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wi - 30
찜질방에 들어서자마자 병진이가 날 기다렸다는 듯 서 있었다.
“묘향 언니 왔어? 뭐래? 어떤 사이래?”
“그게 문제가 아니다. 서루 오빠 와서 니네 식구들 다 모여 있어. 선물을 아주 주렁주렁 매달고 왔던데. 지가 산타냐? 좋겠다. 넌.”
“선물로 매수하러 왔군. 어디? 방에 있어?”
“빨리 가봐. 너무 흥분하지는 말고.”
다른 때 같으면 역시 돈 있는 서루 오빠를 잡아야한다고 말했을 그녀가 슬슬 서루 오빠를 흉보기 시작한 것은 나를 응원해주는 것이리라. 응원군이 생겼음에 용기를 얻고는 마음을 가다듬고 방문을 열렸다.
“말도 안하고 어딜 나갔다와? 견서방 아까 왔는데.”
누가 서방이야?
“말도 안하고 온 사람도 있는데요, 뭘.”
좁은 방안은 사람들과 뜯어진 포장지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쩌면 나를 우쭐하게 만들었을 예쁜 포장지들은 민성 오빠와 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고, 분위기가 완전 서루 오빠 쪽으로 기운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 건물 주인이 다음달에 계약을 해주겠다고 했어요. 아직 정리할 것도 있다고 해서. 저는 아직 학생이고, 어머니는 아버지 병간호에 경황이 없으시니 이 건물 관리를 부탁드려도 될까 어머니가 장모님께 여쭤보라고 하시네요.”
“어려울 때 도와야지. 이 건물 사람들이야 다들 알고 지내니, 어려울 건 없지.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시고 간호 잘하시라고 해요.”
“감사합니다.”
“견서방이 네 선물도 사왔어. 한 번 풀어봐라. 보는 안목도 어쩜 이리 높니? 엄마 선물은 이거야. 너무 예쁘지?”
엄마가 보이신 것은 고가의 명품 핸드백이었다. 흡족해 하시는 엄마와 아빠를 실망 시켜드리기는 싫었지만 돈으로 우리 가족까지 매수하려는 서루 오빠의 치사함에 있는 자리에서 말씀을 드려야겠다는 결심이 굳어졌다.
“엄마, 죄송해요. 저 이 결혼 못해요. 그러니까 선물 다 돌려드려.”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나 서루 오빠랑 결혼 못 한다구요.”
“둘이 싸웠어?”
엄마가 서루 오빠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으셨다.
“혜림이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대요. 얼마 전에 만났다는데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남자보다 헤림이를 더 행복하게 해줄 자신 있어요.”
“다른 남자? 결혼하기로 하고 다른 남자를 만났다는 게 사실이냐?”
아버지가 꾸짖듯이 물으셨다.
“사실이에요. 만난지는 얼마 안됐지만 그 사람이 좋아요. 서루 오빠와는 결혼 안 해요.”
“저 이런 말씀까지 드려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혜림이를 놓치기 싫어 그 남자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아직 군대도 다녀오지 않았고, 저희 건물에서 세를 받아 식당을 하는 아주머니의 아들이더군요. 아이들 상대로 하는 조그만 분식집이요. 그 남자보다는 혜림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습니다.”
“치사하게 뒷조사까지? 왜 남의 건물에 세든 사람이랑은 만나면 안 되는 거야? 그럼 오빠가 이 건물 주인집 되면 나도 오빠 만나면 안 되겠네.”
식구들은 조사까지 했다는 서루오빠에게 놀라는 건지 조건이 좋지 않은 남자를 만나고 있다는 것에 놀라는 건지 쉽게 말을 꺼낼 생각도 못한 채 앉아 있었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 그 남자가 형편이 어려워서 만나지 말라는 것이 아니야. 그 남자보다는 내가 낫다는 뜻이지. 적어도 돈 걱정은 안 시킬 자신 있으니까. 난 이미 군대도 다녀왔다구.”
“군대는 어딜 다녀왔나?”
“공군입니다.”
“아, 나도 공군이었지.”
아버지는 누구의 편이 되는 것이 어려우셨던지 괜한 군대 얘기로 분위기를 바꾸고 계셨다.
“여기 더 있을 이유가 없는 것 같아. 나보다 더 이유가 없는 사람도 있지만. 이만 일어설께요.”
“앉아라.”
서루 오빠와 얘기를 나누시던 아버지는 다소 무섭게 말씀하셨다.
“이건 가족문제기도 하지만 너희 둘 문제야. 다시 가족들 앞에서 오늘 같은 행동 보이는 일 없어야 해. 그건 견서루군도 마찬가지야. 알았나?”
“예.”
“서루군이 멋진 남자건 잘 알겠네. 지금 누워계신 아버님도 대견스러우시겠어. 아들이 없는 나로서는 정말 듬직해 보이고 좋아. 하지만 딸이 싫다는 남자에게 시집을 보낼 수는 없네. 그건 이해하겠지?”
“이해합니다.”
“이건 하나 약속하지. 혜림이가 만나는 남자랑 결혼은 물론 교제도 허락하지 않겠네. 내가 자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 것뿐이군. 개인적으로는 자네가 혜림이의 마음을 다시 얻게 되길 바래.”
“감사합니다.”
“아빠! 딸이 마음에 드는 남자의 편에 있으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이게 어디에서.”
급기야 나는 소리를 질렀고, 보다 못한 언니들에 의해서 밖으로 끌려나왔다.
“이럴 수가 있어? 결국 서루 오빠 편 들어주기잖아. 자기 딸 싫다는 남자를 환대하는 수도 있냐구?”
“어른들이 보기에 좋아할 만한 애니까 그렇지. 사실 서루가 무슨 잘못이니? 다 니가 경박하게 행동해서 벌어진 일이지.”
큰 언니마저 서루 오빠를 편드는 것 같아 더는 식구들 언니들 보기도 싫었다.
“언니들도 선물이나 돌려줘. 그리고 빨리 가라 그래. 저 사람이 왜 우리 가게에 있어? 엄마는 견서방이 뭐야.”
언니들은 더는 지겹다는 듯 자기들이 먼저 흩어져 버렸다. 나도 곧 가방을 챙겨들고 찜질방을 나섰다. 민성 오빠가 너무나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미안. 오래는 못 있을 것 같아. 어머니 일 도와드려야 하거든. 제일 바쁜 시간이라.”
“바쁜데 미안해.”
“아니. 내가 미안하지. 대신 한 시간 동안 혜림이 아주 재미있게 해줄게.”
민성 오빠네 동네 커피숍에서 허락된 시간은 단 한 시간뿐이었다. 나는 또 얼굴이라도 잊어질까 얼굴만 바라보는 라고 정신이 없는데 이 남자는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쉴 새 없이 농담을 해주고 있었다.
“오빠, 나랑 도망갈래?”
“...?”
“내가 도망가자고 하면 갈 수 있어? 나 병진이처럼 그렇게 살고 싶어졌어. 아침에 눈 떴을 때 오빠 옆에서 깨고 싶고, 밤마다 발도 주물러주고 싶고. 같은 이불 덮고 잠들고 싶어졌어. 난 할 수 있는데 오빠도 할 수 있지, 응?”
“혜림이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었나보네. 그 남자가 못 헤어지겠대?”
“아니야. 그냥 오빠 옆에 있고 싶어져서 그래. 대답해봐.”
“나도 매일 혜림이랑 같이 있으면 좋지.”
“그럼 그렇게 하자. 서울도 좋지만 조금 먼 지방으로 가자. 우릴 아는 사람 없는 데로.”
“그치만 우리 엄마를 도울 사람은 나밖에 없는 걸. 혜림이도 중요하지만 엄마 곁에 있어드리는 것도 중요하거든. 우린 앞으로 같이 살 거잖아. 왜 이리 서두르는 건데?”
“그렇구나. 어머니.”
지나치게 현실적인 대답이었다.
혼자 있는 방안에서 섹시한 여가수의 음악에 맞춰 주인공인 듯 춤을 추다가 책상 모서리에 심하게 부딪쳐버린 기분이었다.
갑자기 민성 오빠가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사는 것도 도와주지 못할 것 같은 생각까지 들어버렸다. 멋진 선물들을 주지는 못해도 최소한 내가 왕자님으로 여길 만큼의 행동은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닌가? 힘든 나에게 꿈꾸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다니.
이 상황에서 어울리는 말은 목숨보다 널 더 사랑해라고 이 바보야!
돈 많은 그 남자보다 열배 백배 날 더 사랑한다는 말이라구.
“앞으로는 볼 시간을 더 자주 낼게. 이번 주말에는 가까운 공원이라도 가자. 너랑 같이 사진을 찍고 싶어.”
“그러자. 공원에도 가고, 우리 영화도 봐. 보고 싶은 영화 있어. 내가 예매해 놓을께.”
“영화는 비디오방에서 보면 안돼?”
“으. 짓궂어. 잘해주면 생각해볼게.”
돌아가는 오빠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더욱 쓸씁한 기분이 되어서 혼자 또 쇼핑을 하러 가까운 백화점으로 향했다. 이런 생활은 자제하려 했지만 쇼핑 말고는 기분을 풀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내 사진을 꽂아 줄 꽃이 가득한 하얀 액자와 같은 찻잔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커플 찻잔도 샀다. 그리고 오빠에게 어울릴만한 청바지와 모자를 사고, 같은 모자를 하나 더 샀다. 폐점 할 때까지 맨 위층부터 지하 식품 매장까지 훑다보니 손 가득 가득 쇼핑백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기분을 달래줄 줄 알았던 쇼핑은 늘어가는 짐만큼이나 마음을 무겁게만 하고 있었다.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집 앞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큰 기쁨을 느끼며 집으로 들어서려 할 때였다.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한 남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설마 서루 오빠가, 또?’
하지만 서루 오빠라고 보기에는 너무 큰 키의 남자였다. 어둠 속에 서 있는 남자를 피해 서둘러 들어가려 할 때 그 남자는 성큼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내 팔을 잡았다.
“아악!”
“저기여.”
탤런트 조윤기? 지금 내 팔을 잡은 거야?
“에, 에?”
“혹시 강묘향이라고 알아요?”
“예, 우리 언닌데요.”
“잘됐다. 언니 좀 불러줘요. 아까부터 기다렸는데 볼 수 가 있어야지.”
오랜 시간을 기다렸는지 아까 남자가 기다렸던 곳에는 담배 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우리 언니는 왜요?”
“그냥 왔다고만 전해주세요.”
“누군데요? 이름이라도 가르쳐줘야 할 거 아니에요.”
모를 일 없는 이름을 괜히 물었다. 혹시 또 모르잖아. 조윤기랑 정말 닮은 꼴일 뿐인지. 아까 촬영을 하면서 봤음에도 그 유명탤런트가 언니를 만나기 위해 집 앞에서 기다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서였다.
“음······. 제이라고 전해주세요.”
지가 제이래. 니 이름은 다들 안다구.
“알았어요. 팔부터 좀 놔줘요. 가뜩이나 무거운데.”
“죄송해요.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좀 해줘요.”
2계단씩 뛰어 집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묘향 언니, 있어? 제이가 왔어. 제이가 언니 좀 불러 달래.”
“나도 알아.”
“알아?”
알면서 바람을 맞히고 있다니. 제 정신이 아니구나.
“언니, 돈 빌렸어?”
어느새 철저히 병진이화 되어가고 있었다.
“미안한데. 언니 집에 없다고. 내일 들어온다고 전화 왔었다고 해줘.”
“싫어. 나 거짓말 하는 거 티 나잖아.”
“이만 원 줄게. 해줘.”
이만 원이라. 이 건 긴급 사태가 분명했다.