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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알갱이 - 36

이끼 |2004.11.26 13:07
조회 1,639 |추천 0

불황의 골이 깊을수록 사회 경제적으로 변두리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각박한 현실이 이런 풍조를 더욱 부채질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어렵고 각박한 자신의 현실을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바로 돈 많은 남자를 만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지난 9월4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이런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신데렐라는 절대 환상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노력하면 자신도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오늘도 밤거리를 헤매고 있는 여성들의 사례가 소개됐다.

“부유한 남성을 만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가능성 있는 장소를 찾아다니기도 한다”는 한은정(25)은 일부러 카이스트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서울대학교 공원에서 산책을 한다든지 하는 노력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차를 몰고 갈 때 앞에 아주 좋은 차가 있으면 살짝 받고 예쁘게 하고 내린 후 명함을 건네줘서 다음에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일부러 만들라는 이야기도 있다고 전해준다.


------------------------------------------------------ BreakNews.com 이의경

 

 


" 사돈 남말하지 마시죠!"


" 사돈 남말?"


100평이 넘는 집안이 쩌렁 쩌렁 울리도록 태준은 큰 소리로 웃었다. 유채는 모욕감에 살짝 몸을 떨었다. 태준은 분명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이었다. 분명...


" 넌 그저 신데렐라 컴플렉스에 빠진 여자에 지나지 않잖아, 안 그래? 도대체 너는 뭘 믿고 그렇게 당당한거지? 어차피 니가 남자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남자로 인해서 깨어질 수도 있어. 대체 네가 그것 말고 뭐가 더 있지?"


태준의 눈빛이 아까의 웃음은 온데간데 없이 싸늘하게 식어들었다. 그의 표정은 얼음과도 같았도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송곳이 되어서 유채의 가슴을 후벼팠다. 처음으로 유채는 자신의 생각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이런 소리나 듣고 참아대려고 돈 많은 남편감을 꿈꾸어왔던 것은 아니었다. 신데렐라의 스토리처럼 첫눈에 자신에게 반한 왕자님이 어느날 자신을 남들이 우러러보는... 감히 그 누구도 깔보지 않는 위치에 올려주기를 바랬을 뿐이었다. 서러웠었으니까... 없다는 것은 서러운 것이었으니까...

흰색 메르세데스 벤츠를 탄 남자는... 분명 언제든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아주 기본적인 사실을 유채는 지금 뼛속 깊이 느끼고 있었다.


" 왜... 아무말도 안 하는거지?"


가만히 고개를 숙인채 아무말도 하지 않는 유채의 반응에 당황한 쪽은 태준이었다. 소리높이며 자신에게 대들어 올 것이라 생각했던 유채가 조용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태준은 덜컥 겁이 났다. 혹시... 정말 이대로 다시는 자신의 꼴도 보지 않겠다고 이 집을 휙 나가서 사라져버릴까봐...


" 틀린 말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요 나 신데렐라 컴플렉스에 빠진 여자 맞아요. 하지만... 당신도 고전적인 완벽한 왕자 스타일은 절대 아니네요."


유채는 울지 않았다. 하지만 태준이 마주한 유채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슬픔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 슬픔의 깊이는 태준의 눈에도 보이는 것보다도 훨씬 더... 훨씬 더 깊어 보였다.


" 이... 이봐."


" 신데렐라 컴플렉스에 빠진 여자라..."


유채가 가방을 끌고 몇 걸음을 내 딛으며 중얼거리다 우뚝 멈춰섰다.


" 참, 이상하게도 내가 나 신데렐라 컴플렉스에 빠져있다고 그게 뭐 어떠냐고 그렇게 큰소리 빵빵 치고 살았는데... 당신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까 기분이 참... 묘하네요."


웃었다... 분명 유채는 태준을 향해서 웃고 있었다. 태준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화를 내고 싸우고 풀어보려고 싸움을 걸었더니 갑자기 유채는 진지해지고, 무조건 긍정을 해버리니 더이상 말을 꺼낼 것도 마땅히 생각나지도 않았다.


" 솔직히... 당신의 그 지위, 그리고 당신이 가지고 있는 많은 돈... 탐이 났어요. 평생 이런 좋은 펜트하우스에서 외제차 굴리고 명품 사대면서 행복하게 부족함없이 살겠구나... 하는 생각을 매일 아침 여기서 눈을 뜰 때마다 했어요. 당신을 만나는 방법이 조금만 틀렸다면, 분명 난 당신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순종하는 여자가 되었었겠죠. 우연찮게 샐리의 약혼자였던 당신을 거부했던 것이 오히려 당신을 자극하는 꼴이 되어서 난 구태여 순종을 할 필요가 없었을 뿐이예요. 나, 이런 허영심 빼면 남는거 없는 여자예요. 오로지 허영심으로 지금까지 버텨온건가봐요."


" ...왜 그렇게 말을 하지? 내가 아는 진유채는 그렇게 나약하지 않아!"


" 아뇨. 진유채는 사실 나약해요. 그래서 혼자 서기 겁이나서 든든한 남자의 힘이라도 믿고 세상을 살아보려 지금까지 버틴거죠. 이게 내 진짜 모습 일꺼예요."


태준은 갑자기 유채가 늘어놓은 자기 비하적인 발언에 또 다시 당황을 하기 시작했다.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도 저 혼자 잘났다고 꼿꼿한 여자, 목표를 위해서라면 영어 독파하는 것 쯤은 우습게 아는 여자... 그런 여자가 자신이 알고 있던 진유채였다. 하지만 지금 눈 앞에 유채는 갑작스럽게 패배자의 모습으로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고작 자신이 '신데렐라 컴플레스에 빠진 여자'라는 그 말 한마디를 했다는 이유로...


" 겨우 내가 싫은 소리 몇 마디 했다고..."


" 아뇨. 당신 때문만은 아니예요. 나, 늘 남자들은 나에게 상냥하고 다정하게 굴어왔기 때문에 나중에 남자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꺼라고 상상 안 해봤어요. 자만해왔던거죠. 솔직히 당신의 그 말... 나에겐 쇼크였지만, 지금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건 누가 되었건 나에게 내가 원하는 지위를 준 사람은... 서슴치않고 그보다 더한 말도 할 수 있다는 거죠. 바로 당신처럼..."


유채가 눈빛으로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이야기 했다. 태준은 유채를 잡고 싶었지만 드르륵 거리며 가방을 끌고 사라지는 유채의 뒤를 도저히 잡을 수 있는 어떠한 말도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 참, 속초에 아파트 사주었던 것은... 곧 처분해서 되돌려드릴께요."


잠시 뒤로 돌아 그 한마디를 내 뱉은 유채는 '안녕'이란 말도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 태준의 눈 앞에서 사라졌다. 아까까지 바로 앞에 서 있던 유채의 향기가 태준의 코 끝에 선명하게 남아있었지만 형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간거다... 가버린거다...

백사형에게로... 가버린거다...

태준이 비틀거리며 소파로 걸어가서 풀썩 주저앉았다. 유채와 함께 있을 때는 싸우더라도 마냥 행복해보이던 이 큰 공간이 순식간에 금속성의 차가움으로 무장된 곳으로 변해버렸다. 태준은 신데렐라 콤플렉스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었다. 어차피 지금 태준의 돈은 태준의 일부나 마찬가지였다. 유채가 그런 것으로 자신을 바라본다고 해도 어차피 그것이 100%는 아닐 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태준의 오산이었나보다. 유채는 가버렸다. 태준처럼 돈이 많은 남자에게... 그 남자가 더 유채는 좋았었나보다. 유채가 가버렸다는 것은... 결국 태준은 유채에게 있어 돈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존재였을 뿐이란 소리다.


" 후..."


태준의 긴긴 한숨소리에 집안의 공기는 더더욱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                     *                     *                     *                     *                

 

 


" 사장님. 노스텔지어 가든 호텔 샐리양 전화입니다."


신비서의 사무적인 목소리가 키폰을 타고 들려왔다. 태준이 여전히 서류뭉치에서 시선을 떼지않고 키폰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 전화 돌려요."


" 예."


신비서의 키폰이 끊기자마자 태준의 앞에 놓인 전화기가 울렸다.


" 김태준입니다."


태준이 딱딱한 목소리로 전화기를 받아들었다. 별 감정이 없긴 했지만서도 아직까지 모든 앙금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백사형의 사촌이니 샐리가 그리 곱게 사형의 눈에 비칠리는 없었다.


" 이런, 굉장히 사무적으로 전화를 받으시는군요. 잘 지내세요?"


샐리의 질문에 태준이 살짝 이마를 찡그렸다. 이 아무것도 모르고 맨날 모든 것이 즐거운 아가씨께서 어인 안부전화를 다 하고 난리인거지? 할 일 없으면 친구들하고 놀던가 하지 난 어쩌다 지금 표적이 된거래?


" 잘 못지내세요?"


태준이 아무 대답이 없자 샐리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여하간 성질도 급한 아가씨다.


" 아뇨, 잘 지내요. 좀 서류때문에 바빠서 정신이 없군요. 대답 늦어서 미안해요. 무슨 일이죠?"


틀린 말은 아니었다. 태준은 정말 요 며칠간 부쩍 일에 파묻혀서 지냈다. 매일같이 야근을 하는 덕분에 늘 퇴근이 늦어진 신비서의 입은 며칠 째 퉁퉁 불만으로 불어있었다.


" 아뇨, 별 일은 아니고... 잘 지내나 해서요."


또 한번 안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샐리에게서 태준은 무엇인가 묘한 냄새를 맡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전화를 한거지? 분명 샐리는 지금 용건을 따로이 두고 말을 돌리는 느낌이 역력했다.


" 무슨 말을 하려고 전화를 한거죠?"


태준이 잠시 서류에서 눈을 떼고 전화기에 신경을 집중했다. 나지막히 샐리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 유채가... 같이 지내고 있다는거 알아요. 유채 잘 지내나요?"


" ... 유채?"


" 네. 도통 연락이 안되서 결국 태준씨에게 걸었어요."


" ... 그걸 왜 나에게 묻죠?"


" 예?"


샐리의 목소리가 옥타브를 그리자 태준의 신경은 더더욱 날카로워졌다.


" 유채 이야기라면 백사형이 가장 잘 아는게 아니었었나? 묻는 번지수가 틀린 것 같은데?"


" 아, 아니..."


전화기 저 너머로 샐리가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 사형오빠가 유채를 무슨 수로 잘 안대요?"


" 유채가 그리로 가겠다고 나갔으니까."


" 예? 언제요?"


" 한... 2주 되었나?"


" 뭐라구요?"


태준의 대답에 샐리의 목소리를 지붕이라도 뚫고 올라갈 것처럼 급히 상승곡선을 그렸다. 샐리가 왜 그렇게 광분을 하는지 태준으로서는 알 턱이 없었다.


" 유채... 사형오빠한테 안 왔어요. 둘이 얼굴 본 건 그 신문 사건 이후에 딱 한번 유채가 따지러 사형오빠 병원에 왔을 때 뿐이라는데요..."


" ...!"


한순간, 태준은 유채가 사형에게 가지 않았다는 말에 지금까지 응어리졌던 감정들이 눈녹듯이 사라져버렸다. 유채는 사형에게 가지 않았댄다....


" 정말 어떻게 된거지? 유채 속초 집에서도 어디있는지 모르던데... 학교도 나오지 않고..."


샐리의 목소리에 짙게 깔린 그늘에 태준은 잠시 구름속을 날아다니던 기분에서 급히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태준의 관심에서 서류 종이들이 이미 저만치 멀어졌다.


" 그게 무슨 소리야?"


" 어떻게 아무도 유채가 어디있는지 모르는거죠?"


" 잘 가던 카페나 바도 가봤어?"


" 유채 왔다간지가 얼마나 되었는지도 기억도 안 난대요."


" 대체 그럼 걔가 어디 갔다는 거야?"


" 전들 알겠어요?"


태준은 그 날 유채가 나가던... 그 날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그렇게 가방을 들고 나가면서 태준은 분명 유채가 사형의 집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잡지 않았었다. 그런데... 샐리는 지금 유채가 사형의 집으로 오지 않았다고 했다.

유채는... 지금 사라진거다.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사라져버린거다.


가출... 납치... 실종... 살해... 오늘 아침까지도 끊이지 않던 부녀자 납치 살해사건에 관한 뉴스들이 태준을 자꾸 불안하게 만들었다. 혹시... 전에 유채에게 붙였던 사람들이 유채의 행선지를 알지 않을까? 아... 내가 그 날 이후로 의뢰를 취소해버렸지...


" 경찰에 연락해야되는걸까요?"


샐리도 태준과 같은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 우선, 유채의 주변인들에게 모두 연락을 해보자고. 설마 외국으로 나르지 않은 이상 한국 땅에 있겠지. 그리고 최소한 외국으로 갔으면 출국했다는 내용이라도 알 수 있겠지..."


엉뚱맞게 태준은 유채에 대한 걱정보다 작은 희망의 불씨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번에 다시 나타나면 절대 널 쉽게 그렇게 보내는 일은 없을꺼야. 진유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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