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우..."
유채가 마지막 신문을 가위로 오려내고는 나머지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유채의 앞에는 온갖 주간지와 신문에서 오려낸 태준의 기사가 가득했다.
- 메이플은 게이 식당이었다.
- 김태준 사장과 매장 최고 책임자의 이룰 수 없는 사랑(?)
- 깈태준의 커밍아웃
- 비운의 노스텔지어 신부의 세기의 러브 스토리 대 공개
"미쳤군... 다들 미쳤어..."
그동안 별다른 연예계 사건이 없어서 신문, 잡지사들이 꽤나 심심했던 모양이었다. 대충 눈에 보이는 기사들만 오려서 모아놓았는데도 그 양은 실로 대단했다. 아마 지금 대한민국 땅에서 김태준이 게이라는 기사를 안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았다. 다시 찬찬히 기사를 훑어보던 유채의 눈에 경제신문의 기사 하나가 매섭게 걸렸다.
- 메이플 경영진 전격 퇴진
"세상에..."
- 메이플 주주들은 오늘 아침 총회를 열고 김태준 대표를 퇴진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 김태준 대표의 스캔들이 불거지면서 메이플 주식이 겉잡을 수 없는 애물단지로 전락하자 주주총회에서는 특단의 조치를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이로서 메이플은...
김태준이 메이플에서 쫗겨났다고? 유채는 충격으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 자신만만한 인간이 이런 상황을 견딜 수 있을 지 유채는 도저히 아무런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나밖에 모르는 융통성이라고는 발톱의 때만큼도 없는 김태준은 휘어지느니 부러지는 쪽을 택할 인간이었다. 유채는 서둘러 핸드폰을 들어 단축번호 3번을 길게 눌렀다.
"지금은 고객의 전원이 꺼져있..."
이미 많은 전화가 태준에게 걸려가서였을까? 아니면 그 누구의 연락도 받고 싶지 않아서 잠적을 해 버린 것이었을까? 유채를 조바심으로 길게 기른 손톱의 끝을 무심코 잘근잘근 물어뜯고 있었다. 분명 집에 있을 것은 아니겠고... 그렇다면 대체 어디에...?
샐리! 그래도 제일 태준과 가까이 연락 할 수 있는 사람은 샐리뿐이라는 생각에 유채는 서둘러 샐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유채는 낯선 목소리에 핸드폰 번호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분명 샐리의 번호가 맞는데 들려오는 목소리는 낯선 나이든 여자의 목소리였다.
"저, 샐리 핸드폰 아닌가요?"
"네, 샐리 아가끼 핸드폰 맞습니다."
샐리 아가씨? 아... 오려놓은 태준의 기사위로 이리저리 샐리의 이름이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샐리의 상황도 지금 정상적인 것은 아니겠군...
"샐리 좀 바꿔주시겠어요?"
"누구시라고 전해드릴까요?"
"진유채라고 해주세요."
"잠시 기다리세요."
샐리가 엄중한 감시 속에 있다는 것이 느껴지자 유채는 태준의 상황이 몇줄짜리 기사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것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잠시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소음이 전화기를 타고 유채의 귀를 관통했다.
"유채? 유채니? 어머! 진짜 유채인거야? 야, 너 어디야?"
샐리의 목소리는 반갑다고 하는 것보다 훨씬 상위의 감정을 나타내고 있었다. 유채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가 곧 폈다. 샐리의 지금 상황을 유채가 이해안한다면 누가 이해해 주겠는가.
"그래, 나야."
"야, 지금 나 장난아니야. 울 아빠가..."
"나 신문 기사 보고 전화하는거야."
"봤어? 난 봐도 모르겠어 도대체 뭐가 문제인거야? 유채야 우리 만나서 이야기하자. 우리 호텔로 좀 와봐."
샐리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하지만 유채는 지금 샐리보다는 태준의 상황이 더 걱정이 되었다. 워낙에 낙천주의의 대표격인 샐리는 어떠한 일이와도 꿋꿋하게 잘 견뎌낼 스타일이었지만, 태준은 아니었다.
"알았어. 갈께. 그런데 그 전에 나 우선 태준씨부터 만나보고."
"태준씨? 아... 야, 태준씨 난리 났어. 회사 짤린거 알아?"
"기사 봤어."
"벌써 기사났어? 지금 태준씨 난리도 아냐. 지금 그 집안 완전 풍지박살나기 일보직전이야. 지금 전재산 들고 이민을 가네, 마네 하고 있어."
이민? 그 정도로 알려진 사람들이면 어디로 이민을 가도 숨어사는 것이 그리 수월치 않을 텐데... 유채는 소리없이 표정을 살짝 구겼다. 어쩌다 태준은 사태를 이 지경으로 몰고 간걸까...
"샐리야, 태준씨 지금 어디있는지 혹시 알아?"
"나야 여기 갇혀서 뭘 알겠니. 그나마 간간히 전해듣는게 전부인데... 아, 태민이한테 전화하면 아마 얘기 들을 수 있을꺼야. 내가 번호 불러줄께. 적어."
"그래."
유채는 샐리의 말에 거칠게 볼펜 뚜껑을 입에 물어 뽑았다.
* * * * * *
"여기예요!"
유채의 전화를 받자마자 태민은 기다렸다는 듯이 만나자는 이야기를 했고 먼저 유채가 약속장소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한 손을 들어서 유채에게 아는 척을 했다. 전에 샐리와 잠깐 태민을 봤던 유채는 자신에게 완전히 적대감이 사라진 상태의 태민이 상당히 의외스러웠다.
"죄송해요. 빨리 오려고 택시를 탔는데 워낙 강남쪽 길이 많이 밀려서..."
"아뇨. 밀리는 거 알면서 이리 약속장소를 잡은 제가 나쁘죠. 하지만 기자들이 출입할 수 없는 장소는 이 곳이 제격이라..."
태민이 태준의 웃음과 너무도 흡사한 입술모양을 만들어내며 웃었다. 순간 유채의 머리속에 태준의 이름이 가득 찼다.
"태준씨 잘 있어요? 괜찮아요?"
"그 문제 때문에 유채씨에게 부탁이 있어요."
"말씀하세요."
태민이 말을 하기 난감한지 테이블에 놓인 물컵으로 먼저 목을 축였다.
"음료수라도 뭐 좀 시킬까요?"
유채가 상냥하게 웃으면서 태민에게 말을 건넸다. 그렇지 않아도 유채도 목이 마르다는 생각이 들던 차였다.
"아, 그럴까요? 전 그냥 오렌지주스로 하죠."
태민의 말에 유채가 손을 들어 웨이트레스에게 오렌지 주스 2잔을 주문했다.
"유채씨."
웨이트레스가 주문을 받고 자리를 뜨자마자 태민이 유채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사뭇 진지하다는 분위기가 가득했다.
"말씀하세요."
굳은 태민의 표정 때문에 유채는 얼굴에 잔뜩 상냥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유채의 표정에 용기를 얻은 태민이 유채를 또렷하게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형하고 결혼발표를 해주세요."
"네?"
태민의 말에 유채가 소스라치듯 놀라 소리를 질렀다.
"결혼하라고까지 부탁 안 할께요. 제발 결혼 발표만 해주세요."
"저기... 하지만, 전..."
"형을 지금 온 나라에서 게이로 매도 시키고 있는거 알죠? 우리 형 게이 아닌거 유채씨도 잘 알지 않나요? 언론사 고소할까해서 준비도 해보고 그랬는데 이게 명확하게 증거가 없는 문제라는걸 지금 처음 알고 있어요. 언제 준비했는지 언론사 쪽에서 태준형이 게이라는 증거 자료를 정말이지 많이도 긁어모아 놨더라구요."
"세상에..."
유채가 태민의 말에 놀라서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때 웨이트레스가 오렌지 주스를 가져오는 바람에 둘 사이의 대화는 잠시 끊겼다.
"유채씨가 태준형과 결혼 발표를 해주세요."
"여자가 필요한거라면 더 말고도 많을텐데요."
"지금 누가 있겠어요. 솔직히 유채씨와 결혼하겠다고 형이 집에 폭탄 선언한 후에 집에서 은밀히 형의 친한 동창친구와 집안끼리 결혼을 추진하고 있었더랬어요. 그런데 이 사건 터지기가 무섭게 그 집에서 완전히 안면몰수예요. 같이 시궁창에 빠질 수 없다 이거죠 뭐."
태민의 말에 유채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유채씨보고 시궁창에 빠지라고 하는 건 아니구요. 제 계획 좀 들어보세요."
유채의 표정에 태민이 당황해서 두 팔을 휘휘 저으며 부정의 의미를 나타냈다. 상황이 상당히 급박하다는 것은 그런 그의 어설픈 동작만으로도 유채는 충분히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게 태준 못지 않게 거들먹거리던 태민이 자신에게 이렇게 나올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솔직히 유채씨는 저희와는 조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유채씨와 태준 형의 러브스토리로 포장을 하면 지금 말도 안되는 루머는 충분히 덮을 수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게요..."
태민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버벅거리기 시작했지만 유채는 태민이 말하는 바를 이미 알아차렸다. 신데렐라 스토리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평범한 여자가 남자 하나 잘 만나서 성공하는 그런 스토리로 포장해서 화제를 집중 시켜 달라는 그런 부탁이었다.
"태민씨 알겠어요. 그런데 태준씨는 이 이야기에 대해서 뭐라고 그랬나요?"
유채는 태준의 의견이 궁금했다. 과연 태준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고 이런 시나리오에 연기를 부탁할까? 유채는 의심스러웠다.
"유채씨, 지금... 형 실종되었어요."
"네?"
"그래서 더 급한거예요. 우리형 성격 좀 알죠? 형.. 지금 너무 상처 받았어요. 솔직히 지금까지 평생 살면서 형제간에 우애니 어쩌니 하는 것들 저 한번도 느끼고 살아본 적없는데... 형이 메이플 대표에서 물러나던날 그 날의 그 망연자실한 표정... 저 정말 평생 못 잊을 지도 몰라요. 제발... 제발 유채씨가 태준형을 구해줘요."
유채는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오렌지 주스에 꽂혀있는 빨대로 입을 가져갔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쉽게 실행할 일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이건 사기나 다름없는 행위니까...
"젠장, 그 뱀같은 백사형만 아니었어도..."
태민이 벌컥벌컥 오렌지 주스를 들이키고 내려놓으며 중얼거리는 소리에 유채의 귀 끝이 찌릿했다. 백사형?
"태민씨 지금, 뭐라고 했어요?"
"형의 그 날조된 게이기사요... 그거, 백사형이 조종한거예요."
"네?"
유채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백사형이 김태준의 기사를 날조시켰다고? 왜?
"샐리의 친척만 아니었어도 진짜 온갖 방법 다 동원해서 완전히 뭉개놓는건데... 참 내, 전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게 자기 사촌동생 전 약혼자를 그렇게 날조해서 뭉개놓으면 지 사촌동생 이름은 기사에 오르내린다는 것을 계산을 안 했던건지..."
태민의 이야기가 유채의 머리속에서 정신없이 빙글빙글 돌았다. 백사형...? 백사형이 그럤다고? 혹시... 혹시... 나 때문에...? 생각은 계속 유채를 자책하는 쪽으로 파고 들어갔다. 더이상 의자에 앉아있을 수 없는 유채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태민씨, 나 먼저 가볼께요."
"네? 저, 그럼... 우리 이야기는...?"
태민이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가 다시 연락할께요. 미안해요. 먼저 갈께요."
유채가 무엇인가에 쫓기듯이 허겁지겁 사라지자 태민이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힘없이 주저앉았다.
"젠장... 진짜 이 방법밖에 없는데..."
^^;; 오늘은 여기까지에요~ 내일 완결할께요
추천과 댓글 너무너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