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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wi (키위) - 13. 월미도의 비명소리

나비 |2004.12.10 09:03
조회 1,948 |추천 0

kiwi - 13 


병진이의 출현만으로도 긴장이 많이 되는 일이었는데 언니들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분위기가 긴장감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언니 나 왔어.”

“···.”

“묘향 언니, 나 왔다구.”

“어? 혜림이 왔니? 생각보다 일찍 왔네.”


셋째 언니는 자신의 결혼 계획을 골똘히 생각 중이었는지 사람이 옆에 가도 모를 정도였다. 이토록 무서운 집중력을 보인 적은 처음이라 놀라면서도 속으로는 언니를 놀리고 있었다.


‘무엇을 상상하든, 다 물거품이 되리라. 하하’


“손님이 없네.”

“아직 재오픈 한지 모르는 사람이 많잖아. 넌 어떻게 됐니?”

“인사 잘 드리고 왔어. 아버님 상태도 생각보다 위중하신 것 같지 않더라구.”

“그랬니? 시부모님은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고?”

“직접 하신 말씀은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모르지.”


서루의 어머니 이야기를 했다가는 언니가 먼저 들고 일어나 당장 때려치우라고 할 것이 뻔했다. 식구들에게도 다 고자질 할 것은 물론 가족들 모두 반대를 하게끔 여론 조성을 하겠지.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된다.


“어떤 남잔데?”

“어?”

“남자가 뭐하는 사람이냐구?”


어차피 밝혀질 일이지만 절대 서루 오빠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어떤 고문을 하더라도.


“나중에 말해줄게. 오늘은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야겠어. 엄마한테도 말씀드렸거든. 손님도 없으니 괜찮지?”

“야!”


날 부르는 언니를 뒤로하고 서둘러 찜질방을 나왔다. 찜질방에 더 오래 있다가는 왠지 좋지 않은 일이 터질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 입방정이 스스로 무서운 이유도 있었고, 무엇보다 언니들의 팽팽한 신경전의 희생양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다음날.


어제의 불안감은 결국 그간 어렵게 쌓은 틀린 그림 찾기의 내공을 엄청 까먹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제 막 중수가 되어 고수들과 겨루는 것도 큰 부담이었는데 도무지 그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틀린 곳을 5군데를 찾는 게임이었는데 4번째 찾는 데까지는 별 무리가 없었다. 마지막 한군데를 찾을 때 갑자기 박동수가 빨라지면서 눈앞이 자꾸 흐려지고 마우스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듯 했다. 그림은 정말 똑같이만 보였다. 저편의 상대는 어떻게 찾아냈는지 자꾸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고.


‘어디가 틀렸다는 거야?’


애써 마음을 다잡고 모니터를 노려보면 이쁜 병진이가 화면 가득 웃고 있었다. ‘그것도 눈깔이라고.’라고 비웃으며.

또 그녀의 모습을 잊을 만하면 오빠가 건너 주던 돈 봉투가 자꾸 눈앞에 아른 거렸다.


‘얼마였을까? 30만원? 아님 50만원?’


괜한 갈증에 커피를 홀짝 홀짝거렸더니 밤에는 잠도 잘 오지 않아 돈 봉투에 관한 궁금증은 더해져만 갔다.


‘사람 성의를 그런 식으로 무시하는 건 아니었는데. 돌려 달라고 해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자 편안하게 잠이 들 수가 있었다.


내가 어제는 너무 민감하게 반응했어, 이쯤에서 용서해 주어야지 하는데 서루오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 화난 거지?

“몰라.”

-네 오해야. 난 그저 고마워서.

“뭔 오해? 수고비라고 하는데 기분 안 나빠할 사람이 어디 있어?”

-내가 언제 수고비라고 했냐?

“했잖아. 수고 했다고.”

-그거야 수고했으니까 수고했다고 말한 것인데 왜 수고했냐고 물으시면 난 그냥 수고했다고 생각해서 수고했다고 말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히히. 어린 장금이야?”

-웃었네. 기분 풀린 거지? 나와라. 맛있는 거 사줄게.

“비싼 것두 사줄 거야?”

-뭐 먹고 싶은데?

“우럭.”

- 그럼 횟집 가면 되는 거지? 오케이. 알았어. 준비해. 금방 갈게.


우럭을 사준다는 말에 신이 나서는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너 또 나가는 거야?”


셋째 언니가 얼굴에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내게 물었다.


“어.”

“어디 가는데?”

“오빠가 우럭 사준다고 했어. 히히.”

“뭐, 우럭?”


하필 아이라이너를 그리고 있는데 ‘우럭’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 바람에 놀라 라인은 눈 밖을 한참 벗어나 버렸다.


“왜 소리를 질러? 우럭 처음 들어?”

“처음 데이트하는데 우럭이 뭐니? 그러다가 고추장이라도 흘리면 어떻게 하려고.”

“남 고추장 걱정은 붙들어 매고 언니 작업이나 잘 보셔.”

“나야 뭐 니가 고추장을 흘리기를 바라지만서도 좀 너무 하다.”

“왜? 뭐가 너무해?”

“분위기 좋은데 많잖아. 강남에만 가면 좋은 음식점들 얼마나 많은데.”

“그래?”


실수한 것은 아닌가 괜한 걱정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전화를 해야 하는 건가. 생각하는 사이 서루 오빠가 어제 그 차를 가지고 집 앞에 와 있었다.


“오늘 이쁜 옷 입었네.”


짧은 하늘색 패딩과 청바지 차림이었는데 오빠는 아주 이뻐 죽는다.


“맘에 들어?”

“아주 이뻐. 이제 가볼까?”

“어디 가는데?”

“회는 바다 보며 먹어야 제 맛이지. 동해는 좀 멀고. 인천 가자.”

“진짜?”


비록 인천이었지만 정말 오랜만에 보는 바다였고, 우럭까지 사준다니 마음까지 들떠 버렸다.

도착한 곳은 월미도. 들뜬 내 기분과 어울리는 곳이었다. 유원지다운 분위기. 멀리 보이는 해안선. 그리고 즐비한 횟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우럭들. 모두 마음에 들었다.


잠시 후.

셋째 언니가 즐거워 할 만큼의 고추장을 바지와 소매에 묻히면서 아주 즐겁게 식사를 했다. 오빠도 맛있게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눈을 감는 것이었다.


“왜 자꾸 먹으면서 눈을 감아?”

“맛을 음미하며 먹는 거지.”

“재미있겠다. 나도 해볼래.”

“응?”

“정말 바다 맛이 더 나는 것 같아. 깊은 바다 맛.”


눈을 감고 먹는 우럭 맛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다 먹은 후에는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을 배경삼아 사진도 찍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쿵짝거리는 음악소리와 포만감이 잘 어울어져 정말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오빠! 나중에 결혼해서도 자주 오면 좋겠어.”

“당연 그래야지. 주말에는 동해가서 회도 먹고 하루 자고 오고 그러자.”

“으흠.”

“...?”

“다 먹었으면 나갈까?”


하루를 자고 온다. 야한 생각에 서루 오빠의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서둘러 일어났다. 결혼을 하면 부모님 허락도 안받고 여행도 맘대로 다닐 수 있구나. 결혼이란 참 좋은 걸.


음식점에서 나오자 서루 오빠가 자연스레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도 오빠 쪽으로 몸을 기대면서 허리에 손을 감았다.


‘생각보다 살이 많네.’


허리에 살집이 있다는 것이 대단한 것도 아닌데 꼭 나를 지켜줄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든든해졌다.


‘남자의 허리는 잘록한 것보다야 굵직한 게 좋을 거야.’


남자의 허리. 남자의 허리. 남자의 허리라. 또 야한 생각과 겹쳐지면서 괜한 헛기침을 해댔다.


“잠깐만.”


허리에 감은 손의 떨림을 행여 들킬까 빼야하나 고민하던 중 오빠가 시기적절하게 내 손을 빼냈다.


“미안.”

“또 담배 피우게?”


오빠는 웃으며 한 아저씨에게 다가가 담뱃불을 빌려왔다.


“라이터를 하나 사지 그래? 계속 빌리기 귀찮을 것 같애.”

“진정한 흡연가는 밥을 굶으며 담배는 사도 라이터는 사지 않는 거야.”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며 폼을 잡는다. 마치 둘째 언니 같았다. 말 뒤에 설명이 나와야 할 것 같은데 입을 꾹 다물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뱉은 것에 스스로 만족하는 듯한 표정. 이럴 때는 그냥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줘야 한다.


천천히 걷다보니 어느새 놀이기구가 모여 있는 곳에 가게 되었다. 흔들리는 큰 팽이 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좋다고 웃고 있는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있었다.


“오빠, 우리도 저거 탈까?”

“아니. 별로.”

“왜? 무서워?”

“무섭기는.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모습 너한테 보이기 싫으니까 그렇지.”

“오빠두 폼생폼사야?”

“그럼. 남자라면 폼이지.”

“내 눈에는 무서워하는 걸루 밖에 안보여.”


오빠를 뒤로하고 낼름 표를 끊어왔다. 황당한 표정의 오빠. 이것도 다 추억이라구.


팽이가 서서히 돌기 시작했다. 오빠는 내게 웃어 보이더니 슬쩍 눈을 감았다.


‘별걸 다 음미한다.’


서서히 빨리 돌면서 통통 튀기 시작했다. 슬슬 재미있어 지려고 할 때였다. 오빠가 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에이, 나 괜찮은데.’


그러나 내 오해였다.


“혜림아, 아악!”


귀를 찢을 듯한 서루 오빠의 목소리가 유원지 곳곳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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