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적의 솔로부대다"
인터넷 달구는 만화전공 학생의 한컷 만화 시리즈
#1. 다정히 손을 맞잡은 연인들이 대형 수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돌아온다. 무거운 장바구니 들기는 당연히 남자의 몫. 그런데 저 멀리서 양손에 장바구니를 각각 세 개씩, 그것도 모자라 커다란 대걸레까지 든 시커먼 여인이 달려온다. 촌스러운 바가지 머리에 무표정한 얼굴, 덮수룩하게 자란 앞머리때문에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졌다. 울퉁불퉁 근육이 솟은 양 팔과 떡 벌어진 어깨에 각을 잡고, 탱크처럼 ‘우두두두’ 커플들 사이를 헤쳐나가는 그녀의 이름은 ‘솔로’.
#2.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테이블들은 나란히 앉아 사랑을 속삭이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 짓는 쌍쌍들로 가득 찼다. 케익과 포도주 잔을 앞에 놓은 채 광대용 고깔모자를 쓰고 연인으로부터 축하를 받는 행복한 여성도 눈에 띈다. 그런데 인적 드문 구석자리에 초코파이에 초 하나를 꽂은 채 앉아있는 시커먼 여자. 여자의 맞은 편에는 빨간 모자를 쓴 사람 크기의 곰 인형이 앉아있다. 커플들의 틈바구니에서도 기죽지 않고 꿋꿋이 생일밥을 챙겨먹는 그녀의 이름은 '솔로'.
네티즌들로부터 최근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한 컷 만화 시리즈 '나는 무적의 솔로부대다'의 일부다. 커플석(席), 커플 시계, 커플용 휴대전화 요금 등 커플들을 위한 각종 산업이 넘쳐나고, TV는 로맨스로 범벅된 드라마만으로 모자라 연애 관련 퀴즈까지 방영해 대는 이 ‘연애의 시대’에 짝 없는 이들이 느끼는 박탈감을 ‘솔로부대’가 잘 파고들고 있다.
만화를 자신의 미니홈피며 블로그에 스크랩해간 네티즌들은 “너무 재미있어 한바탕 웃었지만 웃고 나면 왠지 씁쓸해진다”, “솔로들이 느끼는 심정을 절절하게 표현해 가슴에 사무친다”며 만화 내용에 대한 공감을 표시했다.
만화는 연필과 펜으로 스케치한 다음 수채물감과 색연필로 채색해 동화처럼 아름다운 색채가 인상적이다. 이 만화에서 연인이 없는 ‘싱글’인 ‘솔로’는 우중충한 무채색으로만 그려지는 외로운 여인이다.
‘솔로 체험’을 생생하게 표현한 이 만화는 만화를 전공하는 대학 졸업반 학생이 자신의 싸이월드 미니홈피(www.cyworld.com/son02da) 사진첩에 올린 것. 정씨는 16일까지 불과 8컷의 그림으로 사이버 세상을 달구고 있다. 16일 충남 공주대학교 앞의 한 원룸에서 정선영(22ㆍ공주대학교 만화예술학과 4년)씨를 만났을 때 그는 막 종강을 했고 마지막 학기가 끝나면서 대학 4년간의 자취 생활을 청산하기 위해 짐을 싸고 있었다. 어머니와 두 언니, 갓난 조카까지 와서 고향인 충남 예산으로 내려가는 정씨를 돕고 있었다.
"대학 4년 내내 미팅 한 번도 못해 본 게 한이 맺혀 그림을 그렸다지 뭐유." 어머니가 깔깔 웃으며 말하자 그의 얼굴이 벌개졌다. "한 두 번은 해봤다니까. 엄마, 그렇게 말하면 나 시집 못 가." 그가 파닥대자 옆에서 두 언니들이 허리를 잡고 웃어댄다. 그는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셋째딸이다.
그는 지난 5월 '생활 카툰'이라는 전공과목 과제로 '나는 무적의 솔로부대다' 1편을 그려 제출했다. "자취하니까 종종 장을 보잖아요. 나는 무거운 장바구니를 혼자 낑낑대며 들고 가는데 연애하는 친구는 남자친구가 다 들어주더라구요. 부러웠지요. 저뿐 아니라 모든 솔로들에게 그런 경험이 있겠다 싶어서 그림으로 그려봤어요."
예상 외로 반응이 좋았다. 주변 친구들이 재미있다고 난리였다. 친구들의 성원에 힘입은 그는 11월에 있었던 졸업작품전에 내기 위해 시리즈로 네 편을 연달아 그렸다. 그림을 스캔해 자신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올린 그는 이후 친구들의 권유에 따라 다음 카페 '엽기 혹은 진실(cafe.daum.net/trupicture)'에도 그림을 올렸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현재 그의 싸이월드 미니홈피 하루 평균 방문객 수는 200여 명, 네티즌들은 "너무 재밌다", "내 이야기같다", "신선하다"며 만화를 퍼가고 있다.
4편까지 커다랗게 그려졌던 '솔로'의 모습은 5,6,7편에서는 개미처럼 조그마해졌다. 수많은 캐릭터들 중에서 솔로를 찾기 위해서는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눈을 부릅떠야 한다. 전편에 등장했던 등장인물과 소품들도 양념처럼 곳곳에 끼워넣었다. 네티즌들이 수많은 캐릭터들 중에서 '솔로찾기'를 벌이기 시작한데서 얻은 아이디어다.
알록달록 행복한 색깔의 커플들과 배경 속에서 어두운 빛깔, 무표정한 솔로의 우울한 초라함은 두드러진다. 그는 "불쌍해서 가끔씩 꽃도 달아주고 리본도 달아주는데 그래도 그다지 예뻐보이지 않는다"며 웃었다. 그늘지고 표정없는 얼굴은 한창 유행했던 '허무송' 플래시 캐릭터의 험상궂은 표정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단다. 그 이야기를 들은 둘째 언니 은미(25)씨가 "야, 난 고등학교때 니 모습인 줄 알았어. 그 때 너 '헬멧 머리'였었잖아" 하며 놀렸다. 그는 퍼머 머리를 한 번 매만지더니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아. 애들이 조금만 곱슬거릴 뿐이래"라고 천연덕스럽게 받아넘겼다.
"주변 사람들이 글쎄 만화 속 ‘솔로’가 계속 저라는 거예요. 얼마나 속상한지…. 근데 사진 꼭 찍어야 해요? 사람들이 다 '저러니까 솔로지' 할 것 같아서 싫은데…." 그는 지금까지 쭉 ‘솔로’였다. 대학 신입생 때는 여자친구들 7-8명이 몰려다니며 노느라 연애할 필요를 못 느꼈다. 그런데 날이 가면서 하나 둘 배신을 ‘때리는’ 친구들이 생기더란다. "연애하는 거 보면 부럽기도 하죠. 그래도 주변에 아직 솔로인 친구들이 많아서 우리끼리 즐겁게 잘 지내요."
그가 아직까지 싱글인 이유는 "아빠같은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장난기 많고, 다정하고, 가정적인 분'이란다. 아버지에 대한 그의 애정은 그의 그림에도 이곳 저곳 숨어있다. 쌀자루를 짊어진 솔로가 목에 두른 수건, 비 오는 날의 버스정류장 팻말,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커플들 중 한 명이 입은 티셔츠에 조그맣게 적힌 '예산청과'라는 글씨가 그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예산에서 청과 도매업을 한다. "제 그림을 본 옆집 한의사 아저씨가 자기 한의원 이름도 그림에 좀 넣어달라고 하더라구요. 하하"
해가 바뀌면 졸업이지만 그는 아직 직장을 얻지 못했다. 팬시 일러스트레이터나 동화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싶지만 취업문은 생각보다 좁았다. 그는 "일단 서울로 가서 학원을 다니며 공부를 더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미래는 불확실하지만 그는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만으로 신이 난다. 그는 연필을 잡을 수 있을 때부터 구석방에 앉아 혼자 만화를 그렸다. '무적의 솔로부대' 시리즈가 인기를 얻은 덕에 내년부터는 한 온라인 사이트(해피닷컴)에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만화로 그려 연재할 기회도 얻었다. 그는 "아버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동화책으로 그려 내는 게 앞으로의 꿈"이라고 했다.
그는 이날 '나는 무적의 솔로부대다' 8편을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8편에는 1편부터 7편까지 등장했던 캐릭터들이 총출동해 크리스마스 트리를 가운데 두고 산타클로스와 루돌프가 벌이는 퍼레이드를 구경한다. 이번에는 솔로녀(女)뿐 아니라 솔로남(男)도 등장한다. 크리스마스면 더욱 우울해지는 싱글들을 위한 특별 서비스다. "크리스마스에는 뭐할 거냐"고 장난스레 물었더니 이 명랑한 ‘솔로’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활짝 미소짓더니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라고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