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_ _)
좀... 아팠습니다, 또 위가 부었는지
갑자기 고열에 편두통에 편도선에 마비증세가 와서
아무것도 못했습니다.
(편도선은 이쯤에서 가라앉을까 말까 - 아직도 저를 약올리고 있습니다. -_-;;;)
먹어도 독, 안먹어도 독...이라, 거의 하루에 한두수저만 넘기고
이마에 물수건 얹고, 잠만 원없이 잤습니다.
백조가 별 수 있나요... 남는 게 시간뿐이니, 시간이란 약에 맡길 수 밖에요.
정말 몸도 마음도 지쳤다는 표현...이럴 때나 쓰는 건가...실감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야기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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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소설] << 흡혈귀 마녀와 동침을II -02 >>
쓰는 이 : 연지바른 마녀(mskim0920@nate.com)
*등장인물*
-신윤아(여, 17세, 화자)
-최선우(남, 57세) : 아시아 대 배우, 엔터테인먼트, 푸른 극장 대표
-이민수(남, 18세)
-한 욱(남, 18세)
-지나현(여, 17세)
-이태석(남, 59세) : 태석 영화사 대표
-강현민(남, 48세)
-유성린(여, 57세) : 선우 약혼녀, 뮤지컬 배우
그 외...
#
어둔 밤,
비가 내리고 있다...
여긴 어디지...
낯선 인도, 비틀거리는 취객들,...
그리고...
내 머리 위로 우산이 등장했다.
[선우E : 왜 비를 맞고 있어?]
[윤아 : (주변을 두리번) ...]
아... 그러고보니, 여긴 대학로 푸른극장 근처다.
[선우 : 흠뻑 젖었네.]
최선우를 올려다봤다.
[윤아 : 지금... 몇시예요?]
#
...새벽이었다.
전철이나 버스는 이미 끊겼고,
당장 큰오빠 집으로 돌아갈 방법이 달리 없어서
최선우가 이끄는대로 푸른 극장으로 들어갔다.
밤늦게까지 공연의 갖가지 소리와
관객들의 소음으로 북적대던 곳이
이 새벽은 유령의 집처럼 썰렁하기 그지없다.
넓은 극장 로비를 지나
구석의 작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선우 : 옆에 샤워실이 있는데, 좀 씻을래?]
[윤아 : (도리도리)]
[선우 : 여러 시간 비맞은 것 같은데, 그러다 감기 걸려.
젖은 옷도 그렇고.]
그러고 보니 젖은 옷에 몸이 다 드러났겠다,
전혀 의식 못하고 있었다.
두 팔로 가슴을 안고 웅크렸다.
최선우는 캐비넷에서 옷 몇 벌과 수건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선우 : 따뜻한 물로 해. 저 문으로 들어가면 돼.]
최선우는 사무실 창가 쪽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
따뜻한 물로 대충 샤워하고,
건네받은 옷을 걸쳤다.
남자 옷, 셔츠와 편한 면바지.
그래도 속옷까지 꼼꼼히 챙겨주었다.
문을 열고 나가자,
최선우가 머그컵을 건넸다.
[선우 : 유자차야.]
지난번에 민수 선배한테서
선우 삼촌 이야기들은 것이 있어서였는지
경계심이 많이 풀어져있었다.
호의를 호의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않다.
그가 내어준 의자에 앉아
여전히 비 내리고 있는 창밖을 보며
차를 마셨다.
이 비는 언제쯤 그칠까.
[선우 : 이 시간에 비까지 맞고, 무슨 일 있었니?]
[윤아 : ...]
[선우 : 방황하는... ^^ 청소년인가?]
가벼운 농담과 따뜻한 차에
쉽게 마음이 풀어지고 편해졌다.
[윤아 : ...부모님 제사 지내고 나왔어요.]
[선우 : (!) ..돌아...가셨니?]
[윤아 : (끄떡) 두 분 같이요, 교통사고였어요.]
[선우 : 그럼 넌 지금 어디에서...]
[윤아 : 큰오빠 집에요.]
[선우 : ...그렇구나.]
[윤아 : 제사... 처음이예요, 돌아가신지 1년이거든요.]
[선우 : 으응...]
어렵지만 한 번 말이 터지니까
봇물터지듯 술술 나온다.
돌아가신 후 한번도 이렇게 누구에게
부모님 이야기를 한 적 없었다.
[윤아 : 대전의 작은 오빠가 제사때문에 올라왔는데,
분위기가 좀 그랬어요.
두 분... 저 때문에 돌아가셨거든요.]
[선우 : 응...?]
[윤아 : 방학때 서울 큰오빠집에 놀러왔는데,
개학에 맞춰서 서울 학교로 전학 올 생각이었거든요.
대전 부모님 집에서 짐을 챙겨와야 했는데,
...내려가기 싫었어요.
그래서... 부모님이 대신 챙겨서 올라오시기로 했는데,
오시다가 사고가 나신거예요.
그러니까... 모두 저 때문이죠.]
[선우 : ...]
[윤아 : 제사 끝나고, 거기 있기 싫었어요.
그래서 무작정 나왔는데, 어딜 어떻게 걸어다녔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시간이 이렇게 갔는지도 몰랐구요.]
[선우 : 곧... 날이 밝을텐데,
오빠가 걱정하고 있겠다.]
[윤아 : ...큰 오빤, 아빨 많이 닮았어요. 진짜 무뚝뚝해요.
그래도 아빠는 내가 늦동이라고 많이 이뻐해주셨는데.]
아빤... 큰 오빠, 작은 오빠한텐 몰라도
나한테만큼은 늦동이에 외동딸이라고
참 많은 사랑을 주셨다.
엄만... 공부 관계된 용돈만 주시던 아빠와 달리
내가 하고 싶은 건 가급적 다 할 수 있게 해주려고 애써주셨다.
글짓기 대회에 나가서 장려상이라도 타오면, 제일 기뻐하셨고,
용돈이 떨어져 절절매면, 영화비와 책값을 따로 챙겨주셨다.
아빠가 -여자애가 무슨 영화를 하냐며- 늘 못마땅해했는데도,
엄마는 아픈 내 마음을 달래주려 그 비싼 디지털 캠코더를 사주셨었다.
(내가 그걸 사려고 따로 용돈을 모으고 있었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마지막 선물... 마지막 엄마의 사랑...
애써 외면했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몰아쳤다.
왈칵- 울음이 치솟아올라왔다.
"엄마, 나... 집에 가기 싫어."
그 때... 엄마가 전화로
대전 집에 내려오라고 했을 때,
내가 그 말만 하지 않았어도...
딱 한 번만 마음 질끈 감고
대전에 내려갔더라면...
[윤아 : 흐흑...]
[선우 : ...윤아야..]
최선우는 어떤 위로의 말...없이
내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 해줬다.
더이상 묻지 않아서
고마웠다.
품은
따뜻했다.
잠시나마
누군가에게 기대쉬는 게
이렇게 편할 줄 몰랐다.
어째서 그 낯선 남자의 품이
그리도 따뜻하게 느껴졌는지...
돌아가신 아빠같아서였는지...
어쨌든 난 그 사람의 품에서 한참을 울었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처음이었다, 이런 느낌은.
괜찮다, 괜찮아... 그렇게 마음을 토닥여주는 느낌의 손길.
한없이 기대고 의지하고 싶게 하는...
어떤 죄악도 한치의 망설임없이 용서해 줄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게 하는 사람.
#
주말의 대학로의 공원.
해바라기하러 나온 노인분들,
어리거나 혹은 적당한 나이인 연인들의 데이트,
어린 아이를 안고 나온 젊은 부부, ...
대체로 활기차다.
캠코더 액정에 이런저런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들이 담긴다.
그러다가...
어?
[윤아 : 선생님! ^^]
저만치 서 있는 사람은, 최선우.
렌즈를 향해 미소와 함께
가볍게 손을 흔들어보이더니, 다가왔다.
[윤아 : 여긴 웬일이세요?]
[선우 : 극장하고 가깝잖아, 바람쐬러. ^^]
[윤아 : 어머~ 푸른 극장엔 바람이 전혀 안 부나보죠?
에어콘이 고장났나? ^^]
[선우 : -_-;;;]
[윤아 : ^0^ 근데요, 경호원같은 거 없이
이렇게 혼자 다니셔도 돼요?]
[선우 : 여긴 공연 거리라 난다긴다하는 사람들
매일같이 드나드는 걸,
이 동네 사람들은 예전에 면역되서 그다지 불편하지 않아.
공식적인 스케쥴로 공개된 자리에나
위험할까봐, 경호원을 대동하지만.]
말이야 그렇지...
나와 대화하는 동안에도
벌써 대여섯명이 최선우에게서
싸인을 받아갔다.
이상하게도 비 오던 그 날 ,
그가 날 안아주고, 내가 그의 품에 안긴 이후
처음 만나는 건데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급속히 친숙해지고, 무척 가까운 느낌이 든다.
나만이 아니고, 그가 날 대하는 태도도 그렇다.
[선우 : 넌?]
난 캠코더를 들어보였다.
[윤아 : 시간때우기 딱 좋아요. ^^]
[선우 : 학생이 공부는 안하고?]
[윤아 : 윽! 선생님까지 그러시기예요?]
[선우 : 하하- ^_^]
[윤아 : (캠코더 만지작거리고)]
[선우 : ...괜찮니?]
지난 번 비 맞았던 일을 묻는거구나.
이런 사람이, 다른 사람 일을
맘에 두고 있어줄 줄은 몰랐는데.
[윤아 : ^0^ 그럼요~ 좋게 생각하면,
아직 전 크게 불행하지 않으니까요.
고아라지만, 큰 오빠, 작은 오빠두 있구...
그리고 몇 년만 지나면 어른이 되잖아요.
그 땐 하고 싶은 거 맘대로 할 수 있을거구요.]
[선우 : 다행이다, 상태가 괜찮군.]
[윤아 : ...전혀 안좋은데요. ]
[선우 : 왜?]
[윤아 : 점심을 걸렀거든요,
아...현기증 나려고 해..^^]
[선우 : (놀라서) 여태?]
[윤아 : ^^;;; 습관이예요, 주말에 쏘다니다보면.]
[선우 : 그래도...]
[윤아 : 조금 더 있다가 집에 가서 밥먹으면 될 걸,
용돈쓰기 아깝잖아요. ^^]
[선우 : 그래서 나보고 사달라구?]
[윤아 : 그런 뜻... 맞는데요! ^^]
[선우 : 하하하....]
유쾌하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다.
나현이가 그의 팬인 것과 다른,
그냥 조금 특이한 사람을 알게 되고 끌리고 좋아하게 된 느낌.
#
푸른 극장 뒷편 구석에 있는 작고 하얀 벤치에
나란히 앉아, 도시락 가게 음식을 먹었다.
[선우 : (음료수 주며) 엄청 배고팠나보네.]
[윤아 : (허겁지겁 먹으면서) 선생님도 드세요.]
[선우 : 나야 제 때에 먹어서 아직 배 안고파.]
[윤아 : 그럼 제가 다 먹어도 되요?]
[선우 : 맘대로. 이제보니 윤아 돼지구나?]
[윤아 : 핏. 원래 영화는 체력이예요.
밥심으로 버텨야 된다니까요.]
[선우 : ^^]
[윤아 : 너무 아는체 했나?^^;;;;
근데 극장이 한산하네요,
주말이면 더 북적거려야 되는 거 아닌가?]
[선우 : 그러게, 다음 공연 올리기 전엔 잠깐 이렇게
묘하게도 극장 전체가 텅 비는 시기가 있어.]
[윤아 : (그렇구나..끄떡끄떡) 선생님은 무지 바쁘신가봐요?
영화도 찍고 극장도 운영하고.]
[선우 : 극장이야... 상주하는 공동대표가 있으니까,
난 가끔 짬날때 거드는 정도지 뭐.]
[윤아 : 그래두 이 극장 참 좋아하시는 거 같아요.]
[선우 : 응. ^^ 넌 주말에 이렇게 다니는 거 아니면
다른 거 뭐 하니?]
[윤아 : 대전에 있을 땐, 용돈타는 날은 헌책방 순례하는 날이었어요.
근데 서울은 아직 어디에 뭐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여기 큰오빠네 집에 와선, 집에 가면 조카 녀석하고 놀아줘야 되니까...
따로 뭐 할 여유가 없어요.]
[선우 : 으응...]
[윤아 : 우리 조카가 3살이거든요?
귀엽긴한데... 사내녀석이라 너무 나부대니까
새언니나 저나 몇시간만 놀아주면
완전 넉다운이라니까요.
선생님은요? 선생님두 조카 있으세요?]
[선우 : 있긴한데, 캐나다에 있어.]
[윤아 : 아...]
[선우 : 여동생이 애들 교육때문에
조기 유학이니 뭐니 한참 고민하더니,
기어이 이민가버렸어.]
[윤아 : 여동생만 있으세요?]
[선우 : 응.]
[윤아 : 되게 심심하시겠다.
결혼도 안하시구, 형제두 멀리있구.]
[선우 : 아냐, 동료들도 있고, 친구들도 있고, 일도 있고.]
[윤아 : ...그래두, 돌아갈 곳,
언제든 선생님을 기다리는 곳이 있는
그런 것이 없잖아요.]
화려한 스포라이트 불빛과 불특정한 이들의 사랑 뒤에,
진실로 외로운 사람도 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유성린과 결혼하면... 나하고 이렇게 만나서 편하게 수다떨 순 없겠지만,
그래도 적어도 저렇게 외로운 느낌은 안나시겠지.
[선우 : 그렇진 않아.
좀 천천히 먹어라, 그러다 체할라.]
[윤아 : ^^ 걱정마세요.
시험기간만 아니면,
돌도 소화시킬 나이니까요.]
[선우 : (풋-) 넌 영화보다 너 자체가
더 재밌단 생각 안 해?]
[윤아 : 제가 재밌어요? (갸우뚱)
난 내가 별로 재미없다고 생각하는데.]
[선우 : 난 재밌다, 너 쫑알대는 거. ^^]
[윤아 : 칫, 칫. ]
완전 어린애 취급이네.
[윤아 : 참, 지난번 선생님 옷 돌려드려야 되는데.]
[선우 : 괜찮아. 극장에 여벌로 준비해 둔 거니까, 신경쓰지 마.]
[윤아 : 극장서 밤샘도 하고 그러세요? 그런 옷도 있구.]
[선우 : 가끔, 이동하기 귀찮을 땐.
그래서 일부러 극장 지을 때,
기본적인 생활도 가능하게 설계했어.
다른 단원들도 편하게 연습하게 해주고 싶었고.
개막 막바지엔 집에도 못들어가고
밤새 연습하는 경우 많거든.]
[윤아 : 그렇구나...]
[선우 : 그 날 집에 들어가선 큰 오빠한테 안혼났어?]
[윤아 : 안혼나긴요, 눈물 쏙 빠지게 혼났죠.]
[선우 : 혼났다면서 기분 별로 안나쁜 것 같은데?]
[윤아 : 선생님 모르시는구나?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무관심이예요.
울 오빠가 나한테 관심두 없음 혼내지도 않죠.
사실 저 그 날 혼날 짓 한 거 맞잖아요.]
[선우 : ...]
[윤아 : 왜 그렇게 보세요?]
[선우 : 그 나이에 맞지않게, 제법 철든 것 같아서.]
[윤아 : 그러고 보면, 민수 선배랑 최선생님이랑
말투가 비슷해요.^^]
[선우 : 그래? ^^]
[윤아 : 민수 선배두 잘난 척 많이 하드라구요,
겨우 나보다 한 살 더 먹었으면서.]
[선우 : 민수... 좋아하니?]
[윤아 : 그 의미심장한 질문은 뭐예요?]
[선우 : ? ]
[윤아 : 선배로 좋아하구, 영화부 회장으로 따르긴 하지만.]
[선우 : ...]
[윤아 : 전 남자친구같은 거 안키워요.]
[선우 : 왜?]
[윤아 : 전 사람보다 영화를 더 좋아하니까,
누가 옆에 있으면 외롭게 할 것 같아서요.
그럼 미안하잖아요, 싫어하는 것도 아닌데.]
최선우, 그의 팔이 뻗어오더니
그의 손바닥이 내 머리에 잠깐 닿았다.
[선우 : 착하구나...]
아닌데, 난 착한게 아닌데.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그의 목소리가 점점 깊이 가라앉고 있어,
이상하게 함부로 댓구할 수 없었다.
[윤아 : ...선생님.]
[선우 : 응...?]
[윤아 : 혹시... 절 아세요?]
[선우 : ...! ]
...추모제 때, 그가 이랬다.
그의 목소리가 깊고, 울렸고....
눈은 이 세상에 없는 걸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윤아 : 전에, 추모제 때,
선생님하고... 다른 분들이... 좀 이상했어요.
마치 절 아는 것처럼, 그러면서 다들 짜고 모르는 척.]
그제서야 그는 꿈에서 깬 것처럼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선우 : 니가 뭔가 잘못 알았겠지.]
[윤아 : 욱이 선배가 다니는 액션스쿨에서
어떤 노인분이 그랬어요.
당신이 알던 사람하고 제가 비슷하다고.]
[선우 : 이상한 상상같은 거 하지마, 그런 거 없으니까.]
[윤아 : 알아요, ^^ 대전엔 우리엄마가 절 낳아준 걸 증언해 줄 증인이 한둘이 아닌 걸요.
그리고 여태 살면서 한번도 기억상실같은 거 걸린 적도 없구요.
음, 게다가 전 대전서 태어나서 쭉 거기서만 살았구요,
서울서 친척말고 절 아는 사람은 있을리가 없죠.]
[선우 : ...]
[윤아 : 그래도 선생님이 그렇게 가라앉으시면, 저도 이상해져요.
선생님이 딴 세상으로 가버리신 것 같아서... 무섭다구요.]
그의 얼굴에 잠깐 쓸쓸한 미소가 바람처럼 스쳐갔다.
[선우 : 미안하다, 다신 그런 일 없을거야.]
그가 일어섰다.
나도 허겁지겁 따라 일어났다.
[윤아 : 죄송해요, 선생님 바쁘신데
시간 너무 많이 뺏었네요.^^]
[선우 : 아냐.]
이제는 쓰레기가 된
빈 도시락 음식과 빈 음료수 병을
봉지에 넣어 묶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선우 : 이제 집에 갈거니?]
[윤아 : 조금 더 돌아다니다가요. ^^
(꾸벅) 덕분에 잘먹었습니다.]
[선우 : 응. ^^]
푸른 극장을 나오는 걸음이 가벼웠다.
뱃속은 든든하고, 힘도 나고,
지난 번 미스테리같은 의심이 100% 풀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의 몇 마디 말에 마음이 훨씬 편해지고,
더 이상 그 건으로 끙끙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
나현이가 변심했다.
[윤아 : (속닥) 그렇게 최선생님 어쩌구 하면서
징징댈 땐 언제구?]
[나현 : (소곤) 가망이 안보인단 말이지, 가망이.]
[윤아 : 무슨 가망?]
[나현 : 유성린 그 여자하고 진짜 잘되나봐.
어젠 스포츠 신문 1면에 결혼설두 났단 말야.
그럼 나하곤 가망이 없잖어. ㅠㅠ]
[윤아 : 설마, 너... 최선생님하고 결혼이라도 할 생각이었니?
그래서 캠프 쫓아다니구 그런거야? ^^]
[나현 : 너까지 날 비웃는거야? T_T]
[윤아 : 아, 아니.. 비웃는다기보단...(쩔쩔)
너랑 나이차이도 장난아니게 많구...]
[나현 : 비웃는거 맞잖어 (철푸덕 엎어져) 으앙~]
[윤아 : -_-;;;]
[민수 : 거기 지나현, 신윤아!
회의하는데 무슨 지방방송이 그렇게 시끄러워?]
[윤아 : 죄송합니다... (나현 옆구리 찌르며) 그만 그쳐.]
[민수 : 그럼 영화 앞뒤 부분에
실지 다큐처럼 몇 컷 넣는 걸로 하자.
이거 누가 할래?]
[윤아 : 제가 할게요.]
[민수 : (잠깐 난감) 다른 사람은?]
[윤아 : 제가 한다니까요.]
[민수 : (초난감) 여자애가 하기 좀 그래. 위험하잖아.]
[윤아 : 지금 여자라구 무시해요, 선배? ]
[민수 : 그건 아닌데 -.-''']
[욱 : 민수 니가 해라, 그럼.
어차피 우리 영화부에서
카메라 제대로 만질 줄 아는 애 별로 없잖아.]
[민수 : 야, 나두 바뻐. ]
[윤아 : 그러게 제가 한다니까요.]
비록 지방이지만,
카메라 들고 막말로 산동네 철거니, 쪽방이니...
거칠고 위험한 곳도 잘도 휘젓고 다녔던 난데..
까짓거 역사 노숙자 모습 몇 컷 따오는게
뭐가 위험하다는건지.
[민수 : (윤아에게) 무슨 일 생기면 난 모른다, 니가 책임져.]
[욱 : (피식)]
[윤아 : 아싸~ ^0^ 걱정을 마세요~]
[민수 : 좋아, 그럼 오늘 회의는 이 정도로 하고.
참, 이번 방학 때 아르바이트 할 수 있는 사람?]
[모두 : ??? 무슨 아르바이트으~~~????!!!]
[민수 : 푸른 극장 알지?
거기에 쌓인 기획서하구 희극같은 거 정리해서
목록만드는 건데...]
[욱 : 그거 하루종일 주저앉아서 하는 거 아냐?
난 싫다, 차라리 영화판에 가서 뜀박질을 하고 말지.]
아싸~ 안그래도 새언니한테 넙죽넙죽 용돈타기 눈치보여서
방학때 알바 자리 알아보려 했는데.
[윤아 : (손 번쩍 들고) 전 할래요!
(나현에게) 너 안해? 최선생님을
자주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나현 : 떠난 사람 또 보면 뭐해... T_T]
정말 나현인 최선우한테 갔던 마음 정리하려나 보네.
친구인 나로선 잘됐다 싶기도 하지만.
오르지 못할 나무때문에 안달복달하는 거
그냥 지켜보기 안타까울때도 많았는데...
[민수 : 뭐야? 다른 사람은?]
"난 시골집에 가야지."
"보충 수업받구 언제 또 알바 해? 됐다 그래."
"나두, 이젠 3학년인데 공부해야지."
[윤아 : (욱에게) 선밴 이번 방학에 영화 출연해요?]
[욱 : 출연해두 이번에두 얼굴 안나올거야.
역사극이라 맨 뒤 쫄다구에
맨날 복면만 하구 지붕 날아다니니까.]
[윤아 : (쿡-)]
[민수 : 그럼 신윤아하구 나밖에 없는거야?]
[윤아 : 네????]
[민수 : 오늘 회의 끝. 해산.]
#
[나현 : 솔직히 말해봐.]
[윤아 : 뭘?]
[나현 :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니?]
[윤아 : 여자로?]
[나현 : 응.]
[윤아 : 우린 아직 풋풋한 나이로도
승부가 가능하지 않나? ^^]
웬일로 나현이가 떡볶이를 거하게 산다 했다.
오늘부터 노숙자 화면 딸 장소 헌팅하러 다니려면 엄청 바빠질 나를
분식집에 앉혀놓고, 심각하게 묻는다는 질문이...겨우 그거냐.
[나현 : 근데 그게 안먹혔단 말야. (시무룩)]
[윤아 : ... 너 정말 최선생님하구 결혼하고 싶었어? ^^]
[나현 : 응.]
[윤아 : (허걱!) 왜?
그 사람은 나이두 많구,
나이두 많으니까 명두 짧을 거구.
그런데도 좋아?]
[나현 : 그게 내 이상형이었거든.
돈많구 명짧구.]
[윤아 : (쿠당~)]
[나현 : 게다가 유명하지,
잘생겼지, 독신이지, 또 착하구.]
[윤아 : -_-;;; 나, 나현아...]
하두 어이가 없어서,
말까지 더듬어 보긴 처음일세.
[윤아 : 이게 십대들이 할 수 있는 대화라고 보이니? -.-;;;;]
[나현 : 나두 짜증나.
하지만 우리 엄마랑 이모들이 맨날 그랬는 걸 뭐.
돈많구 명짧은 남자가 장땡이라구.]
[윤아 : 그러니까, 윗물이 좀 별루였구만.]
[나현 : 어휴- 나 앞으로 뭐하니?]
[윤아 : 그냥 공부해서 대학가구, 취직하구.^^]
[나현 : 넌 영화하구 싶어하구,
소질도 있는 것 같구,
그러니까 어떻게든 뭐라도 되겠지만.
난 ...]
참... 뭐라고 해줘야 할지 난감하네.
[나현 : 윤아야, 니가 보기에,
난 연기가 영 아니디?]
아이고... 최선우 그 사람하구 호흡맞춰
연기하고 싶은 희망을 못버렸구나.-_-;;
[윤아 : 그건 좀 아니더라. ^^;;;;]
[나현 : 그럼... (한숨-) 나한테 뭐가 있을까?
코디같은 거 할 수 있을까?]
[윤아 : 그건 좀 힘들텐데... 패션감각도 쌈빡해야 되고.
근데 넌 따라하기 바쁘지, 앞서가진 않잖아.
게다가 내가 알기론 매니저만큼이나 항상 따라다니면서
밥도 제대로 못먹고, 잠도 제대로 못자고,
거기에 패션 아이템 찾느라 맨날 머리 뽀개진다던데.]
[나현 : 아!! (벌떡 일어나면서) 그래! 매니저!]
[윤아 : 뭐? 뭐?]
[나현 : (주먹 불끈쥐고) 매니저를 하는거야.]
[윤아 : -_-;;; 그래서 최선생님 있는 매니지먼트사에 들어가서
최선생님 매니저 하게?]
[나현 : 너 몰랐니?]
[윤아 : ? ]
[나현 : 최선생님은 따로 당신만의 매니지먼트사 갖고 있어.]
[윤아 : ...그래?]
[나현 : 딱 세 명의 매니저만 두고.
보통 기동성으로 승부를 하지.
그래도 최선생님 한 사람만으로도
중소기업만큼의 가치가 있으니까.
(갑자기 힘없이 털석 주저앉더니)
더 이상은 안뽑을거야 아마.]
[윤아 : -_-;;; 그, 그렇겠구나.]
[나현 : 그래도 최선생님하곤 상관없이
이 바닥에서 내가 해볼 수 있는게
그거밖에 없는 것 같다.]
대체 우리 고등학교가, 우리 영화부가
어느 바닥인데? =_=
나현인 그 날부로
기어이 그동안 다니던 연기학원을 그만두고,
매니지먼트 학원 수강증을 끊었다. -.-;;;;;;;;;;;
#
푸른 극장 사무실.
나와 민수 선배는 서대리님에게
학생증 사본을 제출했다.
[선우 : 니들 둘뿐이야? 0.0 ]
[서대리 : 그러게요, 떼거지로 몰려올 줄 알았더니.
(선우보고) 어떻할까요?
다른 학원같은데에 말 넣어볼까요?]
[선우 : 어차피 급한 거 아니잖아요.
우리도 같이 할건데, 일단 둘로 해보고.
안되겠으면 그 때 더 구합시다.]
[서대리 : 에이, 최선생님이 어떻게 이 일까지 하세요.
곧 연습 들어가시잖아요.]
[선우 : 그렇다고 정대표도 지금 해외 출장 가있는데.
서대리님하고 미스윤만 부려먹어요? ^^
내일부터 나오라 그래요.
영화부 애들이라 일 내용은 금방 알아들을테니까.]
그는 바쁜듯이 사무실을 나갔다.
[윤아 : 0.0 면접 본 거예요? 지금?]
[서대리 : 에이... 이번 기회에 좀 무리해서 사람을 쓰더라도
기획서 쌓인 거 싹 정리하면 좋은데.
니들 내일부터 나와. 아침 9시부터 6시까지.
보수는 일반 서빙보단 높게 쳐줄게.]
[민수 : 아는 사람이라구
너무 쉽게 가는 거 아니예요, 대리님?]
역시, 민수 선배도 나랑 불만이 비슷하다.
[서대리 : 쟤야 모르지만,
너야 작품보는 눈 있는 거 아는데 뭐.]
[민수 : 얘도 좀 되요.]
[대리 : 그래? 그럼 더 잘됐지.
근데 넌 왜 아르바이트 하는건데?]
[민수 : ^^;;; 졸업 작품으로 만들
영화 제작비 좀 마련해야 되요.]
[서대리 : 아버지가 안도와주셔?]
[민수 : 이 정돈 자기힘으로 할 줄 알아야,
나중에 큰 일도 하죠.]
[서대리 : 어휴- 대단한 감독님 나오시겠네.^^
(윤아에게) 너는?]
[윤아 : 헤헤- 저야, 용돈벌이 차원으로...
이번 기회에 제대로 된
전문 카메라와 장비 몇개를 마련해볼까...하고..]
[민수 : 너도 이번 제작비에 보태야 돼!]
[윤아 : 네에?]
[민수 : 넌 영화부 아냐?]
[윤아 : 그렇다구... 왜 나까지..]
[민수 : 어차피 나중에 제작 들어가면
다 십시일반으로 조금씩 모으게 돼있어.]
[윤아 : T_T]
한번이라도 팀 공동 작업을 해봤어야 알지.
감독이 혼자 스폰서 다 끌어오는 거 아녔어?
그나저나 이걸로 얼마나 번다고....ㅠㅠ
#
하루에 두꺼운 기획안 10편 이상 읽어
한 장으로 줄거리 요약하고,
DB리스트에 분류해서 기입하는 일이
만만찮다.
단순 노동도 아니고,
이건 머리를 계속 써야 하니
고급 노동이다.
눈도 자꾸 침침해지고,
머릿 속은 자꾸 복잡해지고,
온몸이 찌푸둥하다.
[선우 : 힘들지? ^^]
오전 내내 같이 작업하더니,
이제서야 나와 민수 선배 고충을
알아주시는군요.
[서대리 : (삐쭉 얼굴 들이밀더니)
선생님 차례예요.]
[선우 : 아- 그래.
(일어나며 윤아와 민수에게) 수고해라.]
최선우, 그가 나간 뒤에도,
민수 선배는 조용히 작업만 하고 있다.
[윤아 : 뮤지컬 연습이라고 했죠?
우리, 최선생님 연습하는 거 몰래 구경갈까요? ^^]
[민수 : (윤아보지 않고) 그냥 일이나 하시죠, 후배님.]
[윤아 : ...]
[민수 : ...]
[윤아 : 선배, 저한테 뭐 화난거 있어요?]
[민수 : ...아니.]
[윤아 : 근데 왜 계속 튕겨요?]
[민수 : (귀찮아 대충 둘러대는) 너보다 작업 속도가 한참 늦어서 그래.]
[윤아 : ...]
[민수 : 넌 영화 제작보다 시나리오만 써도 잘하겠다.]
[윤아 : 정말요?]
[민수 : 포인트도 잘 잡고, 문장도 간략하게 잘 쓰고.^^]
[윤아 : 웬일이래요? ^^ 선배가 날 다 칭찬하고.]
[민수 : 그럼 계속 갈굴까?]
[윤아 : (힉!) 아뇨~ 계속 칭찬해주세요. 헤헤-]
[민수 : 오늘 거 빨리 끝내고, 빨리 나가자. ^.-
나두 사실 지겨워 죽겠어.]
아하... 그럼 그렇지. ㅋㅋ
[윤아 : 잘됐다, 그럼 빨리 끝내요.
저두 오늘은 기차역 쪽에 나가보려구요.]
[민수 : 노숙자 건?]
[윤아 : 네.]
[민수 : 저녁땐 위험하지 않아?]
[윤아 : 어쩔 수 없잖아요.
하루종일 풀타임으로 알바하니까,
저녁때밖에 시간이 안나요.]
[민수 : 난 오늘 입시학원가는 날인데.]
[윤아 : 누가 따라와달래요?
괜히 신경쓰고 난리야.]
[민수 : -_-;;;; 그래두 늦어지면, 전화해.]
[윤아 : 전화하면요?]
[민수 : 혹시 알아? 공짜루 학원차 탈 수 있을지.]
[윤아 : 아하~ 알았어요. ^^]
#
오늘 배당된 분량을
빨리 끝내려고 서둘렀더니
오히려 더 늦어졌다. -_-;;;
민수 선배는 학원때문에 먼저 가버렸고,
나 혼자 엉킨 DB리스트 부분만
다시 재분류해서 일을 마쳤다.
그래도 오늘은 꼭 기차역에 가야지.
극장을 나가기 전에, 화장실에 들렀다.
가까이에 있는 공연장 문이 열려있는지,
노랫소리가 들렸다.
뮤지컬 연습은 이미 끝났을텐데...?
아름다운 음색에...끌려
나도 모르게, 어둔 복도를 지나
공연장의 약간 열린 문 사이로
발소리 죽여 숨어들어갔다.
관객석과 무대는 최소의 조명만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쓸쓸한 달빛 아래 내 그림자 하나 생기거든
그 땐 말해볼까요 이 마음, 들어나 주라고..."
노래는 무대에 앉아있는 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 이 노래 안다.
명성황후의 노래다.
하지만 이번에 올리는 뮤지컬은
명성황후가 아닐텐데...?
어째서 저 노래를 부르는 걸까?
어둠에 눈이 익자,
노래를 부르는 이가,
유성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유성린의 무릎을 베고
반듯하게 누워있는 사람이 보였다.
...최선우.
"문득 새벽을 알리는 그 바람 하나가 지나거든
그저 한숨쉬듯 물어볼까요, 나는 왜 살고 있는지
나 슬퍼도 살아야 하네-
나 슬퍼서 살아야 하네-"
어느 순간 유성린은 나를 봤지만,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이 삶이 다 하고 나야 알텐데...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간 그 이율
나 가고 기억하는 이
나 슬픔까지도 사랑했다 말해주길...
흩어진 노을처럼 내 아픈 기억도 바래지면
그땐 웃어질까요 이 마음, 그리운 옛일로
저기 홀로선 별 하나 나의 외로움을 아는건지
차마 날 두고는 떠나지 못해 밤새 그 자리에만..."
<조수미 - 나 가거든(명성황후 OST중에서)>
최선우의 머리칼을 쓸어내리는
유성린의 손길에 애정이 묻어있다.
노래가 끝나자,
난 나도 모르게 공짜로 들은
좋은 노래에 경의를 표하고 싶어
무대 아래로 걸어내려가 꾸벅 인사했다.
유성린이 살짝 최선우,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성린 : (다정한) 선우야, 그만 일어나.]
...그는 아마 잠들어 있었나보다.
몸을 몇 번 뒤척이고,
숨소리를 몇 번 크게 내더니,
몸을 일으켰다.
[성린 : 니 꼬마 부인 왔어. ^^]
???
목소리도, 미소도
여성스럽고 상냥한 여자.
하지만 그녀의 말은 미스테리다.
그가 고개 돌려, 나를 봤다.
[선우 : 누님도 참.]
시선은 나에게 있지만,
입으론 유성린을 책망한다.
유성린, 역시 명성만큼 대단한 이다.
자신의 무릎을 베고 잠든 사람이 깨지 않게,
웬만한 고음의 음을 몸이 흔들리지 않고
부를 수 있는 내공...이라...
[성린 : (선우에게 살짝 꿀밤)
몇 개월 갖고 꼭 누님이래.]
[선우 : ^^;;;;
(윤아에게) 아직 안돌아갔어?]
유성린은 일어나 무대에서 내려왔는데,
최선우는 무대 끝에 걸터앉은 채, 나를 내려다봤다.
[윤아 : 지금 나가려던 참이예요. ^^]
[성린 : (선우에게) 먼저 갈게.
(윤아에게) 있다가 가요. ^.^ (나가고)]
[윤아 : 아, 예예- (꾸벅)]
나한테 존대라니...
멍해졌다.
최선우가 앉은 그대로
무대에서 훌쩍 뛰어내려
탁! 내 앞에 섰다.
[윤아 : (헉!) 놀랬잖아요.]
[선우 : (싱긋)]
[윤아 : 근데 꼬마 부인이 뭐예요?]
그가 엄지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톡 쳤다.
[선우 : 너무 많은 걸 알면, 다쳐. ^^]
[윤아 : 칫. 어리다고 무시하면 선생님두 다쳐요.]
[선우 : 한마디도 안 지네, 응? ^_^]
한동안 민수 선배의 갈굼이 덜하더니,
이젠 이 아저씨인거야?
#
캠코더 액정화면에 비친 상황은
험악했다.
기차역과 지하철의 낮시간은
사람들로 너무 북적대 시끄럽고,
노숙자들을 찾기 힘들었다.
오늘은 몇일을 벼르고 별러
일부러 주말 밤 시간에 나왔다.
역사(驛舍)를 한바퀴 돌며
인터뷰 따볼만한 곳을 찾고 있는데
싸움이 났다.
이거, 말려야 하나....?
신고해야 되나?
이런 장면 찍을 기회는 흔치않은데...
갈등 때린다.
"너XXX 뭐야!"
앗! 소리지를새도 없이
바닥으로 내쳐졌다.
캠코더!
저만치서 나뒹굴고 있다.
기어서 잡으려는데,
누군가가 먼저 집어가려한다.
[윤아 : 안돼요! 제꺼예요!]
복부에 발길질이 들어왔다.
아.... 너무 아프다.
그래도 있는 힘을 다해
잡고 있는 캠코더 한쪽 끝을 놓지 않았다.
이젠 한 사람이 아닌가보다,
얼굴이며 온몸에 발길질이
연타로 날아들어왔다.
그들에게도 이런 기기는 돈이 될 수 있겠지만...
나에게도 이 캠코더는 엄마의 마지막 선물이라
너무나 소중한 물건이기에...
절대 내줄 수 없다.
안간힘을 다해 버티는 동안
누가 신고했는지,
멀리서 휘휘-호르라기 소리와 함께
제복입은 사람들이 달려왔다.
그제서야 나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흩어졌다.
"괜찮아, 학생?"
[윤아 : 예에- 고맙습니다.]
일어나려다 앗- 발목 통증에
다시 주저앉았다.
넘어질 때 삐끗했나보다.
핸드폰이 울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뒤져 간신히 받았다.
[민수F : 어디 있어? 지금 역사에 왔는데.]
[윤아 : 역사 안의 패스트푸드점 앞이요.]
[민수F : 많이 찍었어? 일단 나와.]
[윤아 : ...선배가 와줄래요?
나... 다리 삔 것 같아요. ^^;;;]
핸드폰을 끊고, 캠코더를 체크했다.
다행히 고장은 안난 것 같다.
실강이하고 밀고 당기면서
여러번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는데...
다행이다.
가방에 잘 챙겨 넣고,
민수 선배를 기다렸다.
오늘 기차역으로 촬영나갈거라고 했더니,
자기 입시학원 끝나는 시간에
들러주겠다고 했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이 보였다.
[윤아 : (팔 번쩍 들며) 여기! ^^]
민수 선배 뒤로 최선우가 보였다.
[민수 : 뭐야... 이 꼴은.]
[윤아 : ^^;;;; 액션씬이 좀 있었어요.]
[선우 : 일어날 수 있어?]
두 사람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려는데,
아.... 첫타로 맞은 배가 너무 아프다.
나도 모르게 숨이 가쁘다.
[선우 : (놀라서) 왜 그래, 어디 아파?]
[윤아 : 배가.. 좀...]
[선우 : 대체.. 어떻게... (하더니) 병원부터 가자.]
난 얼결에 최선우의 등에 업히고,
민수 선배가 내 가방을 챙겨 맸다.
#
최선우의 차를 얻어타고,
응급실로 직행했다.
"발목 삔 거 말곤, 다른 덴 별 이상 없네요.
타박상 정돕니다."
[윤아 : 그런데 왜 이렇게 배가 아파요?
너무 아파요... T_T]
[선우 : (다급히 의사에게) 지금 검사받을 수 있나요?]
[윤아 : ! ]
더럭 겁이 났다.
[윤아 : 선생님, 괜찮아요.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예요.
(허둥대며, 선우 팔 잡고) 이젠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선우 : 아프다며. 어디 이상있는 걸 수도 있어. 검사 받자.]
[윤아 : 집에 갈래요.]
민수 선배는 뭐하나.
말 좀 거들어 주지.
[윤아 : ...괜찮다니..까..요...]
어느정도만 아파야, 거짓말도 통할 수 있는데.
너무... 아프다...
숨이... 안쉬어져.
[의사 : (윤아보더니) 기본적인 몇가지 검사를 해보죠.]
[선우 : 지금, 당장. 부탁드립니다.]
...
검사받는 동안 계속 복통에 몸부림치다,
의사와 간호사한테 여러번 혼났다.
"이상 없는데요?"
의사는 이상이 없어서, 화가 난 것 같았다. -_-;;;;
그동안 난 진통제와 안정제를 맞고
얕게 잠들어 있었다.
[선우 : 아까 그렇게 아파했는데,
아무이상이 없다니요?]
[의사 : 흠... (잠시 생각하더니)
심리적인 요인같습니다.
보호자 분 맞으세요?]
[선우 : ...]
[의사 : 다른 짐작가는 일 없습니까.]
[선우 : ...글쎄요. (민수에게) 아는 거 있니?]
[민수 : (도리도리)]
[의사 : 어쨌든 분명한 건 걱정하신 쪽은
아무 이상없다는 겁니다.
링거 다 맞으면, 데려가셔도 됩니다.]
#
...얼마나 잤을까.
누가 나를 깨우는 흔듬에, 눈을 떴다.
내 눈 속에 최선우, 그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선우 : ...괜찮아? 링거 다 맞았는데, 그만 일어나봐.]
[윤아 : ...선생님...]
쉽게 잠이 깨지지 않았다.
계속 비몽사몽이었다.
[윤아 : ...졸려요.]
[선우 : 집에 가서 자, 집에 데려다 줄게.]
눈이 계속 감겼다.
[윤아 : (고개 젓는) 집에 가면 못자요...
우리 연호가 자꾸 놀자고 하거든요...]
아... 연호, 세살박이 내 귀여운 조카...
비몽사몽간에도 연호를 생각하자,
미소가 떠올랐다.
한 때는 연호를 보면 가슴이 아팠는데,
내가 잃어버린 어떤 것이 자꾸 떠올라서...
어느새 미소지을 수 있다니.
난 참 나쁜 아이다...
[선우 : 그럼... 내 집에 가서 잠깐 잘래?]
[민수 : (!) 삼촌!]
[선우 : 달리 데려갈데가 없잖아,
여긴 응급실이라 빨리 빠져줘야
다른 환자가 들어오지.]
자꾸 몸이 물에 젖은 것처럼 축 쳐졌다.
누군가의 등에 업혔다.
아까같이 넓고 따뜻한 걸 보니,
최선우... 그의 등인가보다.
난... 다시 잠들었다...
잠들어 있는 동안,
최선우의 차로 옮겨지고,
어디론가 차가 달려가고,
그리고 다시 업히고,
어느 방의 이불 속에, 베개에 머리를 뉘었다.
그리고...
악몽을 꾸었다.
싫어!
싫어!
오지마!
싫어!!!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아무리 몸부림쳐도
내 몸을 짓누른 무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선우E : 윤아야-! 윤아야!]
반짝! 눈을 떴다.
[선우 : 꿈꿨니? 세상에... 이 땀...]
그가 황급히 수건으로
내 이마와 목덜미의 땀을, 내 눈물을 닦아줬다.
난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소맷자락 끝을 잡았다.
차마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어, 고개를 떨궜다.
[선우 : ...]
[윤아 : 꿈... 꿨어요.]
또... 그 꿈.
[선우 : ...그래.. 나쁜 꿈이었니...?]
[윤아 : ...강간당하는 꿈이요.]
[선우 : ...! ]
[윤아 : ...꿈, ...아니예요.
진짜로... 있었어요.]
왈칵, 울음이 치솟아 올랐다.
엄마가 살아계실 적엔,
이런 설명같은 것 없이도...
날 그냥 안아주셨는데...
용서받고 싶었다, 누구에게든.
하지만... 왜 이 남자에게...?
어쩌면 난 무의식중에 아무 이유없이
이 남자에게선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사고였다.
대전집, 거실의 TV가 고장났고,
수리센터에 수리를 의뢰했고,
수리기사가 우리집을 방문했다.
마침 난 혼자 집을 보고 있었다.
반항할 겨를도 없이 강간당했다.
무서워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몸에 이상이 생겼다.
할 수 없이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엄마의 손에 이끌려 갔던 산부인과.
그저 무섭고 겁나서, 하라는대로 수술대 위에 누웠다.
한동안은 무감각하게,
모든 것이 아무일없는 것처럼 돌아간 것에 안심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저지른 일이 얼마나 엄청난 짓인가를
소름끼치게 느꼈다.
가정교육시간에 봤던 낙태비디오가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차가운 나이프에 의해
살려고 처절하게 도망치는 생명체의 미숙한 몸이
갈갈이 찢겨나가는 모습이.
아빠에게 들킬까봐
엄마가 다니는 절 길목에 올라가
매일매일 몰래 울었다.
보다못한 엄마가
날 서울 큰오빠집에 올려보내고
전학시키려 했다.
난... 그렇게 도망쳤다.
하지만 내 마음에 평생 떼어지지 않을
이 죄악에선 절대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용서받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자격을 잃어버린,
나...
게다가 나 때문에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다.
어떻게도 갚을 수 없는 죄.
[윤아 : 큰오빠는 날 사람 취급도 안해요.
연호를 만지는 것도 질겁해요.
내가 무슨 전염병 환자인 것 처럼.
옛날엔 날 참 많이 귀여워해줬는데...
...선생님도... 그런가요...?
그렇게 제가 많이 나쁜가요?
저도 어쩔 수 없었는데,
모두 어쩔 수 없었는데...]
내게 아주 긴... 시간이 흘렀다.
차마... 그의 얼굴 표정이 어떻게 변해있을지..
...올려 볼 자신이 없었다.
동정이라도 좋아요, 선생님.
비난만이라도 하지 말아주세요.
선생님까지 절 외면하시면...
전 어디에도 이 허허로운 마음을 기댈데가 없어요.
그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내 손이, 더 심하게 떨렸다.
그의 손이 천천히
내 어깨를 감싸, 나를 끌어안았다.
따뜻한 그의 가슴에 내 머리를 기댔다.
[선우 : ...넌 아직 어려...,
나쁜 아이 아냐...]
그러실 것 같았어요...
선생님은 그렇게 말해주실 것 같았어요.
[윤아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잠시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선우 : ...윤아야.]
[윤아 : ...네.]
[선우 : ...실컷 울어라, 내 앞에선 울어도 돼.]
[윤아 : ...네.]
그 때
그의 손길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떨리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