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칙사랑 - 21. 웬수 같은 군바리
“홍주야!”
그를 쉽게 발견하지 못한 날 부르는 소리. 파릇하게 잘라진 군인의 모습과 비교해서 꽤 톤이 낮은, 안정감을 주는 목소리였다.
“머리가 짧다, 너.”
“아닌데. 휴가 나오려고 기른 건데.”
“그게 기른 거라구?”
“군인이잖아. 나 이제 곧 병장 돼!”
내 눈엔 이병과 병장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녹색 폴로티만 눈에 더 띌 뿐이었다.
“군인인데도 녹색을 입고 싶니? 독하구나.”
“하하. 집에 옷이 이거밖에 없더라구. 노란색을 입으려니까 얼굴이 너무 타서 안 어울리더라.”
햇빛을 골고루 받은 것처럼 잘 그을린 얼굴. 씩씩하게 보여야 할 그 얼굴엔 쓸쓸함이 감돌고 있었다. 그는 영화를 보여준다고 했지만 시내까지 가는 것이 그리 내키지 않았던 나는 근처 페밀리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자고 했다. 런치 세트를 시켜 가볍게 먹은 후엔 후식으로 커피를 마셨다.
“왜 헤어진 거야?”
“군인들 80%는 아마 똑같을 걸. 90%라고 해야 하나.”
“여자가 고무신 거꾸로 신었다는 거야? 너희 만난지도 오래됐잖아.”
“6년 됐지. 고등학교 때부터 만났으니까.”
6년만큼의 세월이라는 게 와 닿지 않았다. 그만큼의 추억은 얼마나 무거울까? 그걸 생각하면 동욱이의 얼굴은 어두운 편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너 괜찮아?”
“괜찮을 리가 있냐? 괜찮은 척 하는 거지. 오늘 술 먹고 싶은데 마실 수 있어?”
“나 술 잘 마신다. 너 긴장해야 할 걸. 사람들 섣불리 나한테 술 먹자는 말 안하는데 너 오늘 잘 못 걸린 거야.”
“그럼 죽을 만큼 먹을 수 있는 거야? 오케!”
신나하는 그를 따라 레스토랑을 나섰다. 녹색 옷으로 가려진 그을린 어깨는 축 처져보여서 한 대 쳐주고 싶었다. 기운을 불어 넣어주는 기분으로 손에 힘을 모아 어깨를 툭 건들었다. 돌아본 그는 고맙다는 듯 웃고 있었다. 독특한 낙서가 눈에 띄는 탁자에 치킨 샐러드와 500cc 맥주 두 잔이 놓여졌다. 동욱이는 술보다 담배가 급했는지 하얀 플라스틱 재떨이에 재를 털었고 하얀 젖은 휴지에 떨어진 재는 아주 작지만 칙, 하는 소리를 내며 뭉개졌다.
“나 이제 곧 병장이야. 그래도 제대까지는 8개월이나 남았지.”
“그거 밖에 안 남았어? 너 군대 가고는 처음 만난 것 같은데.”
“그렇지. 저번에 내가 만나자고 했을 때 네가 바쁘다고 했잖아.”
“내가 그랬었나.”
“8개월 너한텐 길겠지?”
“·······?”
나한테는 8개월이란 시간이 별 의미 없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의 길고 짧음에 대해 물으면 난 할 말이 없다. 그 때쯤이면 오빠랑 결혼을 한 후 일까 아님 결혼을 앞두고 있을까, 하는 상상을 하고 있는데 동욱이가 담배를 하나 더 물었다.
“담배를 왜 그렇게 많이 펴?”
“나 걱정해주는 거야?”
“그럼. 걱정되지. 너 좀 말라보여. 매일 술 먹고 이렇게 담배도 많이 피는 거야?”
“걱정해주니 기분 좋은 걸. 안 필게, 그럼.”
동욱이의 행동은 뜬금없어 보였다. 8개월이랬다가 갑자기 자길 걱정해서 좋다는 둥. 하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오랜 시간을 만난 여자한테 채였으니 제 정신이 아닐 만 할 테지.
“홍주, 참 예뻐.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너 초등학교 때도 굉장히 예뻤던 거 알아?”
“군바리들이 치마만 두르면 다 여자로 보인다더니 그래서 예뻐 보이는 거지?”
“예전부터 예뻤다니까.”
“이러지 마라. 나 임자 있는 몸이다.”
“너, 남자 친구 있어?”
“있지. 아주 멋진 사람이야. 나는 남자친구도 없는 줄 알았니?”
“네 성격 보면 사귀기 쉽지 않을 것 같았는데.”
동욱은 갈증이 난다는 듯 벌컥벌컥 단숨에 술을 비워 버렸다. 그리고 또 한잔을 시켰다. 이런 기분은 뭐지? 싫지는 않지만 미안하기도 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을 해줬으면 하면서도 거절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거. 그러면서도 섣불리 거절을 하기도 힘든. 나도 동욱을 따라 술을 마셨다.
“맥주 말고 다른 거 먹지? 너 시킨 거 같이 먹고 소주 마시자.”
“그럴까?”
어색한 가운데 술을 나눠 먹을 때까지 누구 하나 말이 없었다. 동욱이가 입을 연건 종업원에게 소주와 메뉴판을 달라고 했을 때였다. 침묵은 더더욱 어색함을 만들었다.
“군대 생활은 괜찮아?”
“응. 군대 얘기는 재미없어. 네 얘기 해.”
조금은 풀린 눈으로 말하는 그. 하지만 시선은 정확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내 얘기 할 게 뭐 있나? 그냥 회사 다니고 데이트 하고 그러지.”
“그리고?”
“그리고, 라니?”
“그리고 뭐하냐고. 남는 시간 있을 거 아냐. 집에 돌아와선 뭘 해?”
“씻고 텔레비전보고 책 좀 보다가 자는 거지.”
“홍주 잘 때는 뭘 입고 자?”
이게 점점. 질문의 도가 지나쳤다는 생각이 든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말해봐. 뭘 입고 자?”
“군바리들은 다 이러니! 여자 동창 불러서 잘 때 뭐 입는 지 물어보는 거야? 갈수록 가관이네. 너 지금 말하는 거 하나도 재미없어, 알아?”
“성격은 여전하구나. 안할게. 안할 테니까 화내지 마라, 응?”
“진짜 하지 마. 아, 승질 나려고 하네.”
소주는 오늘따라 단 맛이 났다. 몇 잔을 들이키자 특별히 우울한 일도 없는데 최신 유행하는 슬픈 곡조의 노래에 감정이 실렸다. 찬영씨 때문에 힘들었던 시간들이 생각나면서 조금 울적해지기도 했고, 그 사람 안에 그녀가 얼마나 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오빠, 오빠 마음속엔 내가 얼마나 있어? 그 여자는 얼마나 있구? 잊을 수는 있는 거야? 만약 그 여자랑 나 둘 다 오빠 앞에 있으면 나 버릴 거야?’
친구를 위로한답시고 시작한 술자리는 스스로 위로하는 자리가 되었다. 기분은 점점 더 처지고 있었다.
“너 술 너무 마신다. 괜찮아?” 동욱이가 물었다.
“난 아직 멀었어. 넌 벌써 취한 거야?”
“그럴 리가 있나. 얼마나 마시고 싶던 술인데. 우리 완샷할까?”
짠-. 술잔이 부딪치고 투명한 액체가 몸을 따라 흘렀다. 정신의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동욱이는 내 기분을 알았는지 군대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와 유행하는 유행어가 섞인 농담을 해댔고, 그 덕에 많이 유쾌해졌다. 그렇게 즐겁게 술을 마신 우리는 아주 푹 술에 절여져 있었다.
“동욱! 집에 가야지.”
“응.”
거의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우리는 같이 택시를 탔다. 동욱이는 몸이 힘들었는지 의자에 몸을 기댄 채였다.
‘자식, 생긴 건 멀쩡해요. 그래도 기특하네. 한 여자를 6년씩이나 만나고.’
“홍주야, 나 너랑 한 게······.”
“뭐라고? 안 들려.”
“너랑 한 게 내 첫 키스였다고. 여자 친구 그 전부터 있었지만 첫 키스를 한 건 너였어.”
“그러냐? 나도 첫 키스였는데.”
심드렁함으로 그의 말을 받았지만 의외의 말에 놀라고 있었다. 왜 여자 친구를 두고 나한테? 내가 실험용이었나? 내가 쉬워보였나? 갑작스레 머리가 복잡해졌다.
택시에서 내린 우리는 길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동욱이는 꼭 집 앞까지 데려다 준다고 했고, 난 괜찮다며 마다했던 것이다. 결국은 그의 고집에 지고 말았다. 동욱이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내 뒤를 쫓아왔다. 완전히 취한 그와는 대화가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다 왔다. 너 괜찮겠냐?”
“나야 괜찮지. 대한민국 육군을 어떻게 보는 거야!”
“소리 지르지 마. 집 앞이란 말이야.”
“홍주야, 우리 친구 맞지?”
“응. 친구지, 우리.”
동욱이의 친구를 강조한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아무리 맞다고 해도 거듭거듭 묻는 것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동욱이가 집 앞에 주저앉았다. 흔들어 보았지만 일어나진 않았다.
“동욱아! 일어나봐. 엄마 나올지도 모른단 말야.”
“응. 응.”
그는 대답은 했지만 몸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다른 여자들에 비해 힘이 좋은 나이지만 술에 취한 동욱이를 업기는커녕 일어나게 하는 것도 힘들 것 같았다. 시간은 벌써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술집에서 나온 시간이 10시. 30분 넘게 집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참에 찬영씨에게 전화가 왔다.
“응. 오빠!”
- 어디야?
“어디긴. 집이지.”
- 그래? 나 여기 너희 집 앞이야. 나올래?
“서울 온 거야?”
- 출장이 길어질 것 같아서 옷 좀 가지러 왔어. 잠깐 네 얼굴 보려고 너희 집에 가는 중이야. 잠깐 나올 수 있어? 집 앞에서 기다릴게.
“응? 안돼. 오지 마. 나 못 나갈 것 같아.”
- 바로 집 앞 다 왔는데 잠깐 나오면 안돼?
“아니, 오지 마.”
그 때였다. 동욱이가 내 바지를 붙잡고 늘어지며 오바이트를 시작한 것은. 적나라한 소리는 아마도 전화기에 다 들어갔을 것이다.
“홍주야! 어, 욱-.”
- 무슨 소리야?
“아니야. 오빠. 내가 이따가 전화할 게.”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동욱이를 업어서 어디다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내가 하고 있는 건 등을 두드려 주는 일이었다.
‘이 웬수! 결국 사고 치네. 군바리랑 놀아주는 게 아니었어!’
“이제 시원해?”
“응. 미안하다. 어떻게 하니? 너희 집 앞인데.”
“몰라. 괜찮으면 얼른 가.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할 거니까.”
“미안하다 정말. 가야지. ······. 으음. 욱-!”
눈물을 머금고 동욱이의 등을 다시 두드려 주고 있을 때였다. 어두웠던 집 앞을 헤드라이터 불빛이 환하게 비춰주었다. 틀림없었다. 찬영씨가 집 앞에 도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