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세엣] 목소리가 예쁜 그녀
1.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고객님 핸드폰 번호 뒷자리가 0564 맞으시죠?”
건너편에서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네, 그런데요?”
“축하드립니다, 고객님. 이번 저희 영농조합에서 진행 중인 이벤트에 고객님 핸드폰 번호 뒷자리가 선정되셨습니다. 이번행사는 중국산 값싼 농산물 때문에 어려워하시는 농민들을 후원코자 진행된 것으로, 번개통신 088 이용자 중 뒷자리 번호를 무작위 100명 추첨한 결과 고객님 번호가 선정된 겁니다. 때문에 차후 돈을 납부하셔야 한다거나 하는 상업성 전화가 아니라는 것을 미리 말씀드리면서요.”
이 부분에서 그녀는 일부러 멋쩍은 웃음소리를 냈다.
“고객님께서 수령하실 상품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제주도 여행 항공권 및 백제호텔 3박 4일 숙박권, 대성 렌트카 50% 할인권, 그리고 삼손김치냉장고 보내드립니다. 확인하셨습니까?”
“그걸 다 준단 말이에요, 꽁짜로?”
“그럼요, 고객님. 상품 받아보실 주소만 불러주시면 됩니다.”
그녀는 다시 웃었다.
“알았어요. 불러줄게요.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에브리원아트빌 106호”
“받으실 분 성함은요?”
전화건너편의 음성은 이미 기쁨으로 떨리고 있었다.
“김복순이요.
‘풋... 저런 이름이 실제로 있네? 목소리는 20대 중반밖에 안되는 거 같은데...’
하지만 이 생각이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물론 웃음소리도...
“아.. 알겠습니다. 소중한 정보 감사드리구요. 실명확인 프로그램에 입력하기 위한 주민등록번호 뒤 번호 일곱 자리를 불러주시겠습니까?”
“2189332”
“아. 확인되었습니다. 김복순씨 맞으시네요. 주소 확인되었으니, 상품은 2-3일 뒤에 택배로 받아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상품 보내드리면서요. 저희가 행사취지를 살리기 위해 이번 영농조합에서 새로 나온 홍삼엑기스 60포를 보내드릴 텐데요. 고객님, 홍삼 몸에 좋은 건 알고 계시죠? 더구나 대한민국 삼하면 그 효능과 명성이 세계적이잖아요. 그런데 요즘엔 값싼 중국산 제품들 때문에 영농인들 어려움 겪고 계세요.”
“아... 뉴스에서 봤어요. 안타깝네요.”
‘아싸! 이 여자.. 쉽잖아? 이름만큼 순진하네. 킥킥...’
“그래서 저희가 국산 제품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시라고 보내드리는 겁니다. 때문에 보내드리는 상품과는 전혀 상관없이 확인해보시고 구매를 원하시는 경우에만 저희가 저렴한 가격으로 드리구요. 구매 원하시지 않으시다면, 상품들은 고객님 명의니까 그냥 쓰시면 되구요, 다만 보내드린 홍삼만 다시 저희 쪽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만약 고객님께서 저희 좋은 뜻에 동참해주시겠다면, 고객님 건강도 챙기시고, 영농인들도 조금 도와주십사 하는 뜻에서 60% 할인가격, 19만원에 드리구요.”
“아.. 좋은 일 하시네요.”
‘목소리에 의구심이 깃들며, 쫌 전과는 다르게 힘이 빠짐이 느껴진다. 여기서 더 강요하면 실패하기일수지... 판매에는 관심 없는 척. 이쯤에서 그만둬야 한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절대 판매를 강요한다거나 하는 일은 아니니까 걱정 마시구요. 받아보시고 결정하세요.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게 낫다는 말도 있잖아요.”
“네...”
‘휴우.. 안심한 듯 했다. 역시 강요는 실패의 원인. 바보 같은 텔레마케팅 직원들은 무조건 끈덕지게 달라붙으면 성공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청개구리의 동물. 스스로 마음을 먹지 않는 한 마음이 수백 번은 더 바뀌기 마련이지. 제품보다는 경품에 관심이 더 가게 해야 한다. 제품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이제 겨우 2주 정도 되었나? 일을 시작한지 말이다. 짧은 시간에 이런 원리를 정립 해내다니! 천부적인 재능이다. 큭...’
“그럼 고객님, 소중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리구요. 20분 정도 후에 상품 받으실 주소지 확인 차 송달팀에서 해피콜 있을 예정이니까요. 꼭 받아주시구요.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지금까지 영농조합원 김민성이었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민성은 정성스레 적은 쪽지를 들고 뒤에 앉은 사내를 불렀다.
“Lee팀장님, 또 한 건 했다구요!”
“이야. 역시 민성씨는 대단해. 오늘도 판매 왕 끄덕 없겠는 걸?”
“히히”
쪽지를 받아든 사내는, 사무실 한 구석에 놓인 화이트보드에서 민성의 이름을 찾았다. 일곱 개.
다섯 개 이상 주문을 끊을 경우, 개당 4000원의 인센티브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했으니, 민성은 지난주에 봐둔 청치마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학에 들어와 처음 맞는 여름방학. 이렇다 할 계획도 못 세운 탓에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도중, 시급 5000원이라는 거액의 아르바이트 모집광고는 획기적인“발견”이었다. 이력서 한 통. 출신학교만 달랑 적힌 종이쪼가리 한 장으로, 일당 4만 5천원 파트타임 잡을 얻게 된 것이다.
회사는 금산의 한 농공장에서 물건을 받아 대신 판매하는 작은 회사였다.
진짜로 중국산 제품들이 밀려들어와서인지, 파는 물건이 국산을 가장한 중국산이기 때문인지 민성이 알 턱은 없었지만, 텔레마케팅이란 판매방법은 나름대로 획기적이다. 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벤트니 모니 하는 말로 귀를 여는 것은 상도에 어긋나기야 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결국 사고 말고는 고객이 선택하는 거라고 하니, 이는 수단 일 뿐 결코 사기는 아닌 것이다.
고등학교 방송부 아나운서의 경력은 그녀를 도왔다. 또랑또랑한 목소리와 적절한 감성화법. 옆에서 듣고 있노라면, 무슨 애국심이라도 발휘해야 할 것만 같이 들렸다.
그녀는 순식간에 판매 왕이 되었다. 하루 인센티브는 당일 지급되는데, 그녀는 매일 꼬박 12,000원을 챙겨갔다. 이쯤 되니 두 명의 팀장이나 가끔 얼굴을 비추는 사장이란 작자도 그녀의 존재를 눈여겨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오로지 Lee 팀장 한사람만이 보일 뿐이었다. 훤칠한 키에 깔끔한 외모, 말은 또 어찌나 잘하는지. 헤어젤을 이용해 억지로 빗어 넘긴 머리가 조금 촌스럽긴 했지만, 그는 민성의 이상형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Mr.Lee”라 불렀다.
“Mr.Lee 팀장님, 어제는 왜 안 오셨어요?”
“응, 몰랐나? 난 격일 근무야.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던 거예요? 하하.. 어떡하나, 내일도 쉬는데”
“착각마세요. 제 이상형은 내츄럴한 생머리라구요.”
그녀는 수줍게 웃었다.
“아, 왜 이래요. 나도 머리 내리면 생머리라고! 그건 그거고... 이거요. 내일 민성씨가 해야 할 번호들.”
Mr.Lee 팀장은 전화번호가 무수하게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뒤죽박죽이네?”
“하하. 무작위로 추첨한 거니까요. 왜, 전화 얘기할 때 그러잖아요. 무작위로 추첨해서요.”
“킥킥. 거짓말은 아니네요? 사람 수가 쫌 많아서 그렇지.”
“그런 셈이지. 하여튼, 나 없어도 내일.. 수고 좀 해요.”
사장실에서 한 사내의 외침이 들려왔기 때문에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잇지 못했다.
“아. 월급날이 얼마나 남았지.”
월급은 다음달 10일에 받기로 되어있었지만, 김민성은 아직도 그 청치마 생각뿐이었다.
Mr.Lee가 나오지 않는 날이면, 민성은 덩달아 기분이 나질 않는다. 오늘은 생리주기까지 겹쳐 판매율이 특히나 저조했다. 그녀는 맥없이 수화기를 들고 빼곡히 적힌 다이얼로그를 읽어 내려갔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이렇게 전화 드린 이유는, 이번 저희 영농조합에서..”
“바쁩니다.”
‘꼬시기 힘든 타입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번잡스러운 곳에 있는 듯 했다.’
“저, 조금만 시간을 내주시면 되는데... 일단 축하드리...”
“저, 됐어요. 저... 그런 전화 많이 받아봤거든요.”
‘갑자기 열이 받기 시작했다. 아니, 승부욕이 생겼다고나 할까. 열흘 동안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거절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이 사람에게 나의 능력을 평가받기로 마음먹었다.’
“저 고개님이 생각하시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겁니다. 이건 추첨을 통해서 당첨되신 거구요, 경품만 받으시면 됩니다. 물건을 판매하지는 않습니다.”
“경품만 받으면 된단 말이죠? 그렇다면 경품 이외에는 어떠한 물건도 보내면 안 됩니다. 또한 다른 어떤 이야기도 듣지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계속 통화를 해드리죠.”
‘고수다. 아니, 마치 이 일을 꿰뚫고 있는 사람 같다. 너무나 철벽방어라, 다가갈 틈을 주지 않는다.’
“저... 음...”
“거보세요. 결국 사기전화죠? 그럼 끊습니다.”
당황한 민성의 얼굴은 정말로 귀까지 빨게 있었다.
“잠깐만요. 저... 음... 사기전화라니... 당신... 좀 너무하다고 생각 안하시나요?”
“아, 이 아가씨 이거 원. 오히려 화를 내는군요. 억지로 물건을 떠맡기는 당신 같은 사람들이 더 너무한 것 아닌가요? 참, 네... 내가 재미있는 거 하나 알려줄까?”
민성은 짜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박 팀장이 늘 강조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침착하자... 고객은 나의 친구이자, 가족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나라 영농인들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어떤 건가요... 고객님?”
민성은 끝까지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바늘처럼 솟은 화를 더욱 더 뭉뚱그리며..
“혹시 아르바이트생인가요?”
“네, 그렇습니다만...”
“정식 사원은 아니죠? 혹시 학생? 방학 중이라 용돈을 버는 중인가요?”
“그렇습니다만, 별루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네요.”
“아직 일한지 한 달 안됐지요? 첫 월급은 받아봤나요?”
“자꾸 이상한 질문만 하시는데...”
“그렇담 그 회사... 사기일 가능성이 높아. 아가씨, 당신 곧 사기 당할 지도 모른다고. 정확히 말해줘요? 돈 못 받는다고요. 아가씨 월급 말이야.”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아직 일한지 한 달 안됐죠?”
“네. 2주 됐어요.”
“월급은 익월 10일 쯤에 넣어준다고 하고?”
“네, 맞아요.”
“대신 인센티브는 당일에 주지요?”
“어떻게 아셨어요?”
“그게 대게의 유령회사 수법이라 이 말입니다. 주변에 한 달 채운 사람 아무도 없을 걸요? 돈을 안줘서 그만뒀거, 만들어진지 한 달도 안 된 회사거나... 뭐 둘 중 하나겠지. 그렇다면 뻔하잖아요. 익월에 주겠다고 하는 이유가.”
“그건... 회사 방침...”
“회사 방침이 아니라 사기의 방침입니다. 과연 다음 달에도 그 회사가 존재할까요? 우리 내기할까요? 매일 인센티브를 주는 이유가 뭐겠어요? 다 회사를 믿게 하기 위해서예요. 아가씬 지금... 잘못 걸린 거야.”
“.....”
“내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아가씨 목소리가 마음에 들어서 충고해주겠어요. 나도 몇 년 전에 그런 텔레마케팅 일을 한 적이 있고, 내가 지금까지 말한 똑같은 수법으로 당할 뻔 했지요. 다행히 아는 분 중에 변호사가 있어서, 결국 받아내긴 했지만 말이에요. 하여튼 아가씨 생각 잘해요. 나 같으면 지금 당장 그만둘 거예요.”
민성은 억울함과 황당함으로 이미 개미처럼 울먹이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기... 근데 돈 받으셨다고 했지요?”
“네, 다행이요.”
“저 좀 도와주시면 안 되나요?”
“전 자선사업가가 아닙니다. 나머지는 아가씨가 알아서 처신하세요. 그럼 바빠서...”
“저, 잠깐만요. 저 좀 제발 도와주세요. 전 아는 변호사도 없고, 법도 잘 몰라요. 받아만 주신다면 월급의 20%를 드릴게요. 제발 부탁드려요.”
월급의 20%에 흔들렸는지, 애처로운 그녀의 목소리에 흔들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방의 마음은 이미 동요되고 있었다.
“저기, 전 학생이 열심히 해서 번 돈을 가로챌 생각은 전혀 없어요. 양심에 찔려서 그 돈은 못 받습니다만... 그렇게 절실하시니, 도와는 드리겠습니다. 그 변호사 전화번호를 알려드릴 테니 직접 전화해보세요.”
“저 그것도 직접 부탁 해주시면 안 될까요? 아시는 분이 해주시는 게 더 낳을 것 같아서요.”
“아가씨를 위해선 그게 빠르겠지만, 저한테는 매우 귀찮은 일이라...”
“부탁드려요. 수고비 드릴게요.”
“정말 귀찮은 아가씨네... 좋아요. 수고비는 됐고요. 내일 그 분을 만나기로 돼 있으니, 그 때 부탁해 놓겠습니다. 흠, 여러 가지 서류를 작성했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일단 그 회사 주소 알려줘요. 사건을 접수시키려면 아가씨 집주소와 주민등록번호가 필요해요. 그리고 수수료 5만원과 도장이나 지장... 이건 나중에 직접 찍으시고요. 핸드폰 번호도 알려주시고요. 집 전화도... 수수료는 일단 제 돈으로 내줄테니, 나중에 내 계좌로 붙여주면 되겠고... 흠... 다 된 듯싶네요. 만약 빠진 게 있으면 변호사 분이 전화주실 거예요. 그리고 일주일 후에 아가씨 집으로 통보장이 날아갈 겁니다. 그럼 거기에 적힌 대로 하시면 될 겁니다.”
“정말정말 감사드려요. 이 은혜를...”
“더 이상 귀찮게만 하지 말아주세요. 행운을 빌게요. 그럼 전 바빠서 정말 끊겠습니다.”
찰칵...
2.
수화기를 내려놓은 사내는 정성스레 적은 종이를 들고 박 전무를 불렀다.
“Mr.Lee 전무님. 또 한건 했다구요!”
“이야. 역시 상렬 씨는 대단해. 오늘도 판매 왕 끄떡없겠는 걸?”
“히히”
쪽지를 받아든 Mr.Lee 전무는, 사무실 한 구석에 놓인 화이트보드에서 상렬의 이름을 찾았다. 일곱 개.
다섯 개 이상 주문을 끊을 경우, 개당 4000원의 인센티브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했으니, 상렬은 지난주에 봐둔 청바지를 떠올리고 있던 것이다.
그가 대학을 갓 졸업하고 처음으로 들어온 직장. 타 텔레마케팅 회사로부터 걸려 들어오는 전화기를 다량 보유한 이곳은...
생긴지 2주 된 작은 인바운딩 텔레마케팅 회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