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어려서부터 아버지란 존재는 자기 정신의 토양임과 동시에 그 굴레가 되기 마련이다.
특히 남자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그늘은 비단 선천적일 뿐만 아니라 후천적으로 잠재하여
지속적으로 그의 인생에 영향을 미친다.
흔히 한 남자에게 있어서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자세히 따지고 보면 그 아버지의 문제,
그 집안의 문제로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가 많으며, 그런 점에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아버지의 인생에 대해서 역시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비판적으로 재음미를 해보는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1936년 3월 3일(음력) 어느 궁벽한 시골의 토반가문에서 4남2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다.
나의 아버지께서 태어나셨던 일제말은 빈곤과 압제의 시기였던 동시에 나름대로 우리나라에 상당히
근대화가 진척돼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아버지께서 자라나신 답답한 시골의 공간은 그저 농사짓고 닭이나 키우면서 막걸리나 마시다가 먼지바람과
소똥냄새 속에 재미없게 늙어가는 정체된 공간이었다.
더군다나 할아버님 일찌기 돌아가는 상황에서 집안의 모든 권한은 장자이신 큰아버님이 가지고 계셨고
나의 아버지께서는 군입대를 앞두고 결혼을 하시게 되었다
저희형님을 낳으시고 한해가 지나갈 무렵 아버님은 중대한 결심을 하시게 되는데
숨막히도록 낙후된 농촌환경의 그리 넉넉치 못한 살림에서
아버지께서는 교육의 기회조차 박탈당하신 채 운명적으로 농사나 짓고 무지와 차별 속에 억울한 착취나 당하며 살지 않으면 안되실 조건이었다.
거기다 약삭빠름과는 거리가 멀던 시골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생존의 미덕은 오로지 내핍일 뿐이었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일 수밖에 없고, 거기서 하나를 빼면 다시 하나가 남을 뿐이라는 게 미련한 시골 사람들의 유일한 산수였다.
오히려 숨막히도록 긴밀하게 짜여진 촌락공동체 속에서 우직한 희생과 근면한 노동으로 주위로부터 천천히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나의 아버지께서 체질화된 유일한 생존방식이었다.
이런 성향은 아버지께서 젊은 나이에 일찍 도회에 진출하시려는 결심을 굳히시고
제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무렵 1963년에 소위 말하는 무일푼으로 서울에 상경하시면서
저희 가족은 큰 전환점이 되었다
경희대학교 앞에서 월세집을 얻고 어머니는 행상(방울장수)으로 아버지는 조그만 구멍가게에 국수기술을 익히시어 국수까지
일이라 생각되는 것은 닥치시는 대로 모르면 배워서라도 당신것으로 만드시면서
저희 식구들을 위해서 가장으로서 열심히 진짜 열심히 일을 하셨다
다른것으로 한눈을 팔지 않으시고 오로지 일만 하시는 아버님의 고생 덕분으로 저희 가세는 날로 늘어 나게 되었지요
어언 40년이 흐른 지금은 그 고생의 흔적으로 당신의 몸 여기저기 아프시기도 하지만
그러는 아버님을 뵈올때 마다 당신의 노력하심과 고생하심에 절로 감슴이 뭉클해 지곤 합니다
이제 곧 내년이면 칠순을 맞으시는 아버님께 이 글을 통하여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씀을 올리고
아울러 저희 4형제는 아버님의 뜻을 이어 항상 화목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도우며 살아 갈 것을 형제들을 대표하여
약속을 드리는 바입니다
아무쪼록 항상 건강하시고 어머님과 더불어 남은 여생을 행복하고 재미있게 보내시기를
저희 형제들은 간절히 기원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