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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wi (키위) - 15. 제대로된 태클

나비 |2004.12.12 18:37
조회 1,814 |추천 0

kiwi -  15 


서루 오빠는 몸이 나아지는 대로 상견례를 하자고 했고, 만날 수 없는 며칠 동안은 전화로 결혼 준비를 착실히 해나가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살 물건들을 훑어보거나 신혼 여행지로 적합한 여행지를 알아보기도 했다.

나름대로 진행이 잘 되는 가운데 평소처럼 찜질에 출근하는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일이 없는 시간은 병진이와 수다를 떨며 보냈는데 기집애와 생각보다 죽이 잘 맞았다. 그리고, 손님들을 보며 궁시렁대는 병진이를 보는 일도 꽤나 재미있는 일이어서 없는 시간까지 쪼개며 병진이와 붙어있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은 대학을 가더니 연락도 뜸하게 하는 바람에 수다를 떨만한 기회도 많은 않았던 내게는 반가운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으니 점점 병진화 되어가는 내 모습이었다.


“병진아! 현상 오빠 또 왔어.”

“또? 할 일이 없으면 어디 자빠져 있던가, 왜 맨날 온대?”

“내 말이. 할 일이 없으면 콩으로 메주나 쑬 일이지.”

“그 말은 무슨 뜻이야?”

“어?”


나도 모르는 말을 내게 물으니 곤란한 일이었다.


“글쎄. 그만큼 할 일이 없다는 뜻?”

“너 또 닭가슴 시리즈구나. 아무 뜻도 없는 말. 너 그럴 때면 정말 생각 없는 애 같아.”


졸지에 무뇌아가 되어버린 나는 현상오빠와 병진이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현상 오빠는 어떻게 알아?”

“나 교회 다닐 때 아는 오빤데. 우리 엄마랑 오빠네 엄마랑 잘 알아. 현상 오빠가 나 보면 엄마한테 애기할 것 같아서.”

“어떻게 하나. 앞으로도 자주 올 것 같은데.”

“왜?”

“사실 나 때문에 오는 거거든.”

“너? 너 볼게 뭐 있다고?”


나보다 이쁜 병진이의 말이니 할 말이 없었다.


“오빠랑 잠깐 만났었거든. 헤어졌는데 자꾸 문자 보내고. 찾아오고 그런다.”

“너 돈 빌렀냐?”

“아니야.”

“그런데 왜 찾아와?”

“날 사랑한대.”

“와하하. 웃기고 있네. 현상 오빠가?”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뭐가 웃긴다는 것일까?


“그나저나 현상오빠 자꾸 오면 나 곤란한데. 그냥 밖에서 만나줘. 그럼 안 올 거 아니야.”

“싫어. 결혼할 사람도 있는데 왜 만나니?”

“그럼 제대로 끝내던가? 맨날 오면 나 진짜 여기 못나온단 말이야.”

“널 위해서라도 제대로 끝내줄게. 근데 오늘은 귀찮아. 내일 또 오면 그 때 말할래.”

“그러던가. 오늘 일 끝나고 뭐해?”

“뭐 별루 할 일은 없는데.”

“그럼 이따 오빠랑 술 마실 건데 같이 갈래?”

“술?”

“둘이 놀면 심심하단 말이야. 같이 가자.”

“그럴까?”

“너 결혼하면 니 맘대로 놀지도 못하잖아. 결혼 전에 놀아야지. 시부모님 허락 받으면서 술 마실 일 있냐?”


결혼 전에 마음껏 놀아보자, 생각해보니 좋을 것도 같았다. 한눈만 안 팔면 되지 뭐.


“병진아! 퇴근 안 해? 퇴근 시간 지났는데.”


간만에 놀 건수가 생겨서 병진이보다 내가 더 퇴근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이렇게 됐네. 나가자.”


병진이와 팔짱을 끼고 찜질방을 나섰다. 병진이는 청바지에 점퍼를 입고 목도리에 얼굴에 둘둘 말았다. 이쁜 애가 그런 차림을 하는 것이 너무 마음에 아팠다. 진주를 흙에 묻는구나.


오빠가 기다리고 있다는 술집은 초가집처럼 인테리어의 막걸리와 파전, 찌개류를 파는 주점이었다. 평일이고, 아직 술을 마시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사람들은 많지 않아서 병진이의 남자친구를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어, 민성 오빠랑 같이 있네.”


아마도 병진이 애인의 남자 친구인 모양이었다.


“오빠!”


남자 일행은 우리를 본 모양인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민성이라는 남자는 병진이가 반가운 건지 아님 친구인 내가 와서 예의상 그런 건지 자리에서 일어나다 테이블 위에 달려있던 전등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와하하하. 민성 오빠, 또 시작이야!”


테이블에 다가가는 동안 민성이라는 사람은 정말 머리가 아픈지 고개도 들지 못하고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좀 심하다 할 만큼 세게 부딪히긴 했으니까.


“안녕하세요. 병진이 친구에요.”

“네. 반가워요.”


병진이의 남자 친구가 될만한 자격은 있어보였다. 끼리끼리라고 생긴 것들은 서로 알고 잘도 만난다. 꽤 착실해 보이는 스타일이었다. 백화점에 다닌다고 했으니까 단정한 스타일로 다닐 수밖에 없는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믿음직해 보였다.


“앉으세요.”

“아, 예.”


‘그런데 앉을 자리가······? 어디에 앉으라는 거야?’


남자 둘은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한명이 일어서 자리를 비켜주겠지 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병진이가 날름 자신의 남자 친구 옆에 앉아버린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아직도 머리를 싸쥐고 있는 남자 옆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오빠, 술 많이 마셨어?”

“응. 죄송해요. 저희가 오시기 전에 술을 일찍부터 마셨어요.”

“아, 예.”


병진의 남자 친구는 술을 마신 듯 했지만 상태는 멀쩡해 보였다.


“민성아, 괜찮아?”


그제야 민성이라는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오, 노!’


민성 오빠는 일찍이 내 마음에 상처만 남겨준 안정환 아저씨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천년을 찾아 헤맨 내 이상형. 죽기 전에는 못 만날 줄 알았는데 왜 이제 나타난 거니?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음악 실기 시험 시간에 내 순서를 기다렸을 때 느껴졌던 떨림, 그 이상이었다. 내 심장의 박동을 스스로 느낄 정도로 심장은 뛰고 있었고, 손도 가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첫눈에 반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니, 정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요한 암흑 속에서 오직 빛을 내는 이 남자만 있는 세상에 옮겨진 듯 했다. 감히 운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이 남자와 운명으로 맺어진 사이는 아니었을까?

긴 콧날, 흐트러진 머리카락, 너무 남성스럽지 않은 턱선, 움직이는 목젖, 도도해 보이는 눈동자. 그의 생김새 하나하나를 머리에 새기고 있었다. 마치 뒤돌아보면 금방 잊기라도 할까 무서워 눈을 뗄 수도 없었다.


“귀엽다.”


고개를 들어 날 처음 본 민성 오빠의 첫마디였다. 말을 뱉은 입술에서 술 냄새를 풀풀 풍기는 것이 술을 많이 마신 모양이었다.


“민성 오빠 아까 머리 부딪칠 때 머리 망가졌나봐.”


병진이의 말에 다시 세상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죄송해요. 저희가 술을 좀 마셨어요.”


남자 친구 아니랄까봐 병진이의 말을 은근슬쩍 도왔다.


“야, 진민성! 정신 좀 차려. 병진이 왔잖아. 병진이 친구 분이래.”

“안녕하세요? 혜림이에요.”

“진민성입니다.”


술에 취해 혀가 굴러가는 발음이었다.

진민성. 진민성. 오빠의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왠지 원래 알고 있었던 이름처럼 낯익은 이름이었다. 입안에 굴러가는 느낌도 아주 좋은 이름이었다.


남자를 보고 마음이 두근거린 적이 있었던가? 아직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 같은 버스를 탄 남학생을 한 번 본 것을 빼고는 없었다. 스무 살 때부터 내 인생의 모든 남자는 결혼 상대자였을 뿐이었다. 현상 오빠도, 서루 오빠도.

이 남자를 처음 보기 전 난 현상 오빠를 좋아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루 오빠를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틀렸던 것 같다. 진짜 이 남자는 좋아질 것만 같았다.


“술 마셔야죠. 건배합시다.”


민성오빠가 주는 술을 받았다. 술을 받는 내 손이 떨리고 있었다.


“병진아, 나 오늘 소개팅 시켜주는 거야?”


민성오빠가 말했다. 날 자신의 파트너라고 생각하고 뱉은 말이겠지? 느낌이 좋았다.


“아니. 혜림이가 맘에 드나봐. 꿈 깨셔. 얘 좀 있으면 결혼해. 오빠가 한 발 늦었다.”


결혼을 앞 둔 나에게 이상형의 남자를 만나게 해주더니, 이제 와서 결혼을 할 거라고 말을 해? 병진이는 내 인생의 태클녀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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