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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율(礎律) 제 26화

피바다 |2004.11.10 11:31
조회 347 |추천 0

  아화는 묘영의 거처로 걸음을 옮겼다.

  묘영은 생각보다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 회복을 위해 요양 중이었다. 아화가 당도했을 때, 묘영은 나즈막한 창틀에 걸터 앉아 활짝 열어 제친 창 밖으로 보이는 비에 젖은 풍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딱히 깊은 생각에 빠진 것도 아니었고, 단지 먼 데 넋을 두고 있던 묘영은 아화가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 묘영아?"

 아화가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묘영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확인했다. 묘영은 자리에서 일어서 아화에게 가볍게 인사를 했다. 아화는 손수 들고 온 탕재 그릇을 바닥에 놓고 묘영에게 다가가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빗소리가 하도 애처로와 마음이 동한 건 알겠지만, 환자에게 찬 공기는 좋지 않아."

 하며 아화는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우물쭈물하는 묘영을 아랫목에 끌어다 앉히고 탕재를 먹이고는 직접 설탕조각을 입에 넣어 주었다.

 " 안색이 여전히 좋지 않구나. 얼른 나아야할텐데."

 아화는 진심으로 걱정했고 그 말에 묘영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 항상...못난 모습만 보여드려서 죄송해요."

 " 이런, 또 울어? 묘영은 아직 꼬마라서 정식 기녀 되려면 한참은 걸리겠구나."

 아화가 밉지않게 핀잔을 주자, 묘영은 눈물 맺힌 눈으로 씩 웃었다. 둘은 이런저런 사소한 이야기들로 비 오는 오후의 무료함과 적적함을 달래었다. 묘영은 아화가 간만에 오랜 시간 곁에 남아 기분을 풀어주자 기뻤다. 묘영의 기분이 상당히 풀어지자 아화는 조심스레 초율의 이야기를 꺼내었다.

 " 다녀가셨던 분이 제 4황자전하라 하더구나. 맞느냐?"

 묘영은 잠시 멈칫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화는 묘영의 밝던 안색이 어둡게 변하자,

 " 떠올리기 싫은 일이었다면 그만 묻도록 할게. 다른 이야길 할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비는 여전히 세차게 곤두박질 치며 만화루의 지붕을 두드려대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손가락 끝으로 소매를 매만지던 묘영이 먼저 침묵에 종지부를 찍었다. 

  " 언니가..있었어요."

아화는 고개 숙인 채로인 묘영을 쳐다보았다.

 " 그래. 기억한다. 묘아라는 예쁜 언니가 있었다고 했지."

 묘영은 힘겨운 기억을 꺼내기 전 마음을 단단히 다잡는 모양이었다.  

 " 끔찍하던 삶 속에서 억지로 웃어보이던 언니가 언제부터인가 진정으로 행복하게 웃기 시작했어요. 그 때는 너무 어려서 잘 몰랐지만 이제는 알아요. 언니는 그 때 사랑을 하고 있었던 거에요."

 아화는 희미하게 웃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웃음이 얼마나 눈부신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주변 사람들조차 절로 행복하게 만들어버리는 기적같은 웃음이었다.

  " 그러다 언니가 그 사람을 데리고 나타났어요. 울긋불긋한 붉은 가면을 쓰고, 갑옷을 입은 커다란 남자였어요. 마을 사람들은 집 근처에 나타지도 못하고 숨어서 수근거렸고 아버지는 맨발로 뛰어나가 그 남자에게 절을 올렸죠. 나는 그 때 아주 무서운 사람이구나..생각했어요."

 " 그..분이?"

 " 네. 그 분이 바로 제 4황자 전하셨죠."

 아화는 묘영과 초율의 뜻밖의 인연이 밝혀지자 새삼 놀랐다. 묘영은 목이 마른지 물을 찾아 마시고 다시 말을 이었다.

  " 마을 사람들은 그 분을 아주 두려워했어요. 그 후로 우리 식구들까지 어려워했지요. 그리고 아버지도 그 분을 참 좋아하면서도 늘 쩔쩔매셨구요. 하지만 나는 두 번째 그 분을 본 뒤로는 두렵지가 않았어요. 무등을 태워 마당을 돌 때면 정말 하늘을 날아 오르는 것처럼 즐거웠어요. 나한테 그 분은 아주 좋은 분이었지요."

 묘영은 담담하게 과거 속을 헤매이는 듯 했다. 아화는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 혼례를 앞두고 언니가 집으로 왔어요. 언니는 언제부터인가 집을 나가 살았거든요. 어디서 무엇을 하는 지는 몰랐지만 아주 가끔 전하와 집에 오곤 했을 뿐이었는데 그 때는 오랜 시간 집에 머물렀지요. 전하께서 여행을 가셨다면서....나는 눈을 뜰 때면 항상 언니가 곁에 있는 것이 너무나 좋았어요. 언니가 계속 집에 있으면 좋겠더라구요.

  어느 날, 빨래를 하려고 언니 손을 잡고 개울가로 갔을 때였어요. 빨래하는 언니 곁에서 물장난을 치며 노는데 어떤 행렬이 지나가더군요. 그 행렬은 제 2황자 전하의 행렬이었어요."

 " 2황자 전하라면....4황자 전하의 형님 되시는 분?"

 묘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들이 언니를 끌고 갔어요. 울며 달아나는 언니를 낚아 채 데려가 버렸어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주저 앉아 울었고 달려온 아버지는 관군들에게 맞아 길거리에 쓰러지셨죠. 나는 울고..또 울었어요."

 그 때부터 묘영의 목이 메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겨우 울음을 참아내며 말했다.

 " 한 잠도 자지 못하고 아버지와 마당에 주저 앉아 있었어요. 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지...두렵고 슬펐어요. 그 날 저녁에 여행을 갔다던 4황자께서 들어서시며 언니를 찾았어요. 그 분은 우리를 보시곤 연유를 물으셨죠. 아버지는 통곡하며 언니를 구해달라고 청했고 나는 그저 울뿐이었답니다. 전하는...언제나처럼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시고는 돌아서셨어요. 그런데..나는 그런 전하가 무서웠어요. 처음으로 그 분이 두려워졌어요.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내게 말을 거시고 돌아섰는데 나는 저절로 몸이 떨려왔어요. 그 분은 여태와는 다른 분처럼....그렇게 보였어요."

 묘영은 잠시 말을 쉬었다. 아화는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몰라요. 단지..머지않아 관군들이 들이닥쳤고 집과 재산을 뺏긴 채 아버지는 몰매를 맞고 쫓겨났어요. 그렇게 우린 천민 부락에서조차 쫓겨나 버린거에요. 산 속에 숨어 들어가..그렇게 살았어요. 추위와..배고픔에 시달리며..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니었죠."

 아화는 한숨을 쉬었다. 묘영은 소리없이 눈물을 죽 흘렸다. 갈 곳 없이 세상에서 버려진 기분을 아화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오히려 죽음보다 못한 고통이었다. 공감했기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말로 위로가 될 것이 아니었기에.

  " 그런데..무엇보다 힘들었던 건...언니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어요. 언니는...결코 오지 않았어요. 영원히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죠. 그리고....황자전하께서도 역시....돌아오진 않았어요."

 바닥만 응시한 채 이야기를 하던 묘영은 눈물 흐르는 눈을 들어 처음으로 아화를 쳐다보았다.

 " 상상도 못할 소문들이 들려오기 시작했고 저는 제 4황자 전하가 그 때부터 무서워졌어요. 나는 그 분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고 느꼈어요. 어쩌면 언니도 그 분이...."

 묘영은 입을 다물었다. 아화는 이제 모든 것을 알 것 같았다. 묘영의 분노는 괜한 것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따르고 사랑하던 존재가 한 순간에 악마로 변해 모든 걸 빼앗아버리고 그녀를 지옥으로 내 몬 충격이었다. 삶의 지주였던 언니를 빼앗기고 더불어 황자마저 사라져버렸다. 그녀를 엄습하는 상실감과 외로움은 어린 그녀로써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들을 기다렸다.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고 그녀는 일말의 희망을 버리며 초율을 증오의 대상으로 가슴에 새겼을 것이다. 그와 관련한 잔인한 소문들은 초율을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어 좋던 기억마저 희석시킨 채 화석처럼 그녀에게 남아 있을 즈음, 그 때 초율이 나타나버린 것이다. 분노와 증오의 응집체가 불현 듯 나타났을 때의 정신적 충격-아화는 묘영의 상처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침에 시간 내서 쓴 글을 정전으로 날려버렸습니다.ㅠ.ㅠ 그래서 내용이 조금 줄었네요.

  어제 좋은 친구랑 단골 주점에서 동동주를 마셨어요. 살얼음이 깔린 동동주와 파전을 앞에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웠답니다.

  동동주가 가장 맛있었던 때를 서로 떠올리면서 친구는 주왕산 등반을 마치고 내려올 때의 동동주를 꼽았고 저는 올 봄 홀로 매화마을로 떠났을 때 매화꽃잎 떨어지는 나무 아래서 여행지에서 만난 낯선 분들과 마신 그 동동주를 언급했습니다. 오늘같은 날씨에 동동주-괜찮겠죠?

 어린 사람이 아침부터 주제넘게 술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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