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이리 사는 것이 어머니에겐 평생 천근같은 짐이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태어났어도 살리시지 말았어야 했는데....
어머니께선 나를 보내시지 못하셨다.
처음엔 그런 어머니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차라리 세상 빛을 알지 못할 그 순간에 놓으셨다면 내가 이리 고통 속에 살지는 않았을 거라 여겨 그 원망을 다 어머니에게 쏟아 냈었다.
궁에서도 나를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런 나를 위해 어머니께서 영월각으로 가는 밤길을 열어주셨다.
처음엔 그저 놀리감으로 생각하고 적적한 시간을 달래려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사람 속에 깃든 마음은 귀하고 천한 것이 없는 모양이다.
한낱 기생에 자니지 않는 그 미천한 풍성에도 사람을 흔드는 은혜로움이 있으니 내가 어찌 그런 것을 놀이감으로만 보아 즐기겠느냐...
처음 그곳에 발을 들어 놓던 날 그림 한 폭을 보았다.
금방이라도 살아나올 듯 영혼을 담은 그 그림에서 눈을 땔 수가 없었다.
너를 물어 수없이 그 집 앞에 섰었다.
니가 뒤채에서 목검을 휘두르는 것도 수없이 보았다. 그런 날은 내 몸을 두르고 있던 도포가 더 무겁고 싫었다.
그날은 그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강 속으로 발길을 들여 놓았었다.
호위하던 이들에게 뒤를 밟혀 강에 드는 것조차 뜻대로 하지 못하고 급하게 그 방으로 몸을 피했다"
“내 집에 들었던 날이구나...”
종현이 잠시 그가 들었던 그 밤을 떠올렸다. 처음 들고도 자신을 전혀 낯설지 않게 대했던 이유가 수없이 그곳에 왔던 까닭 이였음이 못내 안타깝고 저렸다.
“그날 니가 내게 말했었다...
내 도포저고리가 어울리지 않는다 했었다...
내가 그토록 아성을 불편해 했던 이유를 니가 알게 했다...
그날 나는 아성을 버렸다.
그래서 좋았다...
그래서 싫었다...
근원을 몰라 숨 막히든 아성을 버려 좋았고...
효원을 가져 너를 탐내는 내가 싫었다.
내겐...니가 그런 사람이었다...“
종현의 얼굴에 맑은 미소가 내려앉았다.
“무심한 사람... 니가 틀렸다... 그리 멀게 돌아오지 않아도 되는 길이였다‘"
그가 궁으로 돌아가고 종현은 도진의 도움을 얻어 청으로 들어갈 준비를 시작했다. 무엇에라도 매달리지 않으면 그 불안함이 애간장을 녹여 견딜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효원이 궁으로 돌아 온 다음 날 저녁 모습을 보이지 않던 도진이 효원의 방문 앞에 섰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어찌 아직 떠나질 않았느냐..."
초취한 모습의 도진이 효원을 마주하고 섰다. 몇일 동안 눈을 붙이지 못한 피곤함이 그 얼굴에 먹물처럼 번져 있었다.
"몰골이 어찌 이런 것이냐..."
"청나라로 가십시오....그 분께서도 떠날 채비를 끝내셨습니다..."
효원의 눈동자가 표 나지 않게 흔들렸다. 끝까지 자신을 놓지 못하는 도진이 못내 안타깝고 애잔해서 그 가슴 한구석이 그리 또 미동을 했다.
"니가 결국......"
"...남은 일은 제가 맞을 것이 옵니다....그러니 아무 염려 마시고 떠나십시오.."
"내 유약함이 너를 이리 떠나지 못하게 하는 모양이구나... 그래...그리 할 것이다...일이 다 마무리 지어지면 떠날 것이다..그러니 너는 더 이상 여기 있지 마라.."
도진이 잠시 당혹스러웠다. 무슨 일이 있어도 효원을 돌려 세워야 하는 일이였으나 그리 쉽게 자신의 청을 받아들이는 효원이 내심 불안하고 믿기지 않았다.
"진정..그 말씀 진정이시 옵니까.."
"그러니 너 또한 더 이상 나를 거슬리지 마라... 일이 급박해지면 너를 돌볼 수 없을 것이다.."
"염려 거두십시오...제 한 몸..."
"너를 탐내는 자들이 많다...니 성품이 둘은 가지지 못하니 그 자들에겐 결국 버려야 할 제목이 될 것이다..사흘 뒤 묘시에 남포구로 갈 것이다...그러니 너는 그동안 그 사람 곁을 지키거라..."
도진이 물러간 새벽 이조판서 김우섭이 효원을 찾아왔다. 여유로움을 보이려 애쓰고 있었으나 그 속에 드리워진 조급함을 이미 효원에게 들키고 있었다.
"전하와 독대를 하셨다 들었습니다..."
효원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흩어졌다. 하지만 그 속에 소용돌이 치고 있는 분노가 온 방의 공기를 팽팽히 긴장시켜 김우섭의 살점마저 떨리게 하고 있었다.
"두려우십니까..."
그가 자신을 걸고 전세를 바꾸었듯이 김우섭 또한 마지막엔 자신을 걸 방책을 하고 있었다.
"마마께 아직 보이지 않은 수가 있사옵니다.."
"이번엔 또 무엇으로 저를 움직일 생각이십니까.."
"결코 마마께서도 함부로 하실 수 없는 저희의 병풍이 되어 줄 방책이지요.."
효원이 닦고 있던 검의 칼등을 세워 그 빛의 흐름을 김우섭의 얼굴에 겨누었다. 여전히 그 얼굴엔 한점의 흔들림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아정군께서는 마마와 많이 다르십니다...그 포부가 한세상 가지시기 충분하시지요.. 아정군께서 저희의 병풍이 돼 주시면 숙원마마께서도 어찌할 수 없이 저희를 보시지 않겠습니까...“
"이제 모두를 들어내신 것입니까..."
한점의 동요도 일지 않는 효원의 냉철함이 김우섭에게 남아 있던 한점 여유를 살아지게 했다.
"천하를 발아래 놓았던 김우섭 대감이 아니십니까...그런 분이 둘러치시기엔 너무도 초라한 병풍이지 않겠습니까..."
"이미 대감께서는 섶을 지고 불속에 뛰어드셨습니다....아직 모르고 계시는 듯하니 제가 일깨워 드리지요.. 전하의 세상을 탐냈던 것이 그 처음이요..
그것을 제게 들킨 것이 그 둘째이요...
그 탐욕 속에 저를 끌어들일 수 있다 여긴 것이 그 셋째이요..
그리고....내 사람에게 그리 한 것이 그 남은 이유의 전부가 되겠지요....
그 것에 어머님과 형님을 더하지 않아도 그 죄가 하늘에 닿아 있습니다..
형님의 성품을 전하께서도 아시지요...다소 거칠고 뒤를 생각지 못하시는 편협함이 있으나 그 그릇을 알아 대감께서 내놓으셔도 그리 큰 바람막이가 되시진 못할 듯 싶습니다..“
“무엇으로 그리 장담하시 옵니까...”
"전하께서 어느 한쪽의 편도 들지 않으시는 연유를 아직 모르고 계십니까...“
김우섭은 자꾸 내려앉는 심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었다. 효원이 그리도 당당히 자신과 마주한 것은 결코 허세나 암투의 둘러침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그 품성의 기세였고 그 지리와 논리가 이미 자신들의 판세마저 다 읽어내고 있었다.
“대감을 버리셔도 누구하나 반색조차 들어내질 못할 또 한사람이 필요하신 것입니다.. 양쪽을 같이 버리시니 어느 누가 감히 잘잘못을 논하겠습니까...“
결국 김우섭이 처절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그 말씀은...마마께서....”
효원의 얼굴에 맑고 은은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미 천상을 가진 냥 그 어떤 그늘도 드리워지지 않은 청아한 기운이 김우섭의 숨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대감의 그 탐욕들이 대감이 쥐고 있던 섶입니다...
저에게 오시었습니까..
제가 불입니다...
평생 불씨를 가지고 태울 것을 기다린 사람에게 섶을 지고 뛰어드니 함께 탈 수 밖에 길이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