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기 바람이 아화의 귓가를 스쳐지나갔다. 그녀의 비녀에서부터 길게 늘어뜨린 구슬이 바람결에 맑은 소리를 내며 짤랑거렸다.
" 마침내 영조님께서 나를 찾으셨지. 여리님께서 나를 불러 그 분의 뜻을 전하시며 단장을 하라 하시더구나."
" 그래서 어찌 되었나요?"
묘영은 긴장한 얼굴로 저도 모르게 재촉을 하고 있었다.
" ......시간을 들여 치장을 하였다. 눈썹을 다듬고 분을 바르면서 죽어가던 내 가족들과 족장어르신의 선혈을 하나 하나 꼽씹었지. 그들이 내어지르던 절규가 내 귓가에 생생히 찾아들었고..나는 냉정하게 내 분노의 불꽃을 일으켰다. 내 품에는 여전히 날이 선 단검이 있었지. 마지막의 기회였어.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그렇게 맘을 다 잡았단다"
" ......."
" 영조님을 뵙기 전에 여리님께서 나를 다시 부르시더구나. 그리고 말씀하시길...."
" 뭐라 하셨는가요?"
묘영은 손에 땀이 나고 입이 말랐다. 이제 아화의 과거를 알게 되었다는 특권 의식으로 생기는 약간의 자만과 호기심은 사라진 후였다. 아화의 과거를 듣는 동안 묘영은 스스로가 그 과거에 서 있는 듯 위태로운 감정이었다.
" 실패하든 성공하든 뒷길로 달리거라. 말 한 필을 준비해두었으니 뒤도 돌아보지 말고 곧장 달려 영원히 떠나서 돌아오지 말아라....하시더구나."
아화는 그 때의 감격을 떠 올리면서 약간 젖은 목소리로 말하며 묘영의 두 손을 자신의 양 손으로 감싸 쥐었다.
" 이렇게 내 손을 쥐시며 말씀하셨어. 하지만 그 순간부터는 다 털어버리고 어디서든지 반드시 살아가야한다.....라고..."
묘영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했다. 단지 그녀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죽 볼을 타고 흐를 뿐이었다.
굳이 아화의 입을 통해 결과를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화는 결국 영조님 앞에서 칼을 꺼 내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그 순간 아화는 모든 한을 포기 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묘영은 어쩌면 관음보살의 자비로운 미소를 아화가 가지게 된 것은 그 일이 있은 후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용서해 버렸으니까. 죽은 자도, 죽인 자도, 한을 품은 자신의 서러운 과거마저도 다 용서했을테니까.
" 분노라는 건 외나무 다리에 앉아 있는 것과 같아.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그 자체로도 위협이 되거나 여차하여 낭떠러지로 떨어져버릴 수 있지. 그래서 선택을 해야해. 어느 쪽으로 갈 것이냐에 대해서 말이야.
한 걸음만 내 딛으면 갈 수 있는 이 쪽의 땅은 겉보기엔 쉽고 편안해 보이지만 비극으로 치닫는 땅이야. 다른 쪽 땅으로 가려고할 때도 힘들긴 마찬가지지. 수 걸음을 걸어야하고 그 길에서 닥쳐오는 공포와 결심은 힘겨워. 하지만...보이지 않는 그 땅이야 말로 낙원이란다. 사람들은 대부분 한 걸음만 내 딛기를 원해서 그 비정한 땅으로 가고 말아..하지만..그게 아니야. 분노와 복수는 모두 부질없는 것이거든. 그 땅에서는 아무것도 싹 틔울 수가 없단다.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는 외나무 다리에서 일어서서 멀고 두렵지만 빛이 보이는 먼 방향을 선택해야해."
아화는 누구나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는 마법같은 웃음을 띄며 말했다. 묘영은 그 순간 아화의 모습이 숭고하기까지 했다. 존경하는 선배이자 주인으로 아화를 진심으로 따르는 묘영이지만 그녀는 그날 더욱더 간절하게 그녀의 모든 것을 닮고 싶은 욕심이 일었다. 그녀의 성스러운 내면까지 빠짐없이 닮고 싶었다.
" 묘영아..."
아화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묘영의 이름을 불렀다.
" 네?"
" 내가 너를 진심으로 아끼기에 하는 말이다. 그러니 오해 말고 들어주거라."
" 네. 말씀하세요."
묘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고쳐 앉으며 아화의 말을 기다렸다.
" 너는 제 4황자 전하를...진심으로 미워하는게 맞느냐?"
" 그...그건...."
묘영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아화를 쳐다보았다. 아화의 시선은 단호하게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고 묘영은 그 눈빛이 자신의 뱃속까지 다 들여다보는 듯 거북스러우면서도 두려웠다.
" 결코 용서하지 못할 분이옵니다!"
묘영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지만 함께 몰려오는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해 시선을 피해버렸다.
" 그러하느냐..."
아화는 그저 수긍하는 말투로 대꾸해주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길이 잘 들어 은은한 색이 도는 나뭇빛 난간에 손을 얹으면서 정원에 들어서는 가을빛을 둘러보더니,
" 네 언니에게 전하는 하늘과 같은 분이셨을게야..."
묘영은 고개를 들어 아화의 뒷모습을 보았다.
" 지옥같은 생애에서 유일하게 바라보고 웃을 수 있는 하늘 말이야. 낮이건 밤이건 그녀의 전신을 내맡겨도 될 만큼 사방으로 든든히 드리운 채 서 계셨을게지. 바라 보는 것만으로도 감격이 치밀어 오르는 그런 하늘 말이다.너에게도 그런 분이 계실테지..."
묘영은 그 말에 제공이 떠올랐다. 그녀의 마음이 조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화는 묘영이 자기 가슴 속의 가장 진실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돕고 있었다.
" 네가 가장 잘 알것이야. 진실이 무엇인지를 말이야. 분노의 씨를 스스로 네 가슴에 심어 자라게 해 버리고 말았다니..그건 아니될 일이지. 이제 그 거짓의 씨앗이 네 눈마저 가려버렸으니 안타까운 일이구나. 네가 지어낸 분노로 끝내 가장 소중한 걸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후회할 짓은 해서는 안돼."
아화는 그 말을 남기고 정자를 떠났다. 묘영은 가슴 속에서 이는 파문을 느끼며 가을 정취 속의 그 정자에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설무랑은 습관처럼 제휴수로 통하는 길을 택했다.
오랜 시간 초율은 촉룡산을 찾아오지 않았고 그 덕에 처음부터 제휴수 부근이 마음에 들었던 설무랑은 맘껏 그 곳을 차지하여 즐길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날도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제휴수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날은 그의 예상이 빗나가 멀찌기서 초율의 붉은 갑옷이 시야에 들어왔다. 설무랑은 본래 주인이 자리를 차고 앉은 것을 보고는 단념하고 돌아섰다가 인사치레라도 할 작정으로 다시 방향을 틀었다.
" 어이, 오랜만이야. 그 동안 보이지 않아 영영 사라졌나했더니 목숨 하나는 질기군 그래. 하긴 그 성격에 고기도 질길텐데 어디 마물들이 좋아나 하겠는가? 씹었다가 구역질을 내며 토해버릴 것을."
역시나 설무랑의 인사치레는 반가움이나 정겨움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초율은 제휴수에 등을 기댄 채 낮잠이라도 즐기는 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초율의 목석같은 반응에 재미가 없어진 설무랑은 피식 웃어버리고는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는 아까부터 주변 풍경에서 느껴진 이질적인 느낌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다. 마치 단짝처럼 제휴수와 어우러져 있던 넓적 바위가 산산조각이 난 채 아예 가루가 되어 날리고 있는 것이었다.
설무랑은 직감적으로 초율의 짓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그 상황을 모른 척 태연하게 행동하면서 발걸음을 떼었다. 그러자 초율이 입을 열어 그의 발을 잡았다.
" 오랜 만에 왔더니....더러운 자국을 묻혀놓았더군."
설무랑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면서 초율의 가면을 당당하게 쳐다보았고, 초율은 마치 설무랑의 그런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일어서면서,
" 이계의 지저분한 마물이 내 산에 머무르다 갔었다. 축축하고 음산한 배설물의 냄새가 가득 배어 진동을 하더군. 마치..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이군 그래, 지국천의 장자?"
" 글쎄..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군."
설무랑은 눈을 약간 치켜뜨고 팔까지 벌려 어깨를 으쓱하면서 과장된 동작을 취하며 놀리듯 말했다.
" 나는 어린애와 여자와 이계의 냄새나는 것들을 혐오한다. 구역질이 날 만큼 말이다."
초율은 설무랑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상관도 없다는 듯 단지 차갑게 경고를 남기고 그를 스쳐 지나가더니 잠깐 멈추어 서서 속삭이듯 말했다.
" 음습한 죽음의 늪지대에 낀 근원을 알 수 없는 안개......너한테서 그 냄새가 나. 그래서 난 네가 더더욱 싫어."
설무랑은 팔짱을 낀채 그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다시 흔적없이 부서진 바위의 잔해더미로 시선을 옮겼다.
" 아주 섬찟할 정도군."
설무랑은 중얼거리면서 제휴수로 다가가 마치 다정한 친구에게 말을 걸 듯 물었다.
" 이 봐, 나무씨? 혹시 네가 나 몰래 저 녀석한테 언질을 준 거 아냐?"
그는 초율이 앉았있던 자리에 주저 앉아 나무 등걸에 등을 기댔다. 제휴수에서는 어떤 반응도 없었고 설무랑은 어깨 위로 팔을 올려 손을 나무 등걸에 가져다 대었다. 규칙적인 나무 박동 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 이거...요상한 나무 곁에 오래 있다보니 나까지 점점 정신이 이상해지나보군.나무가 어떻게 말을 하겠어?"
설무랑은 한참을 이러쿵 저러쿵 불만이 많았다.
" 그렇다면......"
웅무가 다녀간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 공기 중에서조차 그의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리고 웅무는 처음부터 그가 가진 비상한 능력으로 생물이 가진 생기(生氣) 자체를 숨겨 외부로 흘려보내지도 않았다. 설무랑은 단지 직감적으로 같은 계의 접근을 느꼈을 뿐 그것은 설무랑만이 가진 천부적인 어떠한 감각이라 누구도 따라할 자가 없는게 분명했다. 그런 그로써도 이제 바위가루에서 어떤 흔적도 읽어낼 수가 없는 터였는데 초율은 정확하게 웅무의 흔적을 짚어낸 셈이었다. 설무랑은 초율의 특이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어떤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게다가 초율은 설무랑 자신에게서조차 어떤 개운치 않은 느낌을 받은 셈이었다.
" 나무씨, 정말 저 놈은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