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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율(礎律) 제 25화

피바다 |2004.11.09 00:19
조회 400 |추천 0

   소예는 옛 생각에서 벗어나 가운을 걸치고 침대 옆 테이블에 놓아두었던 황가의 초대장을 다시 집어 들었다.

  노란 인장의 초대장- 그것은 천황태자 관지와 광목천왕의 딸 비영의 약혼식을 알리는 초대장이었다.

  소진은 뒤따라 왔다가 소예가 거울에 등을 비추고 서 있자, 열린 문틈 사이에 몸을 숨긴 채 언니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소예가 초대장을 집어 드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조용히 문을 닫고 발걸음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그때부터는 언니를 혼자 두어야 할 것만 같았다.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소진은 탁자 위에 약상자를 내려놓고 멍하니 서 있었다. 언니 생각을 하면 그녀는 어느 새 눈물이 절로 고이곤 했다.

  아들이 없는 아버지 다문천을 위해 소예는 언제나 아들 노릇까지 하려고 애를 썼다. 철이 들면서 그녀는 자청하여 제왕학을 배우기까지 했다.

 어느 날 연회에서 돌아 온 아버지가 지나가는 말투로 남방성 증장천왕의 아들 제공의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내다운 기개를 보이는 제공을 그는 약간은 부러운 듯 칭찬했다. 소예는 그 날 이후, 스스로 군사(軍士)를 모셔와 전법(戰法)과 무기, 군사를 훈련시키는 법을 배워나갔다. 하루도 빠짐 없이 검술과 궁술을 연마했고, 기어이 궁술에서 그녀를 능가할 자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는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버지 다문천은 그런 그녀에게 한 번도 만족한 적이 없었다. 다문천이 소예에게 꺼내는 말은 실수에 대한 질책과 비판이 전부였다.

  첫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돌아왔을 때도 다문천은 마찬가지였다. 당당하면서도 명랑한 공주였던 소예의 말수가 줄어든 것은 그 때부터였다. 그 날 이후 그녀는 그 많던 웃음까지 잃어버린 듯 했다.

  정작 다문천이 원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는 보다 실질적인 권력을 원했다. 그것은 바로 '황가의 힘'이었고 그는 그 힘의 핵심 속으로 들어가길 원했던 것이다. 뒤늦게 소예는 그것을 알아버렸지만 이미 전장에서 살아가는 법만이 전부가 되어버린 그녀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소진은 영리하여 아버지와 언니 사이에 흐르고 있는 감정 기류를 읽어내고 있었다. 결국 황태자 관지와 비영공주의 약혼은 다문천과 소예를 빠져나올 수 없는 배신감과 상실감의 늪에 빠뜨린 것이 분명했다.

  소예는 결국 비영에게 황태자비 자리를 빼앗김으로써 황가의 힘을 등에 업으려는 아버지의 가장 큰 소원을 이루어주지 못했고 심각한 자격지심에 빠져있을 터였다. 그리고 다문천의 노골적인 실망은 소예를 더욱 힘들게 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소진은 소예에게 당장 아버지는 큰 문제가 안될거라는 것을 알았다. 언니는 분명 지독한 고통과 슬픔에 빠져있었다. 그랬기에 소진은 가슴의 상처를 부여잡은 채 울지도 못할 언니를 대신하여 울 수 밖에 없었다.

  소예의 단 하나의 태양이 사라져버리는 순간이었다. 소예는 그를 위해 피 흘리며 싸워왔다. 머지 않아 그가 지배하게 될 나라였기에 그녀는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이다. 그런 그녀의 태양이, 그녀가 소망한 그 단 하나의 태양이 다른 여인 곁으로 멀어지는 순간이었다.

  소진은 육체에 난 어떤 상처보다 소예의 가슴 속에 남는 그 상처가 지독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 불쌍한...언니..."

 소진의 눈물이 부풀어 오르더니 볼을 타고 흘렀다.   

 

 지난 밤부터 하늘이 흐리더니, 오전부터 해는 나지 않고 하늘은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비는 오후가 되어도 그칠 줄 모르고 쏟아졌고 세상이 어두웠다.

  간만에 손님이 뜸해 한가하게 자기 시간을 얻게 된 만화루의 여주인은 독서에 빠져 있었다. 빗소리를 좋아하는 그녀가 일부러 열어놓은 정원 쪽 창문을 통해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소리가 흘러들어왔다.

  " 바스락...탁."

 아화는 책장을 넘기다 말고 책을 덮었다. 그녀는 정원의 푸른 나뭇잎으로 떨어져 내리는 비의 운치에 마음이 아늑해져왔다. 비가 그친 뒤, 한껏 싱그러워질 나무들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일어서 창가로 갔다. 시야를 더 넓히고 싶어 그녀는 발을 좀 더 높이 말아 묶었다. 팔을 올리자 제공이 선물한 옥팔찌 한쌍이 미끄러져 흘러내리며 맑은 소리를 냈다. 아화는 자리에 앉으며 소매를 걷어 옥팔찌를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초율과의 대면 이후 제공은 오랜 시간 만화루 출입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화는 제공이 떠나기 전 그녀에게 했던 부탁을 떠 올렸다.

  창백한 얼굴로 누워있는 묘영을 못내 안스러운 듯 지켜보다, 제공은 어두운 밤이 되서야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는 만화루 정문까지 배웅을 나온 아화에게 사뭇 진지한 얼굴로 머지 않아 높은 분이 찾아올거라 일러주었다.

  " 아화가 그 분을 보게 되면, 다른 설명도 필요없이 내가 일러 둔 분이란 걸 알게 될것이오. 묘영을 보기 위해 조만간 다시 행차하실 게 분명해."

  " 그 분이..뉘시옵니까?"

 " 천제 전하의 넷째 아드님이시지."

 " 아....."

 아화는 뜻밖의 소식에 나지막하게 소리를 질렀다.

 " 아화."

 제공은 아화의 양손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 제 4황자 전하의 마음을 잡아주시게."

 아화는 제공의 부탁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수십년간 친구로 지냈지만, 제공은 한 번도 아화에게 부탁같은 것을 한 적이 없었다.

 " 만화루의 든든한 후원자로써 그가 가진 힘은 막강할 것이야. 그의 마음을 얻으면 얻는 것이 많을 게 분명해. 하지만, 무엇보다 이것은 내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니 거절하지 말아줘."

 제공은 완곡하게 부탁을 했다. 확신하기 힘든 까다로운 부탁이었지만 아화는 제공의 청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 이제서야 소녀가 전하를 위해 할 일이 생겼군요. 소녀 미약한 힘이나마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 어려운 청을 들어주어 고맙네."

 " 전하, 그런 말씀 하지 마시어요. 전하께서 제게 베푸신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제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스레,

 "  어려운 분이시지. 어쩌면 아화를 위험하게 할 수도 있어. "

 "  이미 한 번 잃었던 목숨 아니옵니까? 전하가 다시 주셨으니 전하를 위해 버린대도 아쉬울게 없지요."

 그녀는 제공의 눈을 보며 웃었다. 제공은 그런 아화가 고맙고 애틋했다. 제공은 아화의 이마에 감사의 짧은 입맞춤을 남기고 그렇게 떠났다.

 아화는 손끝으로 이마를 짚어 제공의 따뜻했던 입맞춤을 떠올리고 있었다. 비는 여전히 시원하게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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