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칙사랑 - 18. 귀민
월요일, 출근하는 나는 아버지 차안에서 크게 기지개를 폈다. 일요일은 늦게까지 잠을 자고 점심을 먹고 누웠다가 일어나서 저녁을 먹고 또 일찍 잠에 들었다. 기지개는 지나친 잠으로 얻어진 찌뿌둥함을 몰아내는 행동이었다.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신발을 벗으면 더 편할 것 같았지만 아버지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참았다.
“피곤하냐?”
“아니요.”
몸을 일으켜 허리를 바로 폈다.
“일주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월요일이야. 월요일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일주일 내내 지치게 되지. 기운이 나지 않더라도 에너지가 넘친다고 생각해라. 생각이 태도를 만드니까.”
“컨디션 좋아요.”
“넌 정말 회사를 물려받을 생각이 있는 거니?”
“예. 일해 보니 적성에도 맞아요. 보람도 있고요.”
“이 일은 보람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알고 있어요.”
“홍미 다음 주에 나온다더라.”
“언니가요?”
아버지의 표정이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당신은 딸들에게 애교보다 당당함을 바라신 분이셨다. 나의 딱딱한 태도는 다분히 아버지의 바람 때문이기도 했다. 그 점에서 언니는 항상 나보다 우위에 있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가 안 나올 것 같은 여자가 있다면 바로 언니일 거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언니의 그런 점을 대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난 그냥 그런 둘째딸이었을 뿐이다. 두 부녀의 관계는 보통 사람들과 달리 철저한 믿음이 존재했다. 그런 언니가 갑자기 유학길을 선택했을 때 아버지는 적잖이 실망하셨다. 언니가 당신의 일을 잇기 바라고 계셨기 때문이다.
“학기가 다 끝나지 않았을 텐데요.”
“공부는 더 하지 않겠다고 했어. 다음주에 나오면 바로 회사로 출근한다고 했다. 넌 회사를 일년 이상 다녔지. 언니는 이제 시작이고. 언니라고 더 잘 봐줄 생각은 없다.”
그 말은 회사를 물려받을 사람을 경쟁을 통해서 고르겠다는 말이었다. 늘 언니와는 이런 경쟁을 해야 했다. 우리가 침대를 갖고 싶다고 하면 침대를 하나 사주시고는 등수가 더 많이 오른 사람이 갖게 될 거라고 했었다. 결국 내 차지가 되었지만 그 날 이불 속에서 울던 언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난 더는 그런 경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번번이 너무나 탐나는 상품이 걸려있었고 어린 마음에 갖기 위해서 치사한 싸움을 벌어야만 했었다. 이젠 끝났다고 생각한 싸움이 아주 큰 상품을 두고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잠 많이 잤어?”
“응. 아주 늘어지게 잤어. 머리가 아직도 무겁다니까.”
함께 점심을 먹으러 나온 그가 물었다. 그는 낙지전골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머리가 무거울 때는 정신이 번쩍 날 만큼 매운 음식이 좋을 거라며 권한 메뉴였다.
“진짜 자극적이다. 너무 매워.”
“홍주야, 매우면 물 마셔.”
“물 마시면 많이 못 먹잖아.”
“맵다면서 잘 먹네. 나보다도 빨리 먹었잖아.”
“오늘 많이 먹어야 돼. 이따가 귀민씨랑 술 먹기로 했거든.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네가 술로 질리는 없을 걸.”
“그렇겠지?”
“너무 매운 것만 먹지 말고 이것도 먹어.”
그는 밥그릇에 감자전을 얹어주었다.
“귀민씨랑 사이 안 좋은 거 나 때문이니?”
“꼭 아니라고는 못하겠지. 그런데 다른 이유들도 있는 것 같아. 괜히 싫은 사람들도 있잖아. 귀민씨한테 내가 그런 존재인지도 모르지. 암튼 나도 비호감이야. 가능하면 오늘 술 마시면서 풀면 좋겠지만 안 풀려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다 내 잘못이지.”
“맞아! 그러게 왜 아무한테나 친절하게 굴어? 이번 한 번만 봐주는 거야! 다른 여자 눈 돌렸다가는 그땐 이판사판이야!”
“갈수록 나 네 기에 눌리는 것 같다.”
“여자한테 져야 집안이 편안하다잖아. 그냥 지고 살아.”
“알았어, 알았어. 물 더 줄까?”
그는 반쯤 비워진 컵에 물을 따라 주었다. 그가 내게 져주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지는 것이 이긴다는 말도 있건만 아직 내게는 이해조차 힘든 일이다.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4시, 귀민씨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오늘 술 마시기로 한 날 맞죠?”
“예. 이따 저녁에 봐요. 6시 반. 괜찮죠?”
“저녁이요? 분명히 그것도 업무인데 왜 저녁에 만나야 하죠? 지금부터 마셔요. 그래도 업무시간이 연장될 거라고요.”
“낮술을 마시자는 거예요, 지금?”
“업무잖아요, 업무! 낮술을 마시자는 게 아니라. 저도 대리님과 단둘이 술 마시고 싶지 않거든요.”
그래도 술 마시기엔 이른 시간 같았다. 대학교 입학 초기 몇 번을 빼고는 낮술을 마신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업무의 하나이긴 했으니 끝까지 반대하긴 어렵다는 판단이 섰다.
“좋아요. 어디로 갈까요?”
“가다뇨? 회사 안에서 마셔요. 휴게실 어때요?”
‘휴게실이라. 정말 일이 아니고서는 나랑 술 마시기 싫다는 거군.’
“네. 알겠어요.”
휴게실에 이른 술상이 차려졌다. 비교적 도수가 낮은 복분자술을 찬영씨가 만든 세모 병에 담았고 안주로는 간단히 탕수육을 배달시켰다. 사람들은 구경거리가 났다는 듯 휴게실을 힐끔거렸고 우리는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귀민씨, 건배하죠. 그래도 첫 잔인데.”
“예.”
두 개의 잔이 부딪칠 때 귀민의 눈이 빛나는 것을 보았다. 아니, 쏘아보고 있었다는 말이 더 적절한 것 같다. 산딸기로 만든 복분자술의 독특한 향이 입에 퍼졌다. 잔을 내려놓고 우리는 한참 말이 없었다. 할 말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모두 왜 내게 적대적이었는지 하는 것뿐이었다. 그녀와 공유할 만한 이야깃거리를 찾으려 애썼지만 첫 마디를 풀기가 어려웠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술잔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그녀는 공연히 젓가락을 들었다 내려놓았다.
“귀민씨는 고향이 어디에요?”
“충남 대천이요.”
“대천이구나.”
그리곤 또 침묵.
“대리님은요?”
“저는 서울이에요.”
휴게실은 조용했지만 두 여자의 머릿속만은 분주했다. 생각지 못한 침묵에 당황한 여자들은 술을 한 잔 더 마셨다.
“술 따르기는 좋지 않네요. 손에 잡히는 부분 밑에 술이 몰려 있어서 무게 중심이 밑에 있게 되죠. 술이 쏟아질 것 같아 불안해요.” 그녀가 말했다.
“그러네요. 시중에 나온 것들에 비하면요.”
“동의하실 줄도 아네요.”
“그래도 병은 예쁘지 않나요?”
“우린 단점을 발견하기 위해 술을 먹고 있어요.”
“장단점을 함께 느끼는 것도 좋겠죠.”
역시 어긋나고 있다는 기분이다.
“대리님, 일단 술에 취하는 게 좋겠어요. 취중에 해야 하는 테스트잖아요.”
“그러죠, 그럼.”
우린 서너 잔을 연거푸 마셨다. 40도에 이르는 다른 술에 비해 18도의 술은 도수가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무시할 도수는 아니었다. 손을 꼭 쥐었다가 폈다. 감각이 무뎌진 것이 알콜이 어느새 뇌를 마비시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대리님은 취미가 뭐예요?”
“취미요? 그다지 취미랄 건 없는데요.”
그녀의 입에서 사생활에 가까운 질문을 받자 어색해졌다. 어쩌면 이 문제는 전적으로 그녀의 탓이 아닌지도 모른다. 나도 마음이 닫혀서는 사적인 질문 하나에 당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없을 것 같더라.”
“없다는 걸 확인하는 질문이었나요?”
“그런 셈이죠.”
“귀민씨는요? 귀민씨 취미는 뭐죠?”
“옷 만들기요. 주말에는 옷을 만들죠. 지금 입고 있는 이 블라우스도 제가 만든 거예요.”
“솜씨가 대단한데요. 전문적으로 배운 거예요?”
“그렇진 않아요.”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그렇게 만들 수 있는지 너무 신기해요.”
“대리님은 검은 색이 어울리지 않아요.”
“예?”
“전체적으로 선이 굵은 편이지만 짙은 색보다는 파스텔 톤이 잘 어울려요. 요즘 베이지색을 많이 입던데 그 보다는 좀 더 노란 미색이나 살구색 옅은 하늘색이 잘 어울릴 거예요.”
“아, 그래요? 고마워요.”
옷 이야기를 시작으로 우린 본격적으로 여자들의 수다를 시작했다. 품질은 좋지만 가격은 저렴한 옷을 살 수 있는 곳부터 화장품, 좋아하는 가방 브랜드까지 서로 어울릴 만한 것들을 추천하고 가끔은 서로의 센스를 칭찬하기도 했다. 술은 정말 마력을 갖고 있다. 식사를 했냐는 말을 꺼내기도 어려웠던 우리가 잡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찬영씨가 잘해줘요?”
“예. 자상한 사람이에요.”
“그럴 것 같더라.”
그럴 것 같더라, 는 그녀의 말버릇인 듯 했다. 그 말은 자신에게 불리한 대답이 나오더라도 자기위안을 삼을 수 있는 구실처럼 들렸다.
“미안하지만 그 일로 사과하고 싶진 않아요.”
“맞아요. 사과할 일 아니죠. 내가 잠시 미쳤었나 봐요. 찬영씨한테 눈 먼 건 아니었는데······.” 잠시 침묵한 그녀는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마주하고 보니 참 평범하네요, 당신이란 여자.”
“평범한 여자들보다는 좀 성깔 있죠.”
“나보다 많이 가졌다고 생각했어요. 옷 입는 것도 촌스런 여자가 아버지 잘 만나 호강하는 구나했죠. 일도 실수투성이고. 거기다가 내가 좋아하는 남자의 사랑을 받고. 난 등록금이 없어서 휴학을 했죠. 덕분에 당신보다 일년 늦게 회사에 들어왔죠. 당신이라는 말 기분 나쁘지 않죠?”
“그럼요. 근데 촌스럽다는 말은 기분 나빠요.”
“사실이잖아요, 그건. 하하하.”
그녀의 웃음소리가 경쾌하게 휴게실을 메웠다.
“우리 나갈래요? 그 곳보다는 분위기 더 좋은 곳을 알고 있는데. 술값은 대리님이 내요. 난 생활하는 것만으로도 빠듯해요.”
“그래요, 가요.”
우리는 적어도 하나의 공통점은 있었다. 동갑이라는 것. 여덟 살 때 88 서울 올림픽이 열렸으며 새로운 세기가 열렸을 때 함께 스무 살이 되었다는 것. 같은 연합고사를 보고 같은 문제로 수능을 치뤘다는 것. 찾아보면 수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얘기를 하다보니 내가 밥을 먹었던 대학로 분식집에서 그녀도 밥을 먹었었고 같은 날 같은 콘서트를 보기도 했다. 그리고 동시에 한 남자를 사랑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내가 막판에 찬영씨에게 가졌던 감정은 호감이나 그런 건 아니었어요. 당신에게 지기 싫어서였을까, 그런 승부욕 때문에 미련을 가졌던 것 같아요.”
“귀민! 너 말 놓기로 했잖아. 왜 자꾸 존대하고 그러니? 벌로 술 마셔.”
“너 진짜 술 잘 먹는다.”
“촌스러우니까 술이라도 잘 마셔야지. 가진 건 체력과 과도한 주량뿐이야.”
“촌스럽다는 말 취소! 계속 꼬투리 잡을 거야?”
“내가 좀 촌스러워서 그래. 촌스러우니까 별 수 없잖아.”
“참 나, 성격 한 번 이상해요.”
서로가 싫어했던 우리가 갑자기 친구처럼 지내게 된 것은 사실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세상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은 차고 넘치지 않는가? 아직도 인류가 진짜 달에 방문했는지의 논의도 정리되어 있지 않은 세상. 어제 물고 뜯었던 우리가 함께 술잔을 기운다고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닌 것 같다. 함께 술을 마시다 보니 그냥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뿐이다.
“전화 왔니? 받아!”
“괜찮아. 나중에 걸지, 뭐.”
“찬영씨 전화야?”
“어? 응.”
“괜찮아. 받아. 오늘 데이트 있었던 거 아냐? 이리로 오라고 해. 같이 술이나 먹게.”
“그래도 돼?”
“그래도 되긴. 친구 남자랑 술 마시는 게 이상한가?”
찬영씨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오겠다고 했다. 셋의 술자리는 어색함이 돌기도 했지만 어제보다는 덜 서먹했다. 아직 우리가 넘어야 것들은 분명 존재했다. 나는 나대로 그는 그대로 귀민은 귀민대로 털어야 할 감정들은 남아있었다. 하지만 술은 그 정리를 도울 것이고 앞으로는 오늘보다는 덜 어색한 우리가 될 것이었다.
그와 홍천에 내려가기로 한 일요일 전날, 친구의 결혼식이 있었다. 연미와 준지 모두 아는 친구, 정연이의 결혼식이었는데 연미는 촬영으로 오지 못한다고 했고 나는 준지와 함께 예식장으로 향했다.
“정연이 신랑이 의사라면서? 너무 부럽다.”
“그 신랑 얼굴 봤어?”
“아니, 못 봤는데.”
“못 보고 그냥 의사라고 부러워하는 거야?”
“너 의사에 이상한 선입견 있니? 의사는 꼭 나쁜 사람 이렇게 생각하는 거야? 다른 조건들이야 정연이가 다 봤을 거구 직업이 의사라니까 부러운 거지.”
역시 줄자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준지다웠다.
“난 정연이보다는 네가 먼저 결혼 할 줄 알았는데.”
“나? 결혼할 사람이 있어야 하지.”
“너 현성씨랑 사귀잖아. 무슨 문제 있어?”
“그 사람이랑 결혼 안할 거야. 이번 달 내로 헤어져야지.”
“헤어져? 왜?”
“난 인어 왕자는 취미 없거든.”
“인어왕자?”
- 다음편 계속 -
귀민이 방해자로 나설 거라고 예상 했던 분들 왠지 죄송한 걸요.
하지만 홍주를 방해할 장애는 곧 나타난답니다. ㅎㅎㅎ
월요일에 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