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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적절한 남자(45)

리드미온 |2004.10.15 18:22
조회 2,811 |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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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시기적절한 남자(45)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핸드폰을 켰더니 전화가 왔었다는 메시지들과 음성 녹음이 남겨져 있었다. 단지 전화기를 꺼놓았던 시간은 3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그 동안 나를 찾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까 싶었다.

두통쯤은 정훈, 한통은 엄마, 또 다른 한통은 여동생...그리고 음성 녹음은 엄마였다.

"너 중국 갔다면서? 오늘 점심이나 먹으려고 전화했더니 안받길래 회사로 해봤더니 출장중이라더라, 유럽담당하는 애가 무슨 중국 출장이냐?"

그러고보니 엄마가 집에 돌아간 후로 한번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오늘이 엄마가 피아노를 배우러 나오면서 나와 점심을 먹기로 약속했던 목요일이라는 것도 생각났다. 언젠가부터 흐지부지된 약속이었지만...

그리고 정훈은 전에 내가 말한 일주일 동안 결정을 내려달라는 약속 때문에 전화를 했던 것 같았다.

또 여동생은 무슨 일일까 싶었다.

나는 누구부터 먼저 연락을 할까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북경공항에서 너무 정신없이 비행기를 타는 바람에 현수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우선은 엄마에게 전화를 하기로 했다. 가장 간단하고 부담없는 안부인사로 끝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때문이었다.

"중국은 잘 다녀왔니?"

"응. 중국에 급한 일이 생겨서 지원차원에서 다녀왔어."

"좋구나. 이 나라 저 나라 마음대로 다니고..."

"좋긴, 일 때문인데..."

나는 문득 중국에 함께 가던 여학생이 엄마가 스튜디어스가 꿈이어서 그 여학생이 외국에서 공부하기를 바랬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어쩌면 전업주부였던 엄마는 일하는 내가 대견스럽고 부러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다음 주다. 우리 아마추어 연주단 발표회 말야. 토요일 양재 구민회관 5시야. 올 거지?"

"응. 가야지."

"알았다. 그럼 밥 잘 챙겨 먹고 있어라."

엄마와의 대화 마무리는 그런 식으로 끝나는 것 같았다. 밥 잘 챙겨먹어라...

그런 얘기를 들으면 밥을 직접 해주지 않더라도 먹으라고 챙겨주는 것이 평생 엄마의 책임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번에는 여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별 일 없니?"

전에 응급실에 간 사건도 있고 해서 걱정되어 물었다.

"응. 잘먹고 잘 지내고 있어. 민석 오빠도 잘해주고..."

"근데 무슨 일인데?"

"엄마 연주회 말야. 나한테 몇 번이나 전화해서 올 수 있냐고 물어보는 거 보니까 오길 바라시는 것 같아서, 언니 갈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현아의 말까지 듣고 보니 어린 시절 우리들이 체육대회나 입학식 졸업식 때 엄마가 항상 와주었던 기억이 났다.

엄마가 여러 번 전화했다는 얘기를 듣고 나니 마치 학예회에 초대 받은 부모 마음이 된 것 같았다.

엄마가 무언가를 하고 우리가 손님으로 가는 일은 정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가야지...이젠 엄마가 우리보다 피아노가 좋다는데..."

"언닌 그 말 믿어? 난 아냐. 막상 애기 가져 보니까 절대로 엄마는 우리보다 피아노가 먼저일 수 없겠더라. 엄마가 피아노에 빠지게 만든 것도 우리인 것 같아."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우리보다 더 피아노가 좋다는 거짓말로 엄마는 우리를 안심시키고 본인도 그 거짓말에 의지해서 인생을 살고 싶은 것일 것이다. 나는 그냥 그런 엄마에게 속아주는 것이 엄마를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민석 오빠가 그 날 차 갖고 간다니까 같이 가자."

"차라니?"

민석이는 차가 없었다.

"응. 중고차 하나 샀어. 나 임신하고 병원가고 그럴 때 걱정된다고..."

민석과 현아는 새 생명을 위한 분주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그 때 다시 연락하자."

나는 그렇게 전화를 끊고 회사에 연락해서 지금 도착해서 회사에 들르겠다고 말했다. 더구나 며칠 비워 놓은 동안 고객이 찾아왔다가 그냥 갔다면 나는 사과 전화라도 해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나는 정훈에게 전화를 해야할 차례라고 생각하니 쉽게 통화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나는 부재중 통화에 대해서 이 정도만 응답하기로 생각하고 전화기를 핸드백에 넣어버렸다.

물론 중국 공항에서 연락하겠다던 현수에게도 전화를 하지 않기로 했다.

회사에 도착해서 밀린 메일을 보고 비자가 나온 학생에게 연락을 하고 있는데 문자 메시지가 왔다.

'오늘 저녁에 만났으면 좋겠다. 내 입장을 얘기해줄게.'

정훈의 메시지였다.

그 메시지만으로도 반가웠다. 다만 어제 밤에 현수와 있었던 일 때문에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 상황만으로 내가 두 남자 사이에 있다거나 그 둘 중에 누군가를 택해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심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아침에 북경 공항에서 그리고 한국에 도착해서 현수에게 전화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나는 정훈에게 전화를 걸어 간단히 만날 약속을 했다. 오늘은 정말 독한 마음으로 만나자는 생각을 했다. 불분명한 사랑 만큼 사람을 갉아 먹는 일은 없으리라...

회사에서 일을 끝내고 정훈을 만나러 가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해외에서 온 전화라고 생각되는 이상한 번호들의 조합이었다.

"아직 비행기 안탔어요?"

현수였다.

"아뇨. 서울이에요."

"난 또 연락이 없길래 아직 북경에 있는 줄 알았어요. 아침에 문득 눈을 떠보니 서울 가기 싫어져서 그냥 북경에 남아 있는 줄 알았죠."

"미안해요. 아침에 공항에 늦게 도착해서 정신이 없었어요."

"아니에요. 아직 북경에 있다면 야경 구경시켜주려고 했죠. 전 내일 들어가요. 심야 비행기가 있으면 지금 가고 싶은데..."

현수는 지금은 친한 친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전에는 남남이라고 생각했는데...어제 현수가 말한대로 조금 친해진 걸까?

하지만 친구와 키스를?

조금은 불분명한 관계임에는 틀림 없었지만 그런 현수를 외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내일 뵐게요."

"네. 우리의 레종한테도 안부를 전해주세요."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냥 며칠의 사료를 그릇에 담아 두고 왔는데 레종이 제대로 먹었을지 몰랐다. 전의 불의의 사고도 있고 해서 걱정이 되었다.

"네."

나는 일단 대답을 하고 끊었지만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래도 이틀이라면 별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하고 정훈과의 약속 장소로 갔다.

정훈은 전보다 밝은 표정이었다. 오늘 따라 양복을 차려 입은 모습이 깔끔하고 산뜻해 보였다. 나는 오랜 시간 정훈을 보아왔다. 학창시절의 낡은 청바지 시절부터 말이다. 그 중에 왜 오늘 유독 제일 멋있다고 느껴지는 걸까...

"식사하면서 와인 한 잔씩 할까?"

그리고 예전에는 고급 레스토랑에 가면 주눅들어 나에게 뭘 시켜야 되느냐고 묻다가 이제는 제법 식사를 하면서 와인도 권할 줄 알게 되었다.

나도 변했으리라 싶었다. 어딘가 여행을 가면 많은 것을 보려했지만 이젠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었고, 어려운 영화나 소설에 심취해 있었는데 이젠 일이 중심이 되면서 그런 문화 활동은 오락거리로 생각하게 되었다. 더 이상 영화나 소설에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서였을까...

"일단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 어떤 거부터 들을래?"

그럴 때 난 단연 좋은 소식이다. 기쁨은 슬픔보다 크다고 믿기 때문이다.

"좋은 소식부터 말해봐."

"와이프랑 이혼하기로 했어."

글세...나는 그게 100% 좋은 소식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훈의 자유를 축하해야 하는 걸까?

"나쁜 소식은?"

"아이는 낳고 내가 매달 양육비를 주기로 했어."

둘다 난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내가 악역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이미 정훈에게 이혼해달라고 강요했던 것인가? 그리고 내가 지시한대로 정훈이 이혼을 하는 것인가?

그러고보니 나는 내가 정훈과 결혼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결정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이 불분명한 결혼 상태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 싫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기에 난 너무 이기적인 것인가...

냉정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정훈에게 나도 이젠 정말로 명확히 내 뜻을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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