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칙사랑 - 10. “31번의 사랑해”
당장 그와 헤어질 준비에 착수했다. 제일 두려웠던 것은 바로 미련이었다. 길을 가다 쇼윈도 안에 있는 감색 니트를 보며 ‘그에게 잘 어울리겠다‘ 생각하게 될까봐, 친구가 애인과 낚시를 하고 왔다고 하면 그를 생각하며 부러워하게 될까 걱정이었다. 헤어진 후에도 뒤돌면 있을 그의 긴 그림자가 두려웠던 것이다.
우선 그와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보기로 했다.
1. 함께 밤을 구워먹을 것
밤을 지우고 고구마로 바꾸어 썼다.
2. 함께 일몰을 볼 것
3. 함께 테니스를 칠 것
4. 함께 노래방에서 소리 지르며 놀 것
5. 함께 기차에서 삶은 달걀을 먹을 것
······.
10. 함께 아침을 먹을 것
함께 하고 싶은 것들이 이렇게 많은데 잊어야 하다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하지만 마음이 약해진 것은 아니었다.
첫 번째로 한 것은 기차에서 삶은 달걀을 먹는 것이었다. 금요일 밤 춘천으로 가는 열차 안은 형광등 불빛으로 가득했고 밖은 깜깜했다. 창밖으로는 풍경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나란히 앉아 있는 우리 얼굴만 보였다. 황색을 띤 달걀은 잘 벗겨졌다. 금세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응. 오빠 먹어봐.”
“소금 좀 만 더 찍어서 줘라. 기차 불편하지 않아? 나 운전해도 되는데 고집을 피우고.”
“낭만적이잖아. 기차에 삶은 달걀. 차타고 가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거니까.”
낭만적이라니? 낭만의 사전적 의미는 꽤 웃기다. ‘낭만 - 주정적(主情的) 또는 이상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일, 또는 그렇게 하여 파악된 세계.’ 한달 안에 헤어질 남자와 춘천을 향하는 것이 이상적인 것이란 말야? 이토록 잔인한 일이 있을까? 전보다도 독해진 내가 가여웠다. 속고 있는 그가 불쌍했다.
“오빠. 우리 둘이 아이를 낳으면 어떨까? 예쁜 아가가 나올까?”
“글쎄.”
말을 잇지 않는 그. 그는 나와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함께 있으면서 그를 잊으려 하지만 그의 얼굴을 자꾸만 보고 싶어졌다. 앙상한 내 손이 그의 얼굴을 만졌다. 그 감촉을 기억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술을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잘 먹는 것 같더니 완전히 취했잖아.”
완전히 취한 게 맞는지 세상이 핑핑 돌고 있었다. 하지만 나까지 돌고 싶지 않았다. 일자 걸음을 걷기 위해 보도의 선을 따라 걸었지만 걸음은 자꾸만 삐뚤어졌다.
“술을 마시면 왜 취하는 줄 알아, 오빠?”
“알콜이 뇌를 마비시켜서 그렇지.”
“틀렸어. 술을 마시니까 취하는 거라고! 당신이 알려줘 놓고도 못 맞추네.”
“내가 그랬었나?”
“그래서 당신이 싫어. 했던 말도 기억을 못해. 아무 생각을 하지 않고 말을 하나봐. 당신이 싫어, 정말! 마음을 백 프로 못주는 것도 싫어. 마음을 냉정하게 반을 잘라 반만 주잖아. 냉정한 인간!”
“홍주야, 진짜 오빠가 싫어?”
“싫지 않아도 싫어할 거야. 반만 주면서 나는 다 가지려 하고, 욕심도 많으셔. 속이 안 좋네. 부축 해줘. ······. 허리엔 손을 얹지 마. 속이 불편하단 말이야. ······. 당신! 당신 말이야, 처음에 나한테 오지 말았어야지. 나 아프잖아. 나만 아플 것 같아? 당신도 아프게 될 거야. 나 때문에 아프게 될 거라고. 한 대 때리고 싶다, 진짜.”
“때려, 맞아줄게. 그렇게 아픈 거라면 괜찮아.”
“안 때릴 거야. 대신 노래방 가. 노래를 부르고 싶어.”
촌스런 꽃무늬 벽지의 노래방에서 여러 색의 불빛이 돌고 있었다. 불빛이 돌고 세상이 돌아서 잘 맞아 들어가는 것 같았다. 내가 부른 노래는 이승철의 ‘비와 당신의 이야기’였다. 그에게 꼭 불러주고 싶었던 노래였다.
아이가 눈이 오길 바라듯이
비는 너를 그리워하네
비의 낭만 보다는 비의 따스함보다
그날의 애절한 너를 잊지 못함이기에
당신은 나를 기억해야 하네
항상 나를 슬프게 했지
나의 사랑스럽던 너의 눈가의 비들
그날의 애절한 너를 차마 볼 수 없었던 거야
무척이나 울었네
비의 비 맞으며 눈의 비 맞으며 빗속에 너를
희미하게 그리며 우리의 마지막 말을
너의 마지막 말을 기억하네
무척이나 울었네
비의 비 맞으며 눈의 비 맞으며 빗속에 너를
희미하게 그리며 우리의 마지막말을
너의 마지막 말을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벽을 찢을 듯한 목소리로 그를 사랑한다고 외쳤다. 그런 내 모습을 보는 그의 눈동자가 젖어보였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꼭 서른한 번이었다. 미친 듯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 마음이 빠져나갈까 했지만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서러움이 섞인 사랑일 뿐이었다.
나머지 26일 동안 단 한번도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외친 31번의 사랑은 헤어지기로 마음먹은 한달치를 먼저 뱉은 셈이 되었다. 한 번의 ‘사랑해’가 남지만 그건 평생 내 가슴에 묻기로 했다.
[다시는 당신 만나고 싶지 않아. 힘들게 하지 말아줘.]
그에게 문자를 보내고 나서 수도 없이 전화가 울렸지만 전화는 받지 않았다. 그 날은 배터리가 다 될 때까지 전화는 밤새 울렸다.
** 찬영 이야기 **
진이를 처음 본 곳은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캠퍼스에서였다. 작은 분홍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손에는 주렁주렁 짐을 가득 들고 있었다. 구부정한 자세였지만 표정만은 도도했으며 꼭 다문 입술은 단 한번도 열리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를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거절할 것이 뻔해 보여 그냥 지나쳤다. 그리고 잠시 후 무거운 짐을 어디다 버렸는지 홀가분한 상태로 나타난 그녀는 마치 당장 하늘을 날 것처럼 보였다. 다시 만나게 된 것을 기뻐하며 난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아까 짐이 많으시던데 다 버리고 오셨나 봐요.”
“······.”
“도와드릴까 망설이고 있었어요. 왠지 죄송한 생각이 드네요.”
“도와주지 그랬어요?”
“예? 다음에 도움이 필요하시면 연락 주세요.”
가방에서 연습장을 꺼내 연락처를 황급히 적었다. 그리고 종이를 찢는데 서두른 탓에 그만 연락처 가운데가 찢기고 말았다. 그녀는 배를 잡고 웃었고 난 얼굴이 빨개져서는 다시 연락처를 적었다.
“외울게요. 불러주세요.”
진이에게 연락이 온 것은 비가 오는 날이었다. 연락 올 것을 포기하고 있을 때라 처음엔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했다.
“짐 드는 것 좀 도와주실래요?”
그녀가 말한 장소로 가보니 짐은 보이지 않았다.
“짐을 가지러 가는 건가요?”
“아니요. 짐 여기 있잖아요.”
그녀가 내민 것은 보라색 작은 손가방이었다.
“하하. 어디로 옮겨드리면 되나요?”
“명동이요. 옮겨주면 맛있는 커피를 사드릴게요.”
커피를 마시면서 난 진이의 손을 잡았고, 그날로 사귀기로 했다.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큰아버지 댁에서 살게 된 나는 늘 정에 굶주려 있었던 터라 그녀에게 빠져버린 건 순간이었다. 집에서 불편한 것은 없었지만 서둘러 결혼이 하고 싶었다. 큰아버지는 작은 집을 마련해주실 예정이었고 걸림돌은 내 졸업뿐이었다.
그날은 몹시 추운 날이었다. 외투 안에 옷을 세 겹이나 입어 움직이기가 불편할 정도였다. 명동 거리를 할 일 없이 걷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그녀는 내 팔에 꼭 붙어있었다. 투명하고 찬 허공을 가르는 진이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네 겹의 옷을 입었어도 맨살이 서로 닿아 있는 듯 가깝게 느껴졌다.
“우리 결혼하자.” 라고 명동 거리 한복판에서 말했다.
“당연한 거잖아. 그럼 다른 여자랑 하려고 했어?”
“진지하게 대답해줘. 청혼이란 말이야.”
“그럼 멋지게 프로포즈 했어야지. 멋없이 결혼하자, 해놓고 감동하길 바란 거야?”
“난 청혼했다, 넌 결혼한다고 했고.”
“알았네요. 청혼이라는 거 받아보니 시시하네. 막 설레고 좋을 줄 알았는데.”
진이는 웃고 있었지만 조금은 서운한 듯 보였다. 우린 처음으로 갔던 커피숍에 들어갔다. 내가 미리 준비한 분홍색 풍선이 다른 것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 달려있었고 창문에는 ‘진이양! 내 색시 돼줘요!’ 란 유치한 플랜카드가 붙어있었다.
“어떤 놈도 진이란 여자를 사귀나봐.”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무릎을 꿇고 멋지게 프로포즈를 할 생각이었는데 쑥스러움에 심드렁하게 말을 뱉고 말았다. 진이는 감격한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사랑해! 결혼할래. 꼭 당신이랑 하고 싶어.”
그녀의 두 팔이 목에 감겨왔다. 종업원들은 박수를 쳐주었고 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된 듯 했다.
“나랑 결혼해줄래?”
“응. 할래. 결혼. 고마워요.”
눈물을 훔친 진이의 가는 손에 반지를 끼어 주었다. 피부와 어울리는 빨간색 보석이 박힌 반지였다. 반지를 한참 보던 진이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우리 정말 행복하게 살 것 같아.”
나는 그 말을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