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이야기 (23)
17. 딸에게 보내는 크리스마스 메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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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 정은아.
아빠의 크리스마스 얘기 한 번 들어보려무나.
먼 옛날도 아니란다.
아빠의 어린시절 이야기이지만 네가 들어보면 딴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아빠
의 어린시절 크리스마스는 오늘의 크리스마스 분위기와는 한참 다른 이야기란다.
궁핍한 시절의 이야기이다 보니 아빠의 크리스마스는 먹는 얘기와 관련이 있단다.
물론 지금도 먹는 것이야 돈으로 사서 해결하지만 무엇이든 마음먹은 대로 살 수 있는 풍족한
세상과는 달리 그때는 돈도 없었지만 모든 것이 귀했기에 먹는 것도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많
았단다.
예수를 믿거나 안 믿거나 크리스마스는 연말연시와 맞물린 송구영신의 분위기 때문에 사회가
술렁대는 지금이야 축제의 분위기이지만 아빠의 크리스마스는 단순히 교회에서 나누어주는 호
두알처럼 굵은 알사탕 몇 개와 하얗게 잘 구운 맛있는 빵 몇 조각을 얻기 위해 동네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만 되면 교회로 몰려갔단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성인의 탄생축하보다 사탕 몇 알의 유혹에 빠진 크리스마스였단다.
그 달콤한 사탕의 유혹에 이끌려 한꺼번에 몰려든 아이들 때문에 신발 바꿔 신기가 일수였고
분실하기가 여사인 북새통을 이루었단다.
아이들은 모두가 신발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고무신을 가슴에 안고 교회마루바닥에 앉아 지
루한 목사의 설교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다보면, 이제나 저제나 가슴조이며 기다리든 아이들 앞
에 맛있는 과자가 든 봉투가 돌려졌단다.
교회에만 가면 누구에게나 나누어주었던 그 싼타할아버지 선물은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유혹적
이고 매력적인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단다.
수백 수천가지의 질 좋은 과자들도 맛이 없다고 외국에서 수입한 과자들이 가게에 산처럼 쌓여
있지만, 그때 아이들은 하얀 설탕가루를 묻힌 투박한 왕눈깔 사탕 한 알이 행복의 전부일 정도
로 최고의 단맛을 주는 과자였단다.
정은아 너도 알지.
경상도에서는 눈을 눈깔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눈이 큰아이를 '눈깔이가 큰 아'로 불리는 말처
럼, 사탕이 눈알처럼 둥글고 컸기에 눈깔이 사탕이라고 불렀단다.
오래먹기 위해 깨트려서 먹는다는 것은 바보 같은 행동이라고들 생각했지.
신문지나 시멘트 포장지로 만든 봉투 속에는 하얀 밀가루로 구운 말랑말랑한 빵이 또 몇 개인
가 들어있었지.
그 부드러운 빵이 주는 맛은 입안에서 살살 녹아내렸단다.
6`25 전쟁이 끝나고부터 미국의 무상원조물자로 백설같이 하얀 밀가루가 쏟아져 들어왔단다.
그때 우리나라에서 만든 밀가루는 대채로 정제가 조잡하여 거칠고 투박한 밀가루였는데 미국
서 들어온 밀가루는 정말로 곱고 매끄러운 순백의 밀가루였단다.
그 하얀 밀가루는 사람들의 입맛을 금 새 사로잡았고 미국 밀가루 입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우리 밀가루를 먹을 수없었고 우리 밀가루를 찾는사람들도 없었기에 농부들도 밀농사를 짓지
않게 되었단다.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미국 밀가루 입맛에 길들여지자 무상으로 무작정 퍼주던 미국은 그때부
터 돈 주고 사가라고 했단다.
그때는 벌써 이땅에 겨울이면 벨베트처럼 부드러운 초록물결로 바람 한 올에도 일렁이고 술렁
이며 이 강산을 쓰다듬어주던 정겨운 밀밭은 자취를 감추고 없었으니 안 살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단다.
정은아.
미국사람들은 그것을 노렸단다.
그때부터는 가격도 이미 그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단다.
그들은 가격 조절을 위해 잉여생산 된 밀은 가축의 사료로 사용하고 그래도 남으면 태평양바다
에 쏟아버리면서 가격을 조절했단다.
생산기반이 상실된 나라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사먹을 수 밖에 없는 종속관
계가 된 것이지.
지금 네가 즐겨먹는 햄버거나 피자도 비슷한 경우란다.
빅맥은 세계 118개국에서 판매되고 있지만 어느 나라나 없이 똑같은 재료에, 똑같은 향신료에,
똑같은 무게로 만들어진 규격화된 맛이란다.
다국적 회사들은 세계인의 입맛을 똑같은 규격으로 만들어서 시장을 지배하려고 한단다.
음식이란 생산되는 지방의 기후화 풍토에 따라 형성되어야 음식의 본질이 되는데 그 본질적인
맛이 없어진 음식은 그들 말대로 정크푸드, 즉 쓰레기 음식이란다.
그러한 음식들이 가지고 있어야할 본질이 다른 얼굴과 표상으로, 그리고 짜여진 입맛 길들이기
와 숨겨진 상관성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단다.
정은아.
다행이도 네가 김치와 된장을 그토록 좋아하니 다행이지만, 어려운 시대를 겪지 않고 자란 신
세대 엄마들이나 그들이 낳은 아이들은 김치보다는 샐러드, 떡보다는 파이 한 조각에 환호하고
고추장이나 된장보다는 케찹에, 마요네즈를, 그리고 편리함과 단순한 효율성을 더 즐기니 아마
도 좀더 지난 세월 뒤에는 이 땅에 밀이 사라지듯 고추장과 된장과 김치가 사라지지 않을까 걱
정이 앞선단다.
한 사회의 가치는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전통이 유지되고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분명히 가늠
할 수 있단다.
단순히 개인 기호에 따른 먹거리의 선호도가 아닌, 그 뒤에는 경제적인 종속구조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란다.
정은아.
아빠가 겪은 크리스마스는 달콤한 맛의 공짜 사탕 몇 알과 하얀 빵 몇 조각을 기다렷던 궁핍한
시절의 크리스마스였고 힘들긴 하였던 시절이었지만 겸허한 송구영신의 뜻이 담겨 마음가짐을
오히려 평소보다 더 차분히 가졌던 것만큼은 틀림없었단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로부터 시작되는 연말연시의 분위기가 언제부터인지 줄 끊어진 연처럼 규제
할 수 없는 흥청망청한 세태를 보면 어지럽고 말문이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는구나.
사랑하는 내 딸 정은아.
네가 먼 객지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하더라도 너만의 한 해를, 알뜰하게 살아왔는가 되돌아 볼
수 있는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있는 조용한 세모가 되었어면 한단다.
사랑하는 아빠가
아버지의 경제
한 방안이
점점 좁아지는구나
내가 밀려서 잠을 깨다 보면
요놈들은
키도 크고
넓어졌구나
쌀도 한 말이면
일주일을 먹는데
요사이는 며칠 못 먹으니
아버지 경제는
찬바람이 불구나.
엄마는 추운데 밖을 나가고
아버지는 눈을 감고
몸부림치는구나.
봄이 오기 전에
모든 물가는 뛰고
아버지 경제는
더더욱 적자 운영으로
가득 채운 먹구름
주름살이 늘어만 간다.
이 시대는 식구들의
한달 먹을 것이
벌써 걱정이니,
아버지 경제는 어쩌자는 건가.
- 박봉우 -
푸 른 바 다
Yesterday- Lisa O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