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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알갱이 - 44

이끼 |2004.11.27 13:10
조회 1,913 |추천 0

술이 없다...

 

태준은 인천의 어느 바닷가의 주황생 천막안에서 홀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평소의 깔끔한 모습이 아닌 바닷가 비린내가 풍기는 작업복에 바닷바람으로 흐트러진 머리칼과 수북한 수염은 누구도 그가 메이플의 김태준이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 없었다.

 

"아줌마, 여기 소주 한병 더요."

 

"아이고, 무슨 젊은 사람이 술을 그리 마시나?"

 

포장마차 안주인이 술을 가져다주면서 태준에서 한마디를 던졌다. 태준은 이슬이 송송맺혀있는 소주병을 질끈 비틀어 열었다. 메이플 대표에서 물러나던 날, 사무실에서 누런 종이박스 하나에 이런 저런 자신의 소품을 챙겨놓던 그 기분으로 태준은 도저히 서울에서 머무를 수가 없었다. 누군지 몰라도 분명 지능적으로 메이플을 집어 삼킨 것이 분명했다.

 

"아무려면 어떠냐..."

 

태준이 자포자기한 듯한 말을 내 뱉으며 진한 소주 한잔을 삼켰다.

 

"크으..."

 

몰랐었다. 소주가 이렇게 좋은 술이라는 사실을 태준은 정말 감쪽같이 몰랐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괴로울 때 마시는 헤네시의 향을 사랑하던 태준이었다. 진한 알코올 향이 듬뿍 묻어나는 소주야 말로 진정한 고통의 친구라는 믿음이 태준의 마음속에서 새록새록 생겨나고 있었다.

 

"어이구, 김군. 여기서 한잔 하는거야?"

 

태준이 쓴 소주잔을 내려놓고 아직 제대로 씻지도 못한 더러운 손등으로 입을 훔쳐내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윤선장이 그 곳에 그 넉넉한 사람좋은 웃음을 가득 머금고 서 있었다.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며칠 부둣가를 헤메고 있던 태준에게 뱃일을 제안했던 윤선장은 마징가라는 이름과는 안 어울리는 작은 배 하나를 가지고 있는 선장이었다.

 

"괜찮다면 같이 한잔 하겠는가?"

 

"그럼요."

 

윤선장의 말에 태준은 의자를 하나 끌어다 자신의 앞에 붙여놓았다. 그러고 보면 서울에 있을 때의 깐깐했던 태준의 성격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고난과 역경은 사람의 인격도 바꿀 수 있는 힘이 되는건가?

 

"뭐가 그리 힘들어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게야?"

 

태준은 그저 말없이 웃으면서 윤선장의 술잔을 가득채웠다.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는 부분이지 않는가. 괜시리 이상한 시선을 받게 될까 태준은 두려웠다.

 

"언제쯤 마음 정리하고 떠날 계획인가?"

 

"글쎄요.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그랬다.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었다. 메이플 시절에는 늘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때문에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게 열심히 살았었는데, 지금은 아무런 목표도 아니, 앞일에 대해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무엇때문에 그렇게 좌절하는건지 잘 모르겠지만, 원래 젋을 때 한번씩 다 그런 시절을 겪는걸세. 그리고 이겨내야 더 단단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말을 마친 윤선장이 태준의 소주잔을 챙소리가 찌릿 하도록 부딪혔다. 잔을 부딪힌 태준은 윤선장에게 한번 씨익 웃고는 고개를 젖혀 소주를 털어넣었다. 그 때,

 

"맞다니까..."

 

"어허, 글쎄 아니라니까..."

 

"수염때문에 그렇다니까! 수염만 빼면 똑같애."

 

태준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무언가를 열심히 보는 두명의 남자가 태준과 시선이 부딪혔다. 천천히 그 잔을 내려놓으면서 그 남자들을 주시하는 태준...

 

"응? 김군, 아는 사람들인가?"

 

소주를 크윽거리며 마셨던 윤선장이 오뎅국물을 떠먹다 말고 태준과 같은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뇨..."

 

태준이 쳐다보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뭔가를 떠들어대는 남자에게 태준은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윤선장님, 잠시만요."

 

"그러게."

 

결국 태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남자들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거봐, 맞잖아!"

 

"어?"

 

가까이 다가온 태준에게 한명은 놀람의 눈빛을 그리고 또 한명은 기쁨의 눈빛을 보냈다. 물론 태준은 그 둘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실례지만, 왜 자꾸 저에게 손가락질을 하십니까?"

 

태준은 약간 화가 난 상태였지만 최대한 점잖고 예의를 갖추어 남자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원래 그의 그 매서운 눈매가 예의없이 날카롭게 살아났음은 물론이다.

 

"저기, 말씀 좀 물읍시다."

 

둘 중 기쁨의 눈빛을 보내던 남자가 태준을 항해 술에 취해서 혀가 꼬부라진 발음으로 물어왔다.

 

"예, 뭡니까?"

 

"이거 당신 맞죠?"

 

그 남자가 펼쳐서 손가락으로 가르킨 신문을 본 태준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 21세기 신데렐라 등극 - 김태준의 게이 기사는 거짓이었다. 사실은 자신의 피앙세인 진유채양을 보호하기 위한 은막작전이었다. 오늘 낮 3시 강남의 G 백화점에서 T사의 핸드백과 구두를 구매하려 김태준의 신용카드를 내밀었던 진유채양은 G 화점측의 본인 확인이 안된다며 승인을 거부하자 크게 소동을 일으켰다. 진유채양이 내밀었던 카드는 신용한도가 무한대인 탑 클래스의 카드이며, 이에...

 

 

 

 

*                   *                   *                   *                   *                   *

 

 

 

"와~ 유채씨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요? 담번에 형의 게이기사를 뒤짚어 엎고 오히려 그 기사를 유채씨를 위한 바람막이로 위장시키다니!"

 

태민은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또 보았다. 유채가 쓴 기사 원고 초안을 몇몇 신문사와 잡지사에 먹이로 던져주자, 태준의 게이기사에 대한 특종을 못 잡았던 신문사에서 일제히 얼씨구나 좋다하고 그 먹이를 받아먹어 버렸다. 물론 모든 것은 유채의 계산하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뭘요, 아직 멀었어요. 메이플 주가 곤두박질치게 만들어야죠."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그걸 지금 알았단 말야? 넌 아직 사람보는 눈 키우려면 멀었어."

 

샐리가 부엌에서 한참을 달그닥거리더니 먹음직한 과일을 가득히 쟁반에 받쳐서 태민과 유채앞으로 들고나왔다.

 

"그럼 나랑 결혼하게 될 너는 뭐냐?"

 

태민이 샐리의 말에 지지않고 떠들었다.

 

"소도 뒷걸음치다 쥐를 잡을 수 있는거지."

 

"허이고, 곧 죽어도 자기는 잘났대요."

 

"그러시는 댁은?"

 

"시끄럿!"

 

또 다시 샐리와 태민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하자 유채가 포크를 들고 소리를 빽 질렀다.

 

"대체 두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싸워? 그렇게 싸우고 싶으면 여기 방 많으니까 방에 들어가서 싸우고 와. 시끄러워 죽겠어, 진짜."

 

"야아, 무슨 방에 들어가...서 싸... 우냐..."

 

유채의 말에 샐리가 얼굴이 발그레레해졌다.

 

"또또... 주책없이 오버한다."

 

그리고 태민의 갈굼.

 

"아, 둘 다 싫어. 진짜! 아직 태준씨 돌아오지도 않고 연락도 없어서 죽겠구먼 자꾸 두 사람 이럴꺼야?"

유채가 짜증스럽다는 듯이 사과하나는 포크로 푹 찍어서 아삭아삭 깨물었다. 분명 어떻게든 지금쯤이면 신문기사를 보고 남았을 시간이었는데 도무지 태준은 연락이 닿을 생각을 안했다. 계속 꺼져있던 핸드폰은 결국 방 구석에서 찾아냈으니, 그저 태준에게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그래서 결국 태준의 캐슬타워의 펜트하우스로 유채는 다시 짐 보따리를 끌고 들어왔다. 유채가 나갈 때의 모습 그대로 방은 전혀 손도 대지 않은채 보관되어 있었다. 자신이 없이도 보존이 되어있는 방을 유채는 정말 묘한 상념에 빠졌다. 어쩌면... 어쩌면 말이지...

 

삐리리리...


그 떄 전화벨이 울렸다. 갑작스러운 전화벨 소리에 유채와 태민 그리고 샐리는 서로의 얼굴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혹시 잡지사 기자 아니야?"

 

샐리의 말.

 

"아냐, 걔네들은 내 핸드폰으로 연락해. 여기 전화번호를 아는 사람은 태준밖에 없어."

 

유채의 말.

 

"제가 받을까요? 아얏!"

 

그리고 엉뚱한 소리를 하고서 샐리에게 꼬집힌 태민의 말이었다. 유채가 조심스럽게 전화기에 다가가 전화기를 들었다. 샐리와 태민은 침을 꼴깍 삼키면서 그런 유채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여보세요."

 

"나야."

 

역시 태준이었다. 분명 신문기사를 본 것이 틀림없었다. 유채가 환하게 웃으면서 샐리와 태민에게 신호를 보내자 그 둘은 유채가 보는 앞에서 서로 기쁨의 포옹을 나누었다.

 

"무슨 생각으로 저지른거야?"

 

여전히 냉랭하고 딱딱한 태준의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으니 유채는 지금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사람이 진짜 태준이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뭐, 도움 받은 것도 있고해서... 빚 좀 갚았어요."

 

"...니가 이런다고 정리될 일이 아니야."

 

딱 잘라서 말하는 태준의 말에 유채는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태민도 조금 전에 대단하다고 하는 일을 별 것도 아닌 식으로 취급하는 태준에게 유채는 열이 받았다.

 

"정리가 되면 어쩔래요?"

 

"글쎄,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만만하게 보여? 사람들 속이기가 어디 쉬운 일인지 알아?"

 

"속여요? 뭘 속여요? 당신이 진짜로 게이인데 내가 아니라고 속였어요?"

 

"진유채!"

 

태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전화기를 타고 유채의 뇌속으로 전달되었다.

 

"김태준씨 똑바로 들어요. 남자만 여자를 보호하고 감싸고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착각하는 마초 김태준씨. 내 반드시 당신 사고 방식을 뜯어고쳐줄테니까, 각오 단단히 해요."

 

"대체 네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다는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요."

 

"진유채, 그냥 넌 네 장점 살려서 살아. 나 같은거 관여하지 말고."

 

처음으로 들려온 김태준의 약한 발언에 유채의 가슴은 잘못 씹은 인삼뿌리처럼 쓴 맛이 배어났다. 차라리 이런 모습 보다는 오만한 마초맨이 훨씬 더 김태준 다웠다.

 

"별 천치같은 소리를 다 듣겠군요. 전에는 자신의 뒤만 따르면 세상의 모든 일을 당신이 해결해주겠다고 자신만만해하더니."

 

"후..."

 

김태준의 깊은 한숨소리에 유채는 그만 코끝이 시큰해졌다. 유채는 김태준이 무너져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당당하게 빛나던 태준이 자신을 이토록 한심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니... 그것은 지금까지 어떤 상황에서도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드높은 자긍심으로 살아왔던 유채에게는 그 무엇보다고 서글프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난, 내 남자가 그렇게 한심한 꼴 보이는 거 용서못해요."

 

"진유채!"

 

"당장 돌아와요!"

 

"이러지마, 유채야!"

 

"메이플 레스토랑 다시 되찾게 해줄테니까 돌아오란 말야!"

 

"......"

 

"일주일 뒤, 우리 결혼발표 기자회견이 노스텔지어 호텔의 루비홀에서 있어요. 거긴 꼭 나타나야되요."

 

"......"

 

"나타나리라고 믿어요."

 

유채는 태준의 뒷말을 듣기전에 먼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전화가 더 길어지면 태준이 안오겠다고 버틸것만 같아서 그 뒷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뭐래?"

 

샐리가 어느새 옆에 다가와서 유채의 어깨위에 다정하게 손을 올리며 물었다.

 

"모르겠어. 만약에 태준씨가 결혼발표할 때 안 나타나면 어떻게 하지?"

 

"나타나겠지..."

 

"나, 두려워. 나중에 내가 벌인 자작극이라고 누군가 매도하는 공격을 퍼부으면 나 버틸 수 있을까?"

 

유채가 살짝 배어난 눈가의 눈물을 훔쳐내자 태민이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티슈를 몇장 뽑아 유채에게 건넸다.

 

"형은 아마 올꺼예요. 유채씨 거짓말쟁이로 안 만들기 위해서라도 올꺼예요."

 

"그럴까요?"

 

태민의 확신에 찬 말에 유채는 작은 위안을 얻었다.

 

"괜히 나 때문에 벌어진 일 같아서 내가 다 미안하네. 난 사형오빠가 너랑 잘되기를 빌고..."

 

"괜찮아. 샐리야. 네가 아니면 난 어차피 태준씨도 못 만났을텐데 뭐."

 

"그러면 다행이고... 그런데 유채야..."

 

"응?"

 

"너, 태준씨 사랑하는거야?"

 

"샐리야, 넌 왜 그런걸... 어휴..."

 

샐리의 질문에 태민이 강하게 질책을 하고 나섰다. 사랑? 태준씨를 사랑...? 유채의 마음은 일순간 또 혼란이 찾아왔다. 사랑한다.... 사랑안한다... 사랑한다... 사랑안한다...

 

"어떻게 보면 유채 네가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여러가지 복잡하게 연류가 되서 지금 이러는게 아닌가 싶어서... 그래서 걱정되서..."

 

샐리의 걱정스런 말에 유채가 씨익 웃었다.

 

"글쎄, 여하간 인연이니까 지금 나랑 이렇게 얽히는게 아닐까?"

 

그래, 인연이 없다면 얽힐 일도 없는 것이다. 무엇인가 자꾸만 일이 생기고 그것이 연결고리가 되어 또다른 일이 생기고... 지금까지의 이 상황과 지금까지 자신이 신분상승이 되겠다고 이를 악물고 해왔던 것들이 너무도 유용하게 쓰일 시점에서 유채는 나름대로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우선은 급한 불부터 끄고, 그 후에 생각하자.

 

사랑하는지... 사랑 안하는지... 그러는 태준씨는... 날 사랑할까?

 

 

 

 

 

 

우리집 고양이가 아파요~

입원시키고 와서 다시 올릴께요~

 

늦어서 죄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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