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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알갱이 - 37

이끼 |2004.11.26 13:09
조회 1,097 |추천 0

"흐음..."

 

목이 바짝 타는 느낌에 유채는 잠에서 깨어났다. 10평도 채 되지 않는 코쿤하우스... 이 곳이 지금 유채가 살고 있는 곳이다. 창문조차 하나 제대로 달려있지 않아서 영 통풍도 제대로 되지를 않는다.

 

" 켁... "

 

안 좋은 공기를 너무 오래 마셔서였을까? 유채는 머리맡의 주전자를 더듬거려 찾았다. 물이라도 마시면 칼칼한 목이 그나마 좀 나아지겠지... 정말 목을 좀 축이고 나니 그제서야 잠이 깬다. 가슴이 뻥 뚫린 듯한 기분으로 유채가 자신의 방안을 빙 둘러보았다. 아마 12시가 되는 순간 마차가 호박으로 되돌아가던 순간의 신데렐라는 이런 기분 이었을지 모른다.

 

정말이지 이 방을 둘러보는데는 머리조차 돌릴 필요가 없다. 왼쪽, 오른쪽 눈동자만 한바퀴씩 굴려주면 모든 것이 다 보인다. 이 방은 한달에 보증금없이 20만원이면 빌릴 수 있는 곳이다. 말이 코쿤하우스지... 사실 이 곳은 고시원이다. 책상과 냉장고, 그리고 작은 옷장하나... 그것이 이 방의 전부다. 전열기구는 화재의 위험이 있어서 공동생활영역에만 존재한다. 세탁기 같은 것도 역시...

 

불과 며칠전의 태준의 펜트하우스에서 화장실 하나의 값이면 아마 이 곳을 통째로 살 수도 있을 듯 싶다.

 

" 이게 내 현실인거야... 이것이..."

 

유채가 이젠 완전히 잠에서 깨어난 눈으로 벌렁 침대위에 도로 누워버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것이 현실이라고 자각할 때마다 너무도 절실하게 다시 펜트하우스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 화려한 가구와 최고로 편안하고 안락하게 준비된 삶을 매일매일 꿈을 꾸듯 되새기고는 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간다면 살아지는 것이란 생각이 계속 유채를 괴롭혔다.

 

" 어머, 벌써 4시야?"

 

유채는 문득 시계로 고개를 돌렸다가 일을 하러나갈 시간이 다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게으름을 피우던 침대에서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태준의 집에서 나온 뒤 유채는 일을 시작했다. 시급 5000원이면 상당히 괜찮은 일당이었다. 출근시간 7시 퇴근시간 새벽 2시... 마감까지 하고나면 겨우 아침 한그릇 먹고 침대에 쓰러지기 바빴다. 그래서 학교도 휴학했다.

 

유채는 지금 자신을 시험중이었다. 만약 남자의 그런 상승계단을 밟지 않는다면 나는 내 능력으로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인가? 아직 아무런 대답도 얻을 수 없었다. 잠을 자느라 흐트러진 머리를 벅벅 긁어대면서 유채는 터벅터벅 욕실로 걸어갓다. 분명 이 삶은 남자에게 기대어 사는 삶보다는 많이 고된 것이 분명하다...

 

태준도 이런 삶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유채는 갑작스럽게 떠오른 태준의 이름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만약 그는 나와 같은 상황이라면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여길까...?

 

 


*                 *                   *                 *                 *                  *

 

 


" 그게 무슨 소리야? 유채가 사라지다니?"

 

뒤늦게 샐리의 이야기를 들은 사형이 언성을 높였다. 며칠간 유채와 연락이 되지 않기에 그저 태준에게로 갔겠거니 싶어서 망연마실하게 자포자기를 하고 있던 사형이었다.

 

" 쯧쯧쯧... 이래가지고 무슨 여자를 꼬시노?"

 

샐리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혀를 끌끌거렸다. 글구보니 사형이나 태준이나 하나같이 서로 상대방에게 유채가 갔겠거니 싶어서 일절 유채에게 아무런 연락도 취해보지 않았었나보다. 하여간 애정문제에 있어서 어떨 때 보면 남자가 여자보다 훨씬 더 소극적이다.

 

" 그래서? 유채는 지금 어디 있는거래?"

 

" 모르지 뭐. 지금 태준이 미친듯이 찾고 있어. 태준은 유채가 짐을 싸서 나갈 때 오빠한테 갔는 줄 알더라구."

 

" 나한테? 나한테 유채 안 왔어."

 

" 나도 알아."

 

사형의 말에 유채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자신의 사촌이긴 하지만서도 사형은 너무도 우유부단하다. 태준은 사실을 알자마자 종말 뉴스라도 들은듯이 목소리를 높이던데... 기껏 한다는 소리가 자기한테 안 왔다니...

 

"오빠는 어쩔꺼야?"

 

결국 샐리가 사형을 다그치는 형색이 되어버렸다.

 

"응?"

 

"유채 어쩔꺼냐고?"

 

"너랑 태준이 곧 찾아내겠지... 나까지 나설 필요있겠어?"

 

어이없는 대답...

 

"오빠 뭐야? 어부지리야?"

 

"그렇게 표현하니까 내가 좀 비열한 놈 같잖냐... 좋게 말해서 두명이 찾으면 곧 찾아낼텐데 유채의 행동 패턴도 잘 모르는 내가 나서는 것은 낭비 아니냐... 뭐 그런 소리지?"

 

능글맞게 여유로운 웃음을 보이고 말을 하는 사형에게 샐리는 황당 그 자체였다. 이 사람... 내가 아는 그 다정다감한 사형오빠가 맞는거야?

 

"오빠... 유채 좋아하는 거 맞긴 한거야?"

 

"뭐가 의심스러운거지?"

 

여전히 자신의 페이스를 잃지않는 사형이 경찰에게 연락이라도 하겠다는 태준과 비교가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샐리, 너도 아직 어리구나.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말야... 늘 불나방처럼 열정적이고 과격하고 그런게 아니야. 설령 내일 유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무지 슬플 수도 있지만 그 다음날이 되면 난 또 이 병원에 출근해서 또 일을 하고 그러면서 살아가겠지. 상대방을 좋아한다고해서 그 상대와 나를 동일시 여기는 것은 그리 권장할 만한 것이 아냐..."

 

사형이 차분한 목소리로 씩씩거리는 샐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사형의 말에 다혈질적인 성향이 다분한 샐리는 입만 떡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오빠..."

 

몇 분이 흘렀을까? 아주 잠깐의 침묵 뒤에 샐리가 다시 차분한 말투로 사형에게 말을 걸었다.

 

"응?"

 

"오빠... 경영에 뜻이 없는게... 아니지? 경영 안 하려고 동물병원 일을 하고 있는게 아닌거지?"

 

지금 샐리는 이전에 미처 몰랐었던 사형의 새로운 성격의 일면을 보고 있었다. 그냥 다정다감한 오빠로만 알고 있던 사형이 없어진 유채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냉철하게 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나에 대해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마, 다쳐."

 

사형이 가볍에 샐리의 이마를 두 손가락으로 튕겼다.

 

"아얏!"

 

그 효과로 샐리의 머리속에서 마구 돌아가던 생각이 잠시 멈찟 하더만 그대로 날아가버렸다.

 

"태준에게 가서 유채 찾았나, 그거나 좀 알아봐. 글구 찾으면 나한테도 연락주고..."

 

"몰라! 오빠한테 연락 안할꺼야."

 

샐리가 오른손으로 이마에 손을 얹은채 뽀루퉁한 표정으로 휭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마 한대 친 것으로 삐졌다는 의사가 역력했다.

 

"아직 어려... 뭘 몰라도 너무 몰라."

 

그런 샐리의 뒤를 보면서 사형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                 *                   *                 *                 *                  *

 

 

 


삐리리리...


사형의 동물병원을 뛰쳐나와 유채와 자주 가던 쇼핑몰이니 단골가게들을 한바퀴 돌고 있던 샐리의 핸드폰이 촌스럽게 울려댔다. 일부러 못 받을까봐 소리를 키워놨더만 찌링찌링 울리는데 아주 매너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헉! 태준이다! 샐리가 핸드폰 액정에 떠오른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찾았어요? 유채 찾았어요?"

 

"거, 대답할 틈은 주고 물어봐야되는거 아닌가?"

 

퉁퉁거리는 목소리가 여전한 태준이었다.

 

"유채 찾았어요?"

 

"찾은 것 같아."

 

"어디예요? 그리로 갈께요?"

 

샐리가 서둘러 주차장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해서 인지 그만 핸드백을 손에게 놓치자 물품들이 우르르 바닥으로 쏟아져내렸다. 젠장... 급할 때는 꼭 이런 사고가 일어난다.

 

"찾으면 내가 다시 연락할테니까. 이리 올 것 없어."

 

태준이 단칼에 잘라 말했다.

 

"아뇨, 저 갈래요. 거기 어디예요? 제가 설득해서..."

 

샐리가 한손에는 핸드폰을 잡고 한손으로 쏟아진 물품들을 가방에 아무렇게나 마구 던져넣으면서 조급하게 서둘렀다. 벌써 한참이 되었단 말이다... 걱정되서 미칠 것 같은데 오지 말라고?

 

"우리 둘의 문제야. 그 때문에 집 나간거니까 니가 설득할 필요없어. 이따 유채 만나면 다시 연락하지."

 

뚝-.

 

"여보세요? 여보세요?"

 

뚜- 뚜- 뚜-

 

자신의 할말만 마친 태준이 매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젠장... 사형도 그렇고 태준도 그렇고 정말이지 하나도 맘에 안 들어!"

 

제 성질에 못이긴 유채가 가방안에 넣어야할 립스틱을 저 멀리 던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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