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의강-12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죽기보다 어려운 일 인지도 모른다.
죽어간다는 것.
어쩌면 그것은 삶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사람들의 애절함 때문에 서러운 것지도 모른다.
화장을 고쳤다.
더 이상 그남자를 위해 울지 않으리라고 마음을 먹은 혜영이었다.
많은 사연과 눈물을 섞어 지영에게 몇통의 편지를 보내고, 지영 또한 못다한사랑의 애절함을 섞어 혜영에게 답신을 보내왔었다.
한자 한자를 읽어갈때마다 눈앞을 가리던 수많은 눈물들...
터질듯한 숨막힘의 연속과 외로움 그리고 한 남자에 대한 그리움들...
그러나 혜영은 그대로 가슴에 묻어두려했다.
[난 할만큼 햇어...적어도 최선을 다했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고자 노력했다.
학원에 출근을 했다. 아무도 없는 빈 강의실의 문을 활짝 열어보았다. 그리곤 계단을 쓸어내려갔다.
평소 알고 지내던 출판사 사장의 도움을 받아, 거래처라던 한 학원에 취업을 하기로했던 그녀였다.
출판사 사장과 친구였던 까닭에 혜영에게 많은 도움을 요청했었다.
학원 운영은 처음 이라서 많은 도움이 필요할 거라며 또 힘들꺼라며 하지만 훗날 꼭 보답해 주겠노라며 일해줄것을 강요받아 왓었다.
학원강사 경력이 4년차 였던 그녀에겐 적당히 높은 보수가 책정이 된데다가, 한 남자에 대한 끝없는 애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함도 있었고 사실 수중에 돈도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학원생활이 벌써 1달이 되었는지
[이선생. 오늘 월급날이지?]
[벌써 그렇게 되었나요?]
[저녁에 끝나고 술한잔 할까?]
출근하면서 들어오는 원장이 인사인듯 미소지으며 이야기했다.
여 규 현.
출판사 사장과 가장 친하다는 어릴적 친구라는 사람.
처음 혜영이 학원에서 강의하기로 결정한데에는 여규현이 직접 찾아오기도 해서였다.
그런 정성이 혜영의 어쩔수없는 상황과 맞물려 그러마 하고 시작한 학원생활이 1달이 다된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이 사람을 의지하고 있는 그녀였다.
유치부 아이들은 이것 저것 손이 많이 따라야했고, 밤 늦은 시간까지 환경정리며, 여러 계획안 작성이며, 눈 코 뜰새 없이 바쁜 날의 연속이었다.
늦은 밤까지 일하는 날이 빈번해질수록 규현과 가까워지고 있었던 거였다.
어떤날은 환경미화를 하다가 훌쩍 12시를 넘기기도 했고, 그럴땐 원장사무실 쇼파에 기대어 그렇게 잠들고 일어나 수업하던 일도 더러 있었다.
그럴때마다 걱정과 위안으로 혜영을 지켜봐주던 규현이었기에 둘 사이는 조금씩 가까워 지고 있었다.
둘 사이가 가까워 질때마다 혜영의 가슴에 모질게 자리잡던 지영에대한 사랑과 미움이 하나씩 또 하나씩 덜어 지고 있었다.
[오늘 끝나고 거기로 와]
규현의 말에 혜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 자신도 시간이 되면 그곳에 나갈거라는 것을 알고 있던 터였기에 거부하지도 않았다.
외로웠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 남자를 잊기위함 때문이기도 했다.
혜영 스스로도 언제부턴가 지영의 과외방은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적막과 고요..죽음 만큼이나 싫어서 였다.
지금은 규현의 도움을 받아 다른 곳에서 살 수 있었기 때문에 굴속같은 그곳보다는 훨씬 아늑하기도 했다.
오후 8시.
이미 규현은 사라진지 오래다.
함께 근무하는 선생역시 일을 마치고 빠르게 나가버렸다.
거울을 바라다본다.
아무것도 변한것이 없는데...
화장을 고쳤다.
강의 하느라 번져버린 입술위로 립스틱을 가져갔다.
흡사 예술가의 그것처럼 덧칠을 했다. 맘에 들지 않았다.
파운데이션을 가볍게 눌렀다. 역시 맘에 들지 않았다.
약속된 시간.
언제나 규현과는 저녁 9시가 되어서 만났던 그녀였다.
강의실을 형광등을 하나씩 꺼 나갔다.
계단을 하나씩 밟을때마다. 무언지모를 서러움이 솓구쳐 오름을 느꼈다.
약속된 장소.
오늘도 이곳이다.
레스토랑 르네.
규현은 창가 앞에 앉아서 들어오는 그녀에게 가볍게 손짓을 했다.
[오늘도 편지왔어?]
[.....]
[참 대단하네, 답장은 보낸거야?]
[.....]
[이쯤해서 싫다는 편지를 보내]
그랬다.
이미 여러날 전부터 혜영은 지영의 편지만을 받아보고 있었다.
거의 매일 습관처럼 편지는 배달되었다.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서, 더러는 빈 강의실 앞 자리에 앉아서, 또 가끔은 집에 누워서,,
하지만 답장은 쓰지 않았다. 쓰고 싶지도 않았다. 그럴때마다 지영의 어머니 얼굴이. 진아의 얼굴이. 그 동굴속 같은 과외방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습관처럼 두 사람은 술을 들이켰다.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빈 잔이 테이블에 내려졌다.
5병의 맥주는 그세 동이났다.
[규현씨. 나 사랑하나요?]
규현은 말이 없었다.
몇일전부터 규현에게 쏟아졌던 질문이었다.
그때마다 규현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우린 왜 만나는거죠?]
혜영의 질문은 계속되고 있었다.
[우린 어떤 사이죠?]
[.....]
규현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맥주만 들이키고 있을 뿐이었다.
더 이상 혜영도 묻지 않았다.
바알갛게 달아오른 혜영의 얼굴이 규현의 눈에 가득차왔다.
[그만가자]
둘은 르네를 나왔다.
종합시장의 한복판이서인지 그리고 연말인 까닭에 북적이는 사람들로 발딛을 틈이 없었다.
[우리 저기 가서 춤이나 출까?]
나이트크럽을 바라보며 규현이 말했다.
[아니요.]
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제법 붐비는 거리를 빠져 나와서 인지 둘은 나란히 걷고있었다.
[어~~~]
혜영이 화들짝 놀랐다.
두 사람을 바라보며 세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영의 친구들이었다.
혜영은 고개를 돌려보려 했지만 이미 세 남자가 아는척을 해왔다.
[혜영씨.안녕하세요?]
[....]
친구중 하나가 인상을 찌뿌렸다.
나인철. 지영과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모르는 척이라도 해주려는 건지 인철이 두 친구를 이끌고 빠르게 걸었다.
혜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규현을 힐끗 바라보았을뿐...
혜영이 살고 있는 집에 다다랐다.
그리 넓지는 않은 방이었다.
습관적으로 둘은 신발을 벗어버렸다.
[커피 마실래요?]
코트를 벗으며 혜영이 규현을 향해 말을 건넸다.
[아니. 그냥 피곤한데 자리나 좀 해줘. 조금 누워있다가 가게.]
혜영은 더 권유하지 않았다. 대신 이미 그녀의 손은 장롱문을 열고 있었다.
두툼은 이불이 방 바닦에 깔렸다. 그 위로 긴 베게가, 덮어진 얇은 이불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이미 규현은 가벼운 옷차람이다.
그리고 이내 눈을 감아버렸다.
혜영은 거울앞에 다가섰다.
크린싱 크림으로 화장을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화장뒤에 감추어졌던 맨 얼굴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혜영은 한참동안 아무것도 하지않은체 물끄러미 거울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거울속으로 비친 두 남자의 모습.
한 사람은 지금 이 방에 누워있고, 다른 한 사람은 차가운 구치소 방안에 누워있고...
두 사람 모두 혜영앞에서서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듯했다.
혜영은 고개를 숙였다.
두 눈에 고여진 눈물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