 기분좋게 편하게 한잔 했더니 취기가 약간 도는 것 같았다.
지하철 역을 빠져나와 노래를 흥얼대며 가방을 돌리며 하연은 천천히 언덕길을 걸었다. 환하게 불이 켜진 큰 벽돌집이 이내 보였고 대문 가까이 걸어가던 하연은 그 앞에 앉은 사람의 형체에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태..민아...”
“누나...기다렸어.”
술을 한잔 마셨는지 눈가가 발그스름하게 물든 태민과 술기운이 한꺼번에 확 달아나버린 것 같은 기분의 하연은 나란히 놀이터 벤치에 앉았다. 술을 깨려고 사서 손에 든 음료수 캔만 만지작거리며 둘다 쉽사리 침묵을 깨지 못했다.
“누나.. 나 오늘 학교 그만 뒀어.”
태민의 말에 하연은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그런 말이 오가는 것은 어머님이나 태윤을 통해 들었지마는 무척 반대하신다고 들었는데....
“그런 표정 짓지마. 부모님한테 허락받아서 한거니까.”
태민이 쓸쓸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왜...그랬는지 물어봐도 돼? 내가 실습나갔을 때만 해도 학교생활 즐겁게 잘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서....”
더 이상 하연 쪽을 향하지 않은 태민의 시선은 하늘 높은 쪽을 보고 있었다.
“어른?”
“........얼른 어른이 되어서 한 사람을 책임질 수 있는 남자가, 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약하고 어리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내가 싫어서....”
“.....................”
“.....그리고 솔직히 누나랑 형 보는 거 쉽지가 않다. 그래서.. 한동안 떠나있고 싶어서...”
하연은 태민의 목소리가 떨려오며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눈물을 닦아줄 수도 위로의 말을 건낼 수도 없는 자신이 미웠지만 어떻게 행동할 수도 없었다.
“.........미안해....미안해....”
하연의 말에 태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미안하다는 말 하지마, 누나.
얼른 대학가서 좋은 여자친구도 만나고 나도 누나와 형 못지않게 행복해질 거야.
그러니까 누나도 지금 행복한 거 죄책감 느끼지 말고 누렸으면 좋겠어. 이 말 하고 싶었어.”
하연을 홀로 남겨두고 걸어가는 태민의 등이 너무 작고 초라해보여서 하연은 눈물이 났다. 흔들리지 말자고 다짐했었지만 태민의 저런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행복만 생각했던 자신이 미웠다.
진짜 오랜만에 찾아왔죠? 죄송해요.
대신 길게 썼으니까 즐겁게 읽으시고 답글, 추천 안해주시면 알죠? ㅋㅋ
좋은 하루 되세요. 오늘 늦게나 내일 또 글 올릴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